88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흐음.”
뻣뻣하게 굳은 내 옆에서 아테올이 여유로운 소리를 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군.”
“다소 긴 이야기가 됩니다만…….”
대공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건 사람들의 시선을 한층 그녀에게 집중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
“여기, 시우는 일전, 기억을 잃은 채 나크사벨의 한 골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가 시우의 허리에 팔을 감아 조금 앞쪽으로 내세웠다. 시우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는 고사하고 제국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였지요. 기본적인 생활 지식도 알지 못했고요. 하지만 기억은 못 찾아도 지식의 습득은 빨랐습니다.”
“지금 대공은 내게 시우를 소개라도 해주는 건가?”
비아냥거리는 아테올의 목소리에 대공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지루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앞으로의 이야기를 위하여 미리 말해 두어야 하는 부분인지라.”
그럼 어디 계속 해봐라, 하는 투로 아테올이 턱을 까딱였다.
“시우는 조금씩이나마 기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절기의 이름이나, 축제 같은, 단편적인 부분이었지요. 그러다 묘한 행동을 했습니다.”
대공의 시선이 잠시 나를 향했다.
“아시다시피…… 나크사벨의 대공성에는 사용하지 않는 포털이 있습니다.”
나는 움찔했다. 저 포털에 대해 알고 있다. 오래전 탑주가 대공성에 만들어 놓은 포털로, 탑주 말고는 아무도 그 목적지를 모른다. 탑주는 대공에게 목적지를 알려줄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의미야 간단했다. 대공가에 탑주의 힘을 과시하는 겸,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 포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의 균형이 어디에 더 기울어져 있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탑주는 그 포털이 대단히 위험한 곳으로 통한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만들어두긴 했으나 누구도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위험한 곳으로 통하는지, 아니면 이동하면 바로 탑주가 알 수 있는 곳으로 통하는지조차 아무도 몰랐다.
대공가는 포털이 있는 곳을 봉인해 두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그 포털을 통해 누군가 넘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대공가에게 있어서는 실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 또한 사죄드릴 일이나……, 그 포털을 사용했습니다.”
뭐? 무심코 물으려던 내 입이 간신히 다물렸다.
“성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시우가 우연히 그 포털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문 너머에서 저곳에 포털이 있음을 알았고, 또한, 그것의 목적지가 어디인지까지 말했지요.”
사람들이 술렁였다. 마법사가 이동을 위해 만든 포털의 목적지를 알 수 있는 건 설치한 마법사 본인이나, 그보다 고위의 마법사뿐이었다.
“그 말을 믿었다고?”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테올의 물음에 대공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저 위대한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포털의 목적지는 어디던가?”
“하스파르스의 늪지대 한가운데였습니다.”
북부, 나크사벨은 어디나 위험한 곳이 있지만 특히 들어가선 안 되는 구역이 있다. 그중 하나가 하스파르스의 늪지대였다. 바닥이 온통 바닥없는 늪이며, 나무 위를 걸어 이동해야 하는데 어디서 어떤 마물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고, 길 또한 복잡해 들어가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곳.
“꽤나 위험한 곳이군. 우리 탑주님께서는 장난기가 있으셔서.”
아테올이 웃었지만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 ‘장난기 있는’ 탑주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곳에 포털을 만들어둔 건지 누가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데, 목적지를 확신한다는 건…….”
여전히 웃음을 띤 아테올이 말하며 대공을 빤히 보았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제가 직접 포털에 들어가 확인했습니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당연하다. 대공이 지금 길에서 주운 정체 모를 자의 말 한마디에 어디로 통할지 모르는, 만들어진 이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포털에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어떤 곳이든 위험에서 확실히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저뿐이었기에, 괜한 희생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아테올이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따라 웃는 사람은 없었다.
“결과는 어땠지?”
“다행히도…… 탑주님. 포털의 도착 지점은 그나마 땅이 단단한 곳으로 해두셨더군요.”
나는 숨을 멈췄다. 나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수군대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내 겉모습에만은 동요가 드러나지 않았음을 간신히 확인했다. 그러나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대공.”
