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대공은 역시, 정말로 ‘때’가 되어 찾아온 것이었다. 모두가 고요해진 가운데 가장 먼저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그걸 어디서 알았지?”
“저, 저는…….”
생각한 반응과 달랐는지 시우가 우물거리다가 대공의 뒤로 숨었다.
“기, 기억난,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어느새 그에게서 멀어진 클로든이 내 뒤로 와 있었다. 그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전생에선 이런 일까지 일어나진 않았다. 그저 시우가 탑주의 힘을 되찾고, 내가 있던 곳으로 올라오고, 난 거기서 끌려 나오고, 그 과정에서 클로든과 세르타, 벨을 마주치고. 때문에 아직도 나를 탑주로 믿는 클로든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대공. 그리고 그대. 지금 하는 짓이 즉결 처분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죄라는 건 알고 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뜬금없이 황제와 탑주 앞에서 자신이 진짜 탑주라고 주장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경우다. 대공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하신다면 폐하의 행동은 어쩌면 입막음으로 보일 수도 있지요.”
“그럴까?”
스릉. 기어이 아테올이 검을 뽑았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진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사람. 그의 검집에서 나온 칼날에서 파리할 정도로 날카로운 빛이 흘렀다. 힘이 들어간 팔. 그가 고작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시우나 대공에게 칼을 휘두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로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아테올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돌아온다.
여기서 내가 우물쭈물하면 안 되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확 트인 시야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를, 그리고 동시에 스스로도 진정시키듯이 팔을 쓸어내리자 아테올이 나를 보며 반걸음 정도 물러나 칼이 들린 손을 내렸다. 일단은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너희의 주장은 잘 알겠어.”
나는 숨을 고른 뒤에 최대한 차분히 들리도록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지금 내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반박의 증거가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나보다 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겠네.”
“그건.”
시우가 주춤거리며 대꾸했다.
“마, 마법을 빼앗겨서, 그건…….”
대공이 시우를 흘끗 보았다. 마법을 빼앗겼다니, 지금 상황에서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우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릴뿐더러, 사실이라 해도 탑주가 듣도 보도 못한 누군가에게 마법을 빼앗기다니 그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힘을 빼앗긴 시점에서 이미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시우의 주장이 사실임을 아는 내 입장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는 ‘어?’ 싶은 소리일 거다.
나는 그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반박하면 거짓말이 되기에. 대신 다른 방법을 골랐다.
“네 머리 위의 천장을 무너뜨릴 거야.”
“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
말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쩌적, 소리가 들렸다. 대리석과 유리로 된 천장은 정확하게 아주 일부분만 갈라져 먼지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딱 한 곳, 대공과 시우가 서 있던 곳으로만. 돌가루와 자잘한 유리 조각조차 그 자리 너머로는 조금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다만 그 돌 더미 아래에 시우가 깔리는 일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천장이 갈라지자 즉시 대공이 시우를 끌고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것도 예상한 바였다. 만약 피하지 않는다면 중간에서 멈출 생각이었고.
천장에 뚫린 구멍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은 후, 대공이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짐짓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테올은 그녀를 보며 픽 웃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대역이야.”
“혹은 대역을 막으려 하는 것이거나요.”
“대공.”
아테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누가 바늘을 떨어뜨려도 들릴 듯이 고요했고, 숨조차 편히 쉬는 이가 없었다. 연회를 취재하러 들어왔던 기자들이 연회장 가장자리에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벌써 내일 신문의 머리기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완전히 잦아들었던 ‘탑주 가짜설’은 다시 폭주하겠지.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다 물거품이다.
다시 아테올을 보았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으나 여유는 잃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그 이상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구금을 명한다. 반론하겠나?”
대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위병들을 따라갔다. 연회는 당연히 거기서 파장이었다. 가장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온 나를 아테올은 탑까지 쫓아왔다. 클로든도 물러가고 문이 닫힌 뒤, 나는 아테올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아테올, 무슨 방법 있어?”
“전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안 돼.”
아테올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전부터 말한 방법이란 하나다. 시우가 힘을 찾아가기 전에 제거하는 것.
“왜 그렇게 싫어하십니까?”
너무 당연한 질문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 그야, 그쪽이 진짜고 내가 가짜니까.”
“그게 아니라면요?”
“뭐?”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쪽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합니다. 어쩌면 당신도 진짜 탑주였을 때의 기억을 잃은 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가져다 붙이기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지 안다. 행복 회로다. 나는 행복 회로를 돌릴 만큼 긍정적인……, 이걸 긍정적이라고 말해도 되나? 아무튼 그런 성격이 못 되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
“늦었습니다.”
차라리 빨리 시우의 편으로 붙으라는 조언을 해주려는데, 아테올이 내 말을 잘랐다. 이어 그가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는 입 맞췄다. 여유로워 보이던 표정과 달리 입맞춤은 다소 조급하게 느껴졌다. 짧은 키스 후, 내 입술을 닦아주며 그가 말했다.
“이미 우리는 같은 개를 키우고 있잖아요.”
“으음…….”
이건 ‘같은 배를 탔다’와 비슷한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내가 준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아직 늦은 건 아니지 않을까? 아테올의 언변이라면 시우는 물론 대공도 잘 구워삶을 수 있을 텐데.
“저는 지금까지 당신과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그게 뭐?”
“당연히 당신의 얼굴을 안다는 의미지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당신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고, 그 덕에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또 가짜 소문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했죠.”
“…….”
“당신과 공범이라는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아테올이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말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얼굴 아는 걸로 의심의 여지가 충분한 거면 클로든이랑 세르타는? 벨은? 아니, 탑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 전부!”
“그들과 저는 다릅니다. 그들은 당신을 얼굴만으로 알아보는 게 아니니까요.”
“뭐?”
“그들은 당신을 위해 태어난 마탑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마력으로 당신을 알아봅니다. 마력을 가진 사람을 주인으로 인식한다는 뜻이죠.”
즉, 시우의 주장이 맞는다고 해도 마력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 그들이 구분을 못 하는 건 당연하다는 뜻이다.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테올에게는 특별한 일이 일어났어요!]
아테올이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 아테올은 미궁을 빠져나왔으니까요.
뭔 소리야……. 오랜만에 나왔다 싶더니 또 애매한 소리만 하고는 툭 꺼져버렸다. 미궁, 미궁이라. 전에도 상태창이 미궁이 어쩌고 하는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상황이었더라.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은 상태창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고 아테올을 보았다.
“그래서…… 계속 날 돕겠다는 뜻이야?”
“당신을 돕는 게 아니라 제 일입니다.”
“하아…….”
“못 믿으시는군요. 당신이 기억을 잃은 걸 수도 있다니까요.”
“그건 너무 터무니없어.”
아테올한테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고, 그 세계에서 나고 자란 기억이 버젓이 있다는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여기가 책 속의 세계인 것도 언젠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한숨만 쉬고 있는데 아테올이 갑자기 클로든을 불러, 세르타와 함께 들어오라고 전했다.
“갑자기 둘은 왜?”
“물을 게 있습니다.”
세르타는 근신 중이었기에 잠시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이 들어와 자리에 서자 아테올이 물었다.
“평소 탑주님이 가짜라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있나?”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그야, 있을지도 모른다. 초반에 분명 생각하지 않았던가. 날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은 없다고. 그러나 세르타가 단지, 하고 말을 덧붙였다.
“묘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왜지?”
“일전에, 새로 단장한 정원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조금 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빙의 초반이라서 뭐가 바뀌었는지는 몰랐지만,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기에 세르타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세르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그 정원은 새로 단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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