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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86화 (86/93)

86화

06. 기억이 없으면 사람은 미궁에 빠진다

“예? 어떤, 아…….”

물으려 하던 클로든은 금세 그게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 안경을 매만졌다. 당연히 내가 지금 강아지를 떠안길 만한 사람은 아테올 하나밖에 없다. 벨도 눈치챈 듯 흥미롭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빗질을 조금 더 할까요?”

“아니, 됐어.”

지금도 충분히 귀엽다. 보송보송해진 강아지는 기분이 좋은지 내 발치를 한참 맴돌다가 발라당 배를 깠다. 털 동물은 정말 별로지만 말랑말랑한 분홍빛 배의 촉감이 상상이 가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벨도 내 앞에 앉아 강아지의 하찮은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었다.

“흠, 흠.”

“왜? 클로든도 만지고 싶어?”

“그렇게 열성적으로 만지고 계신 걸 보니 좀 궁금하긴 하군요.”

돌아온 건 아테올의 목소리였다. 클로든도 강아지를 만지고 싶다는 뜻으로 헛기침한 건 줄 알았는데, 아테올이 왔다고 알려준 것이었던 모양이다. 벨이 얼른 일어나 예를 갖췄다.

“됐다. 유리 님, 수하들에게 더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는데…….”

“그럼 물러가라고 하죠.”

그러고 보니 시간이 늦었다. 아쉬운 얼굴의 벨과 클로든이 물러가고, 나는 바닥이 아닌 의자에 제대로 앉았다. 아테올이 내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웬 강아지입니까?”

“주웠어. 누가 버렸더라고.”

“저런.”

아테올은 별 감흥이 없는 듯했다. 나는 따뜻한 물주머니 같은 작은 털 덩어리를 두 손으로 받쳐 아테올에게 내밀었다.

“데리고 갈래?”

“네?”

“동물이랑 친해지고 싶다며.”

“……친해지고 싶다고는 안 했습니다. 동물들이 저를 싫어한다고 했지.”

“그거나 그거나.”

그러자 아테올은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되짚어 생각해 봐도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개를 데려가라는 게 뜬금없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잘 길러주면 동물들이 널 좋아하게 될 거야.”

다음 순간, 아테올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거운 소파가 뒤로 드륵 밀릴 정도로. 체중을 가득 실은 그의 몸을 받아내면서 내 손은 저절로 강아지에게서 떨어졌고, 강아지가 의아한 듯 낑낑 소리를 냈다. 아테올이 뭐라고 중얼거렸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말을, 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입 안에서 뭉개듯 말해서 확실하진 않다. 아테올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날 안고 있다가 강아지가 나와 그의 발목을 종횡무진 왔다 갔다 할 때쯤에야 물러났다. 두 손으로 강아지를 들어 올린 그가 강아지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했다.

“발이 큰 걸 보니 꽤 크게 자라겠군요. 자주 보러 오십시오.”

강아지는 아테올의 품에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몇 번 더 잘 닦은 감자 같은 머리통을 쓰다듬은 그가 강아지를 밖으로 내놓고 돌아왔다. 클로든이 강아지와 함께 멀어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갔다 오신 겁니까?”

“응, 잠깐.”

“불꽃놀이를 보셨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제가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너는 바쁘잖아?”

“그럼 황궁 정원에서 불꽃을 쏘죠.”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든 아테올이 안은 자세 그대로 외출복을 벗기며 말하는 틈틈이 입을 맞췄다. 기분 탓인가, 오늘따라 유난히 치대는 것 같았다. 강아지 입양에 감동이라도 받았나. 사실 엄청나게 강아지가 키우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유리 님.”

“왜?”

“그냥 불러 봤습니다.”

“……?”

아테올은 황당해하는 나에게 키스했다. 아무래도 강아지에 감동받은 게 맞는 듯했다.

***

두 마리의 너구리가 재빨리 아테올의 옆을 벗어나 유리 곁으로 달려갔다. 다른 동물들 역시 아테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를 흘끔거리고만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테올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다니까요. 동물들은 저를 싫어합니다.”

“그래?”

“아마 피 냄새가 싫은 거겠지요.”

“지금은 전혀 안 나는데.”

“동물들은 감이 좋습니다. 이미 흔적도 남지 않은 냄새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아테올이 유감이라는 듯이 멀리 떨어진 강아지들을 바라보았다. 유기된 강아지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기에 너구리 두 마리를 데리고 함께 보러 온 차였다. 유리는 언제나 동물은 질색이라고 말하면서 누구보다 작고 귀여운(굳이 작지 않아도) 동물을 예뻐했다.

