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그는 오늘도 매끈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절반만 뒤로 넘긴 머리와 그에 맞추어 한쪽에만 건 긴 귀걸이가 잘 어울렸다. 멍하니 모습을 바라보고 있느라 그가 뭐라고 말했는데도 놓칠 정도였다.
“듣고 계십니까?”
“응? 응, 잘 어울려. 아니. 안 듣고 있었어. 미안.”
“보시기에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만.”
아테올이 내 앞에서 과시하듯이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긴 망토와 장신구가 나풀거렸다. 눈이 망토 끝자락까지 갔다가 다시 아테올의 얼굴로 향했다. 눈웃음을 짓는 얼굴에 또 넋을 놓을 뻔했는데, 다행히 그가 내 정신 줄을 붙잡았다.
“식사를 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입맛이 없어서……. 대충 먹었어.”
“대추야자랑 초콜릿 몇 알은 식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아테올이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
“잠시 눈을 감고 계세요.”
그리고 손짓하는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아테올의 손가락이 입술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벌린 입 안으로 그리 크지 않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심코 깨물자 고소한 맛이 입에 가득 퍼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떴으나 아테올의 손바닥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감각이 입에만 집중되었다. 아테올이 내 입에 넣은 건 뭔지 모를 음식이었다. 아테올은 내가 그것을 씹기 시작한 후에야 손을 치웠다.
고기, 채소, 소스, 얇은 빵,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씹혔다.
‘……맛있어.’
내내 달달한 간식거리만 대강 먹다가 이걸 먹으니 머릿속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입 안에 있던 걸 전부 씹어 삼키고 고개를 돌리자 아테올의 손에 작은 쟁반이 들린 게 보였다.
쟁반 위에 놓인 건 작게 말린 밀전병 여러 개였다. 작지만 통통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게 속 재료가 제법 풍부하게 들어간 듯했다. 쟁반에는 라임과 레몬이 듬뿍 들어간 음료도 함께였다.
신기하게도 뭔가를, 특히 식사가 될 만한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는데 눈을 감은 채 입에 넣자 허기와 만족감이 함께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드는 특유의 만족감이었다.
전혀 식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한 일이다. 너무 잘생긴 걸 봤더니 없던 식욕이 돌아왔나…….
“입에는 맞으십니까?”
“응.”
“다행이군요.”
아테올은 하나를 더 집어 내 입에 넣었다. 나는 저항 없이 입을 벌렸다. 그가 먹여주는 대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삼키다 보니 접시 위의 음식은 금세 절반이 넘게 비워졌다.
꽤 열심히 먹었다. 배가 불러 오는 느낌에 짧게 한숨을 내쉬자 아테올은 음료를 잔에 따라 내밀었다. 시원하고 새콤하면서 달달한 음료는 입 안에 남은 음식 맛과 잘 어울렸다.
그래도 이제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는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아테올이 쟁반을 클로든에게 건네며 물리도록 했다.
“연회에서도 아무것도 안 드시면서, 하루 종일 속이 빈 상태로 있는 건 안 좋습니다. 기력도 떨어지고요.”
“으음…….”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아테올을 보았다. 지금까지 내 식사로 아테올이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게다가 어째 싫다는 나에게 뭔가를 먹이는 게 상당히 익숙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과해진 다정함의 한 부분인가.
그 후 손과(나는 손은 쓰지도 않았는데) 입 안을 다시 씻고, 조금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아테올과 함께 탑에서 나왔다. 탑에서 오늘의 연회장, 연꽃의 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 하지만 마차가 걷는 것보다도 느리게 움직였다. 덕분에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마차 안에서 아테올이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
했을 리가. 애초에 준비가 될 만한 사안이 아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아테올은 피식 웃었다.
“뭐, 괜찮습니다. 당신이 마음의 준비를 하실 일은 없으니.”
“……준비를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갑자기 비관적이 되셨군요.”
