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나는 남은 우기를 그대로 골골거리며 보냈다.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주위 측근들에게 친절하게 굴다 보니 게이지는 차츰 회복되었고, 매일 잘 먹어서 체력도 계속 12를 유지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슬슬 약이 떨어져 가고 있는데,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없어진 약에 클로든과 에레토가 뭐라고 말할지 걱정이었다.
우기가 끝나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나뭇잎에 맺힌 신선한 빗방울과 맑은 하늘 아래에서 내게 주어진 일은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손님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탑주의 공식적인 알현실은 미궁 밖에 작은 신전처럼 지어져 있었다. 나는 아직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편한 실내복 위에 두꺼운 로브만 걸친 채 알현실의 높은 의자에 앉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금 더 미루어도 될 텐데요.”
세르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 뒤에 선 벨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클로든도 미루길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미룰 수 있다고 했으나, 우기 내내 드러누워 있던 나 때문에 날 찾는 손님들의 애간장은 타들어가다 못해 재만 남았을 것이다.
“괜찮아.”
대강 들어주고 쫓아내면 되니까. 이대로 손님을 안 만나고 버텼다간 슬슬 게이지가 깎일 것 같았다. 알현실 문이 열리고, 주렁주렁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우르르 들어와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높은 탑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사말이 주절주절 이어지다가 한참 후 조심스럽게 본론이 나왔다. 역시 4황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괜히 잘못 말했다가 게이지가 깎이는 게 무섭다. 이들은 황제와 황후만큼 분명하게 못을 박아둬야 할 자들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혹시나 반란을 준비할 만큼 야심 있는 자가 있진 않은지 꼼꼼히 살폈다. ……살핀다고 내가 아나. 그냥 ‘느낌 싸한데?’ ‘찜찜한데?’ 싶은 사람이 없나 관찰한 거지. 하지만 촉이란 모름지기 조상님의 시그널이라고 했다. 내 조상님이 누구인지 몰라도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이상 조상은 있겠지. 아닌가? 조상님이 여기까지 못 따라왔으려나?
아무튼 줄줄이 들어와 똑같은 인사를 하는 귀족들은 하는 말도 다 똑같았다. 왜 하필 4황자냐. 진짜로 4황자냐. 황태자는? 2황자는? 3황자는? 그러곤 조선 시대 풍으로 말하자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부르짖은 뒤 시간이 다 되어 끌려 나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냥 가만히 있으면 클로든이 날 대신해서 “탑주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드디어 쌓여 있던 손님들이 다 사라졌다.
“내일도 알현을 청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만날게.”
“알겠습니다.”
클로든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끄덕였다. 탑으로 돌아와서 좀 쉬고 있자, 클로든이 이번엔 서신을 가지고 왔다.
“이쪽은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될 듯한 서신들입니다.”
“클로든이 알아서 처리해 줘.”
“예.”
은도 아니고 황동으로 된 쟁반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은 여러 귀족들이 보낸 통촉 촉구의 서신이겠지. 클로든 말대로 굳이 읽을 필요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금 쟁반 위에 서신이 하나 있었다. 황제나 황후가 또 서신까지 보냈나 했더니, 아니었다. 이제 아테올도 금 쟁반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된 모양이다. 나는 공략캐에게 편지를 받은 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약간 두근거리면서 편지를 뜯었다.
편지에 으레 붙는 온갖 미사여구와 수사와 사족을 제외하면 단순한 내용이다. 날이 좋고 병석에서 막 일어나셨으니 신선한 공기를 쐬어야 하고 자기네 궁 요리장이 가벼운 음식을 잘 만들고 어쩌고저쩌고……. 요약하면 이거였다.
‘외출할까요? 도시락 싸서.’
날짜는 오늘이든 내일이든 언제든 내가 좋은 날로. 장소는 자기가 아는 좋은 곳. 장소 선정이 어째 수상쩍었지만, 공략캐 쪽에서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는데 거절하는 건 루트를 박살 내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하나밖에 없는 공략캐에, 공략 못 하면 죽음뿐인데 내가 거절할 리가.
“심부름꾼을 보내줘. 오늘 가겠다고.”
“오늘이요?”
드물게 클로든이 다시 물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주위에 온통 걱정만 끼치고 있군. 그렇다고 걱정 안 하게 만들어주자니 게이지가 떨어질 테고.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넘어간 오후였다. 심부름꾼을 보내긴 했으나 오늘은 너무 늦어 곤란하다는 대답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테올은 곧바로 마차를 끌고 탑으로 찾아왔다. 대단한 행동력이었다.
“빠르네.”
“탑주님께서 수행을 허락하셨는데 한밤중이라도 달려와야지요.”
