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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원수를 공략합니다-23화 (23/93)

23화

02. 실존하는 세계의 파편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었다. 음, 빙의 회귀물에 나올 법한 대사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잠시 끙끙거리다 눈만 간신히 떴다. 눈꺼풀을 풀로 붙여놓은 것처럼 뻣뻣해서 뜨느라 고생했다.

“으. 으…….”

“탑주님?”

간신히 뜬 눈에 어렴풋이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왜 내가 못 움직였는지 알았다. 아테올이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귀신보다 무섭다.

“손 좀 치워줘.”

말을 내뱉고 나서 나와 아테올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내 목소리가 엄청나게 갈라져 있었다. 아테올이 손을 치웠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기 어려웠다.

[체력 경고!]

체력이 3 남았습니다.

tip: 단것을 먹으면 체력이 회복됩니다.

음……. 그동안 단것을 자주 챙겨 먹어서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은 건가. 어쩐지 단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입에 짝짝 붙더라. 그냥 몸이 좋아하는 건가 보다 생각했더니 상태창이 다 뜻이 있어서 한 일이구나. 근데 왜 클로든이 아니라 아테올이 여기 있지? 클로든이 있어야 먹을 걸 가져다 달라고 할 텐데. 절로 눈길이 떨떠름해져서 쳐다보자 아테올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겠냐. 자다 깼더니 침대에 네가 있는데 당연히 어색하지. 게다가 클로든은 어딜 간 거냐고.

“시종장이라면 탑주님께서 깨어나실 때가 되었다고 먹을 걸 가지러 갔습니다.”

“……아.”

역시 클로든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테올을 쳐다보았다. 왜 클로든이 아니고 아테올이 있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아테올이 왜 여기에 있는지부터가 문제였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긴 아니구나.

“네가 왜 여기 있어?”

“기억이 안 나십니까?”

“전혀……?”

아테올이 심각한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탑 입구에서 제 품으로 쓰러지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신지 여쭸더니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와’라고 하셨고요.”

“내가……?”

“네. 증인이 세 명이나 있습니다.”

“누군데?”

“시종장, 기사단장, 제 수행 기사까지요.”

“…….”

“제 수행 기사를 포함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증인을 두 명으로 해도 괜찮습니다.”

그게 뭐야. 아무튼 전혀 기억이 안 났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서……, 아니, 황궁에서부터 몸이 안 좋아서 해롱해롱하고 있었지. 이유는, 헉. 맞다. 내 게이지! 깜짝 놀라서 상태창을 확인하자 게이지는 아주 조금 차올랐을 뿐 여전히 절반 밑에서 간당간당했다. 안 돼, 이거 다 떨어지면 나 죽는단 말이야.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방법을 생각했다. 전생이랑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이 상황 자체가 전생에 없었던지라 똑같고 자시고 할 게 없다. 그나마 아테올이 옆에 있으니까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는 게 다행인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 클로든이 들어왔다. 손에 든 쟁반엔 이것저것 달달하고 소화가 잘 되는 먹을거리들이 놓여 있었다.

“황궁에서도 아무것도 안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에레토의 말이, 식사를 잘 하시는 게 중요하다고 하여…….”

“……고마워, 클로든.”

웃으며 말하자 클로든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마주 웃었다.

“아닙니다.”

이때의 나는 이렇게 웃기도 하고 고맙다는 말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런 기억이 없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런 행동마저 귀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게이지가 꽤 차올랐다. 도대체 기준을 모르겠다니까.

거기에 클로든이 가지고 온 음식과 차까지 먹고 나자 체력이 회복되었다. 12까지. 체력……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일까? 다른 사람의 상태창은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차려진 음식을 거의 다 먹자 클로든은 무척 만족한 얼굴로 약을 가지고 오겠다며 다시 나갔다. 입가에 묻은 건 없는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제법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테올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빤히’ 정도도 아니고 아주 뚫어지게 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그렇게 쳐다봤으면서 뭐가 아니야.”

“아닙니다. 그저……, 생각보다 쉽게 웃어주시는구나 싶어서요.”

“…….”

뭔 소리야. 네가 생각해도 어감 좀 이상하지 않냐. 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자신은 맞는 말을 했다는 듯 당당한 태도다.

“왜? 너한테도 웃어줄 수 있어.”

