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03. 사실은 무척 간단한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테올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내 무릎에 얹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위로 뻗은 것만으로 입술은 간단하게 닿았다. 두 번째이자 세 번째인 키스는 제법 부드러웠다. 입술도, 입술이 닿는 느낌도.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이 거센 파도에 휩쓸리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잔잔한 물결에 감싸이는 것 같았다. 온화하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아테올의 평온한 감정이 전해지는 듯한.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 속에서 아테올이 입술을 떼고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역광이 져서 어두운 벽돌색으로 보였다.
[호감도: 아테올]
91%
아테올은 ‘이게 도대체 뭐지.’라고 생각합니다.
……왜 60%대일 때랑 달라진 게 없어?! 사기 아냐? 방금 이 키스는 그럼 뭐였는데, 나도 알 정도로 말랑말랑한 키스였잖아!
아니면 그런 건가? 아테올이 사실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감정에 서툰 전형적 남자 주인공 캐릭터라서 뭔가 간지러운 호감이 생겨나면 낯설어하는 거? 설마. 아테올이 그렇게 바보는 아닐 것 같았다.
왜인지 기분이 상했다. 호감도가 91%이긴 한데, 아테올의 태도에 변화가 없으니 뭐가 뭔지 헷갈린다. 상태창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길이 없어서 직진만 하는 중인 상태에 가까우니 마음이 널을 뛰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아테올의 가슴을 탁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아테올의 옆으로 몸을 빼내 일어섰다.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눈부신 선홍색 빛이 얼굴로 쏟아졌다. 눈이 부셔서 일순 찡그린 후에야 내가 후드를 쓰고 있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석양은 여과 없이 그런 내게 비쳐들었다.
새빨간 태양, 맑은 진분홍색의 하늘, 아직 물들지 않은 회청색 동편, 연홍빛으로 물든 새털구름. 순간 발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잠깐 시선을 붙들린 사이 아테올이 일어났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제가 동행하는 게 싫으시다면 제 마차라도 타고 가시지요.”
“그럼 너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돌아온 마차를 타면 됩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아테올이 덧붙였다.
“여기서 당신이 마차를 불러 돌아가신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다. 누가 봐도 싸우고 돌아온 모양 아닌가.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다. 탑주와 4황자를 지켜보는 눈길은 무수히 많았다. 생각하니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는 것도 별론데.
잠시 망설인 끝에 결국 아테올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일까. 그냥, 아테올이 호감도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다.
‘허, 뭐라고?’
생각이 정리된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테올이 나한테 뭐라고 내가 기분이 상해? 그는 그냥 내 목숨을 구해줄 구명줄일 뿐이다.
헉, 맞아……. 목숨을 구해줄 구명줄인데 내가 좀, 너무 쌀쌀맞았나? 호감도 혹시 떨어지기도 하나? 떨어지면 어쩌지. 뒤늦은 후회가 들어 아테올을 보았다. 다행히 호감도는 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화가 난 건 아니야. 그냥…….”
“다음엔 제가 더 조심하겠습니다.”
“…….”
아테올은 웃을 뿐이었다. 내가 마차에 타도록 도운 뒤, 그는 멀어지는 마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창밖을 보지 않았다.
탑까지 나를 데려다준 후 아테올의 마부와 수행 기사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방향을 보니 아까 그곳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도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다녀오셨습니까, 탑주님.”
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로든은 혼자 돌아온 나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나를 모시며 내가 옷을 벗고, 씻고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을 뿐이다. 할 말이 있을 법도 한데 평소와 똑같은 태도였다. 그가 입을 연 건 내가 가벼운 간식을 먹고 난 후였다.
“탑주님, 다음 연회는 어떻게 할까요. 참석하시겠습니까?”
그가 말하려 한 순간 무슨 내용일까 긴장했으나 별것 아니었다. 어깨의 힘이 빠졌다.
“아, 연회.”
나는 연회나 무도회에 자주 참석하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도 클로든이 굳이 말한 걸 보면 크고 중요한 자리겠지. 어쩔까. 아니, 전생이었다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참석해야 하는 거겠거니 했겠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클로든은 ‘그럼…….’ 하며 운을 떼었다.
“4황자 전하와 동반 참석하시겠습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말을 해도 될지 안 될지 상태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차였다. 클로든이 먼저 말해 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연회에 같이 참석하자는 서신을 보내면 오늘 밖에서 있었던 일은 대충 벌충이 되겠지. 아테올 입장에서는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갑자기 밀치고 도망간 것 아닌가.
얼마 후 아테올이 서신을 받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대로 시간을 보내다 잠들었고, 썩 기분 좋지 않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아테올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아테올은 한 손에는 독약 병, 한 손에는 검을 든 채였다. 꿈은 내 시점이면서 지금의 기억도 고스란히 있는 상태였기에, 독약 병을 보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아테올이 가볍게, 사탕이라도 내밀 듯 독약을 내밀었다.