말은 잘하……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보였다. 이게 호감도의 힘인가. 근데 겉으로는 그렇게 좋다는 티가 안 난단 말이야. 오히려 호감도가 낮을 때 하던 은근한 행동들도 안 하게 되어 상태창만 없으면 ‘날 별로 안 좋아하나?’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긴 나를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마차는 서편의 황궁 정원에서 멈췄다. 이곳에서도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지구와 다른 건, 이곳의 신은 행성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짊어진 신이라는 것이다. 보통 태양신이라는 건, 신들의 중심이 되거나 못 되어도 한 자리는 차지하는 법인데 여기선 그렇지 못했다. 태양신은 한때 세계를 차지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영원히 무거운 짐을 끄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설정이 있었다.
작가가 설정을 세세하게 짜둔 건지 신화 책을 보면 상당히 촘촘했다. 달도 태양과 마찬가지로 신이다. 매달 다른 신이 달의 자리에 오르고, 낮에 태양이 지나간 궤적을 아름다운 보석을 든 채 따라간다. 이번 달 밤하늘을 지나가는 보석을 든 건 그늘의 신 오르히였고, 우기가 끝나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절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개념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주일은 태양계에서 따온 건데 이곳엔 태양계가 없으니까. 대신 5와 0이 들어가는 날을 중심으로 주차가 돌아가고, 그날은 공휴일이다. 그런 설정인데 가끔 책에 토요일이라서 쉬었다느니 월요일이라 사람들이 축 처져 있었다느니 하는 설정 구멍이 튀어나와 몰입을 깨뜨렸지만.
처음엔 오르히의 달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았으나 나도 여기서 6년을 살았다. 이제 7월이란 말만큼 오르히라 하면 여름, 더위의 느낌이 물씬 들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우기까진 아직 쌀쌀하다. 달이 바뀌고도 처음 며칠은 선선한 듯싶다가, 어느 날 갑자기 더워지곤 했다. 다음 달인 루아의 달까지도 더위는 계속된다.
“아직은 날씨가 많이 덥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마차에서 먼저 내려 손을 뻗으며 아테올이 말했다. 대체로 비싼 옷들은 옷 자체에 마법이 걸려 있어서 더위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황궁과 마탑도 사계절 비슷한 온도를 유지한다. 이들에게 더위와 추위는 느끼고 싶을 때만 잠깐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고.
지난번에 마차에서 그냥 뛰어내렸을 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이번엔 순순히 아테올의 손을 잡았다. 매일 단련하는 무인의 손은 무척 단단했고,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괜히 한번 살짝 쥐어보자 아테올은 웃으며 내 손을 꽉 잡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거의 마차에서 안겨 내려오다시피 했다. 두 발이 폭신한 잔디에 안전하게 닿았다.
아테올의 시종과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우리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차양에 먹을 것까지 없는 게 없었다. 꼭 나랑 나오기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의자는 겨우 거처로 돌아가는 태양신의 걸음이 잘 보일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날씨도 선선하니 앉아서 석양이나 구경하자는 뜻인 모양이다. 아테올은 나보다 조금 낮은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이제 괜찮아.”
“아직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건 오늘 손님을 많이 만나서.”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귀찮으니 그냥 물러가라고 하시면 될 것을.”
“원래 내가 그런 성격이었던 모양이지?”
“만나기 쉬운 분은 아니셨지요.”
가짜 탑주한테 거절 좀 당해 봤나. 아니면…… 진짜 유리한테? 생각해 보니 어느 시점부터 유리가 가짜 탑주로 바뀐 건지도 난 모른다. 하. 딱 한 번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책 완독하고 돌아올 텐데. 중요한 건 손바닥에 다 메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다 만났어.”
“적당히 거절하셔도 됩니다. 감히 탑주님께 강제로 손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손님이 찾아오는 대로 다 만났다. 한 번도 손님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은 적은 없지만.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다 뭐라고 떠들고 간 걸까. 찾아왔다가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진 않았겠지. 내가 뭘 해준 기억은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준 걸 수도 있고.
“……님. 탑주님?”
“어?”
딴생각에 빠진 사이 아테올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뒤늦게 대답하자 아테올은 슬쩍 내 무릎에 한 손을 얹었다. 로브 너머로도 아테올의 손 온도가 느껴졌다.
“안 될까요?”
“뭐가?”
뭐라고 물었지? 전혀 못 들었다. 되묻자 아테올은 피식 웃더니 무릎에 얹은 손을 은근하게 움직였다. 이 음탕한 자식 야외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후드를 걷어보아도 될지 여쭈었습니다.”
“……후드?”
음탕한 건 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후드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치미는 민망함에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근데 후드는 걷어서 뭐 하게?’라는 물음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뻗어 후드를 걷는 손길에 지워졌다. 아테올의 손이 내 머리카락과 귀를 건드리며 후드 속으로 들어왔다. 머리를 덮고 있던 천이 걷히고 저물어가는 붉은 햇살이 눈에 정면으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뜨자, 아테올이 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호감도: 아테올]
90%
아테올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합니다.
뭐…… 뭐가 하고 싶은 거야, 이 자식. ■■라면 역시 그거 아니면 저거겠지. 야외에서 하긴 좀 곤란한 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아테올.”
“예.”
“두 번째…… 계속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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