“예, 폐하.”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주위로 넘실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데. 현명한 그대가 어째서 고작 그런 한마디에 봉인된 포털을 넘어갈 생각을 한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대공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어떤 것보다 불길한 미소였다.
“탑주님, 오래전에 제게 딱 한 번 존안을 보여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나는 후드 안에서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이 내 얼굴을…… 본 적이 있다고?
“기억하시겠지요?”
“…….”
“그래서 처음 시우를 찾았을 때 저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시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양 뺨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반짝였다.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저는 제 예감을 믿는 편이지요.”
한마디 덧붙인 대공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 청합니다. 필리아의 열쇠를 사용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말인가?”
“예. 폐하.”
“듣도록 하지.”
대공의 시선이 조용히 나에게로 향했다. 불길한 예감은 이제 최고조였다. 양쪽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 대공이 입을 열었다.
“탑주님께, 이곳에서 존안을 보여달라 요청해 주십시오.”
정적.
아테올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만약 거절하면 상황이 더 이상해진다는 걸. 이미 대공이 한 이야기만으로 모두 추측했을 것이다. 어차피 얼굴을 보이나 안 보이나 사람들이 할 이야기는 똑같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을 가다듬었다. 최소한 불안에 떠는 얼굴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탑주님.”
아테올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후드에 손을 얹었다. 모든 시선이 날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후드를 젖힌 순간, 연회장 내는 기름에 콩이라도 뿌린 듯한 소란에 휩싸였다. 시우가 오늘따라 화려하게 꾸민 이유가 있었다. 가볍게 화장을 한 그는 나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이제 됐나, 대공?”
아테올의 목소리에 대공은 눈을 깜빡였다.
“그대가 여기에 와서 소문 운운하며 시작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아.”
“결코 그런 뜻으로 올린 말씀이 아닙니다.”
아니긴. 나는 상기된 시우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우와 탑주님의 얼굴이 닮았다. 그리고 시우가 탑주님께서 만든 포털의 목적지를 알아낸 걸로 추정된다, 고.”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 근거로 소문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내게는 근거가 다소 빈약하게 들리는데 말이야.”
“글쎄요, 폐하. 빈약한지 아닌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빈약하다면 빈약했다. 얼굴은 닮을 수도 있는 거고 포털의 목적지를 맞힌 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앞뒤의 순서를 바꾸면 된다. 대공이 먼저 포털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 목적지를 시우가 알려줬다고 한다면. 위험 부담은 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회장 내는 수군거림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믿든 안 믿든 이건 시끄러워지고도 남을 일이 맞으니까. 후드를 벗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반응이 넓은 시야로, 피부로, 가려지지 않은 귀로 여과 없이 전해졌다. 손까지 완전히 가려지는 펑퍼짐한 옷인 게 다행이었다. 후들거리는 팔과 다리를 감출 수 있었으니까.
아테올이 나를 돌아보고 좀 더 다가오려 했을 때였다.
“저, 제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시우였다. 집중된 시선에 순간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킨 그가 말했다.
“제가…… 탑의 내부 구조를 조금 알아요. 기억은 드문드문하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수군거림은 더욱 커졌다. 나 역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탑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선대 황후와 황제조차 들어오지 못한 게 탑이었다. 미궁과 온갖 마법으로 보호받는, 지상에 있되 지상이 아닌 구역이다. 무슨 수를 써도 탑의 내부 구조도 같은 건 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우의 말은 무게감이 컸다.
“여기서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까……, 시종장님에게 조용히 말할게요.”
결국 그 말에 바깥에 있던 클로든이 연회장 안으로 불려 왔다. 연회장 안의 소식은 이미 바깥까지 전해졌는지, 그는 제법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런, 그러면 안 되는데. 그쪽이 네 진짜 주인이라고…….
시우는 딱딱한 얼굴의 클로든에게 몇 마디를 소곤거렸고, 듣는 동안 점점 클로든의 표정이 바뀌었다. 시우가 말을 마친 뒤. 클로든은 고요해진 연회장에 멀리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탑의 내부 구조와 실제로 일치합니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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