아테올 또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동물들이 아테올을 좋아하지 않을 뿐. 유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강아지 한 마리를 안아 들었다.

“동물들이 너를 좋아하게 만들어줄까?”

이번엔 고개를 갸우뚱할 차례였다. 유리가 안은 강아지와 유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그런 게 가능합니까?” 하고 물었다. 유리가 미소를 지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

“마법으로 억지로 마음을 얻고 싶을 만큼 간절한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사랑받으면 좋잖아?”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안고 있던 강아지를 아테올에게 넘겨주었다.

***

또 이상한 꿈을 꿨다. 아테올에게 강아지를 주는 꿈이었다. 뭔가 생물 같은 걸 넘겨받는 꿈은 태몽이라던데 이건 입장이 살짝 바뀐 태몽인 건가. 아테올이 혹시 아이를……? 미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애초에 여기는 아이가 사람 몸에서 태어나는 세계가 아니니까.

어쨌든, 꿈에서 나는 또 아테올과 다정다감했다. 이상하게도 요즘 꾸는 꿈에선 아테올이 자꾸 나를 ‘유리’라고 불렀다. 유리 님도, 탑주님도 아니고 그냥 유리. 뭐랄까. 그쪽이 진짜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좋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아테올한테 앞으로 유리라고 불러달라고 하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런 꿈을 꾸나.’

아니지, 스트레스 때문이라면 좀 더 극적이고 피곤한 꿈을 꿔야겠지. 하지만 요즘 스트레스가 심한 건 사실이었다. 대공의 방문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간을 더 질질 끌 수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감시자들을 배웅한다는 구실과 다시 한번 사과한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문을 하염없이 막는 건 분명 이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버리는 게 낫겠다는 아테올의 판단에 대공의 방문은 그로부터 사흘 후로 정해졌고, 날짜가 정해지자 초조해져서 손톱만 깨물어대는 사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오늘 저녁. 대공이 황궁에 도착한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커다란 베개로 머리를 감쌌다. 오늘 저녁에는 꼼짝없이 연회에 나가서 대공을 만나야 했다. 시우도 아마 함께 올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태창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시우의 호감도는 99%였다. 다시 만나면 어쩌면 100%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아테올의 호감도가 100%가 되었는데도 아직 특별한 일은 무엇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대공과 시우가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멋지게 자기 자리를 탈환하는 것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런 상상을 할 때면 내게 독약을 내밀던 아테올의 얼굴이 따라왔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대공이 과연 정의감만 가지고, 탑주만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그러는 걸까? 황제라는 자리에 욕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즉, 이제는 내 위기에 아테올도 함께 말려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시우에게 그렇게 대했으니 시우를 회유해 함께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가슴이 시큰시큰할 정도로 크고 서늘하게 뛰었다. 나는 진짜 미련하고 멍청한 인간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어떻게 하지? 어쩌지?’만 반복하며 늘어져 있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아테올을 보면서, 사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위안을 받고 안주해 왔으니까.

“탑주님.”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데 클로든이 문을 두드렸다. 슬슬 연회 준비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진하게 우린 차를 들고 들어온 클로든이 날 보고 멈칫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니, 응.”

괜찮은 것도, 괜찮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이 텅 빈 듯이 아무런 생각도 안 들면서 또한 불안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클로든을 한 번 보고는 찻잔을 집었다. 적갈색이 돌도록 진한 차였는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전부 마신 뒤에 잔을 내려놓았다.

“식사를 준비할까요?”

“아니…….”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것 같아 거절했다. 내 대답에 클로든은 더 권하는 일 없이 목욕 준비를 시작했다. 긴 목욕이 끝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연회 준비였다. 식사는 여전히 할 마음이 들지 않았으나 클로든이 중간중간 젤리며 말린 과일, 대추야자, 초콜릿 따위를 가져와 한두 개씩 권했고 그건 큰 거부감 없이 입으로 들어갔다. 겨우 단장이 끝났을 때는 창밖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후드를 씌울까요?”

어김없이 아쉽다는 기색으로 클로든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 위로 헐렁한 후드가 덮이며 내 얼굴을 절반 이상 가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 밖에서 세르타가 말했다.

“황제 폐하가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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