“마셔라. 가장 편한 방법이다. 잠들듯이 죽게 되지.”
“…….”
나는 그걸 순순히 받았다. 산 채로 목이 잘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목을 잘리는 편이 훨씬 낫다. 적어도 빨리 끝나잖아. 사람이 목이 잘려도 잠깐 의식이 있다고 하지만, 그거야 길어봤자 몇 초겠지.
독약을 마시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잠이 쏟아졌다. 아테올은 내가 죽는 걸 확인하려 하는지 내 앞에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쏟아졌다. 평소에 심하게 피곤했을 때처럼 몸이 지끈지끈하면서 눈이 감기는, 평범하고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면 편안한 잠이 아니라 죽음이 찾아온다. 죽는다, 모든 게 끝난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잠들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깨어나려 애썼으나 결국 눈은 감겼다.
거기서 깨어나자 익숙한 풍경이었다. 침침한 가로등, 차가 거의 지나가지 않는 넓은 도로, 신호등……. 지금과 달리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다. 하지만 취한 건 아니었다. 약간 알딸딸한 정도였고 그마저도 차가운 바람을 맞자 정신이 돌아왔다. 내일도 출근해야 했다. 대표 새끼는 출근하지 않는다. 개같은 놈을 저주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사거리 한쪽에서 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새벽의 질주를 하는군. 무심하게 생각하며 긴 횡단보도를 마저 건너고 있었더니 교차로에서 튀어나온 차가 갑자기 우회전했다. 음주 운전인지 졸음운전인지, 길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거리의 트럭은 엄청나게 빨랐다. 피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한 순간 이미 트럭은 내 몸을 들이받고 있었다.
온몸을 부수는 듯 끔찍했으나 운 좋게도 고통을 길게 느낄 틈 없이 즉사했다.
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절벽에 서 있었다. 뭐지? 이런 죽음은 겪은 적 없는데. 내 앞에 선 누군가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다. 말의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게 맞을까. 마치 메모장에서 변환이 잘못되어 깨져버린 텍스트를 소리로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내 거야.”
그 한마디가 유일하게 귀에 꽂혔다.
주춤 물러선 나는 그대로 뒤로 떨어졌다.
처음엔 나뭇가지에 걸리고 바위에 부딪히면서 요란하게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새카만 허공을 끝도 없이 낙하했다. 오히려 몸을 들이받힐 때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떨어지는 순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몸 전체를 가느다란 실로 꽁꽁 감싸서 그대로 조여대는 듯한 느낌.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다.
그대로 한없이 떨어지다가 번쩍 눈을 떴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불을 걷자 여름이라고 믿을 수 없는 한기가 밀려들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안정제를 찾았다. 몇 알 남지 않은 통을 보니 클로든과 에레토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안정제를 먹고 한참 웅크리고 있자 상태가 좀 나아졌다. 죽는 꿈을 연달아 꾼 걸 보니 어제 내가 생각보다 더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상태였던 모양이다.
호감도, 혹시 내가 떠난 다음에 깎인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90% 근처까지는 쑥쑥 오르다가 영 부진해서 걱정인데. 얼른 상태창을 확인하자 다행히 그대로였다.
게이지도 한 번 보았다. 아직 80% 정도였다.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일어나는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잘 관리해야지. 웅크리고 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꿈, 내 몸 상태, 연회, 그리고 주로 아테올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만졌다.
키스…. 처음은 아니다. 누구랑 했던 건지 기억도 안 나지만 분명 해봤다. 응? 근데 내가 무슨 시간이 나서 연애를 다 했었지? 나 진짜 그 흔한 SNS 할 시간도 없게 바빴는데. 뭐, 기억도 안 날 정도니까 가벼운 연애였겠지. 키스했던 기억만 난다니 좀 묘하긴 하지만, 넘기자.
아테올은 소설에서 어떤 역할이었을까.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완전히 엑스트라였는데, 내가 상당히 초반에 했으니 그 뒤에 부각되는 진짜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인공의 충성스러운 신하. 장르가 일반 판타지 소설이었으니까 연인으로 나오진 않았을 거다. 이곳이 그런 연애관을 가진 세계라는 것도 여기에 와서 알았으니까.
그래도 최소한 끈끈한 정을 가진 사이는 아니었을까? 흠, 그럼 아테올을 내가 차지하게 되면 나는 가짜의 역할을 빼앗아놓고 진짜의 사람까지 빼앗은 게 되는 거네. 복잡하군.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또 죽는 건 사양이야. 지긋지긋하다고.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거…….
아, 참. 내가 빼앗은 거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사람의 자기중심적 사고라는 게 참 무섭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고 머리맡에 두었던 책을 집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지만, 더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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