“나는 계속 비관적이었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애초 아테올을 만났을 때, 상태창만 아니었다면 그에게서 도망 다니기 바빴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이방인이다. 내가 잘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잘돼서도 안 됨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건 주인공의, 원래 이 세계에 소속된 존재의 몫이니까.
그러고 보면, 아테올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사실 소설의 주인공이 아테올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는데. 아니지. 만약에 아테올이 악역이라면? 그가 황제가 된 것까지도 주인공의, 유리에게 시련을 주기 위한 장치 중 하나라면?
갑자기 든 불길한 생각에 아테올을 보았다. 그 역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리 없습니다.”
“뭐?”
“저를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비관이라곤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맴돌던 불길하고 어려운 생각들이 아테올의 한마디에 날아가고, 대신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어땠던가에 대한 회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그의 뒤를 밟다가 들켜서 싸늘한 눈빛을 받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우리 첫 만남이라면 나도 똑똑히 기억해.”
“그래요?”
“그래. 네가 날 보고 쥐새끼라고 했잖아.”
“…….”
아테올이 입을 다물더니 눈썹을 까딱였다.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 딱히, 흠. 틀린 말도 아니었고.”
“제가 개망나니 놈인 걸 기억해 주세요. 원래 저는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합니다.”
이번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변명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어쨌든 이제 아테올에게 쥐새끼로 보이진 않는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무튼 다시 말씀드리지만……. 마음의 준비는 필요 없습니다. 다 잘될 겁니다. 이번에는.”
그때 마차가 멈춰 서고 문 앞에 인기척이 일었다. 소란스러운 연회장의 소음이 마차 안까지 들려왔다. 내가 흘끗 마차 밖을 보려 한 순간, 아테올이 내 목을 부드럽게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귀에 입술을 댔다.
“이번에는 당신 혼자가 아니니까요.”
“뭐?”
“내리시죠.”
속삭임은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면서 뭐라고 한 거냐고 재차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회장에 들어가서는 더 이상 그것을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도착해 연회장 중앙쯤에 자리를 잡고 서 있던 두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공과 시우.
무슨 일인지 시우는 평소보다 화려하게 꾸민 상태였다. 샹들리에의 빛 아래 선 두 사람을 본 순간부터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이 소설의, 내가 읽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구구절절하고 허술한 서술이 읽지도 않았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서술 내용은 요약하자면 이랬다. ‘악역이 등장했다.’
“탑주님, 폐하.”
가까이 다가가자 대공과 시우가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다시 반듯하게 일어난 대공은 위엄에 넘치는 모습이었고, 그 옆의 시우는 어딘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동시에 내 가슴도 다시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저 두 사람은 절대로, 사죄나 배웅 같은 사소한 이유로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다. 분명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앞으로의 소설 진행에 큰 영향을 줄, 큰 사건이.
대공이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사죄드릴 일이 있습니다.”
나는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대공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웠다. 사죄드릴 일이라고? 아테올을 힐끗 보자 그는 희미한 웃음을 띤 채 대공을 보고 있었다.
“사죄라. 무슨 일이지?”
어느덧 연회장의 모든 소란은 사라진 뒤였다. 대공이 우리에게 인사를 한 순간부터 시선이 전부 집중되었고, 대공의 입에서 나온 사죄라는 말에 작게 소곤대는 소리마저 사그라졌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연회장 구석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수도에도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던 것으로 압니다.”
말과 함께 대공은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에 그녀가 말하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탑주가 가짜라는, 사실은 진실인 그 소문. 대공의 눈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고 나는 시우를 보았다. 시우는 눈을 내리깐 채 대공에게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문이 대공령까지 퍼진 건가? 달가운 일은 아니군.”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고?”
“소문이 퍼진 게 아니라, 그 소문 자체가…… 나크사벨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마터면 나는 손을 뻗어 아테올의 팔을 잡을 뻔했다.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서. 체력 12의 비루한 몸이었지만 다행히 어떤 지지대도 없이 이 상황을 잘 버텨냈다. 앞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공이 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절대 사죄를 위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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