말하고 입꼬리 양쪽을 올려 웃어주자 아테올의 표정은 더 상했다.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 웃어주면 됐지 마음까지 담아야 해?”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시죠. ……입맞춤까지 한 사이 아닙니까?”

“키, 키스 한 번 한 것 가지고 왜 갑자기 뭐라도 된 것처럼 굴어!”

[호감도: 아테올]

83%

미친, 여기서 호감도가 왜 올라?!

아테올은 당신을 ‘왜 이렇게 ■■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따위로 알려줄 거면 그냥 알려주지 마라. 상태창에 대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떠밀려 쓰러졌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드러누운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럼, 두 번 키스한 사이는 어떠십니까?”

“…….”

“아니면…… 그보다 더한 걸 한 사이는?”

“지금 네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지?”

내 말에 아테올이 심히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침실에 초대받은 남자로서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도 누군가의 침실에 가게 된다면 저처럼 굴게 되실 텐데요.”

“난 수동적인 편이라.”

이번엔 한쪽 눈썹을 쓱 치켜올린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빤히 쳐다보자 아테올은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그 말 생각보다 꽤 야하네요.”

“미친…….”

앗,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아테올은 폭소하고 있으니 뭐 됐나. 미쳤다는 말이 좋은 모양이다. 진짜로 미친놈이라서 그런가. 나는 아테올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비켜, 클로든이 곧 들어올 거야.”

“그는 주인의 방문을 함부로 열더군요.”

“내 측근들이 하는 일에 말 얹지 마. 내가 이미 허락한 일이야.”

“측근과 정말 가까이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측근의 뜻이 뭔데?”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 아닌가. 내 주먹질에 순순히 밀려난 아테올은 또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측근은 몇 있지만, 이런 사이는 아니라서요.”

“질투라도 해?”

그건 아니지. 그 때 또 호감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호감도: 아테올]

85%

아테올은 ‘내가 지금 ■■하는 건가?’ 라고 생각합니다.

옳거니. 이번엔 가려져 있어도 뭔지 알겠다. ‘질투’다. 대체 왜 이 타이밍에 호감도가 오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상승세가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100%까지 얼마 안 남은 거 아닐까. 물론 모든 경험치 종류는 위로 올라갈수록 오르는 비율이 낮아지는 건 알고 있으니, 앞으로가 좀 험난하겠지만 일단 신체 접촉이라는 치트 키가 있으니까.

나는 슬그머니 아테올의 손목을 잡았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오르는군.

“할까?”

“무엇을요?”

“두 번째.”

“흠. 그 이상은?”

“……그건 차차.”

아직 거기까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테올이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비교적 여유로웠다. 나 말고 아테올이. 질척질척하게 입술을 빨아대던 그가 문득 떨어지더니 속삭였다.

“입 안이 달아요.”

“…….”

단것을 먹었으니까. 한참 키스하고 있는데 똑똑, 밖에서 클로든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아테올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날 꽉 잡은 채로 말했다.

“거기서 잠시 기다려라.”

“미쳤……, 비켜!”

“아직 안 끝났습니다.”

“비키라고!”

속닥거리며 소리치자 아테올은 몹시 아쉽다는 얼굴로 몸을 뗐다. 나는 손등과 소매로 입술을 마구 문지른 뒤에 클로든에게 들어오라고 외쳤다. 클로든이 약을 들고 동요 없는 얼굴로 다가왔다.

아테올의 시선을 무시하며 약을 먹고 나자 클로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쟁반 위를 정리하고는 이만 나가보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엄청나게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안 나가도 괜찮아! 아테올, 오늘은 이만 물러가.”

“……두 번째는 무효인 겁니다.”

그게 중요하냐!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떨떠름한 얼굴을 아테올에게 보였다. 그는 손으로 슥 입을 가렸다. 손안에서 웃는 게 다 티가 났다. 아테올이 돌아간 뒤, 기운이 빠져서 털썩 드러누웠다. 클로든도 쉬시라며 자리를 비웠다.

게이지를 확인하니 절반 정도를 맴돌고 있다. 하, 이게 그만큼 떨어지면 위험하구나. 새삼 게이지가 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체감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정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구나. 누운 채 심기 불편 정점인 상태로 뒤척대다가 잠이 오는 걸 느꼈다.

“…….”

서랍으로 손을 뻗어 약을 꺼내고, 안정제와 수면제를 한 알씩 꺼내서 물과 함께 삼켰다. 그대로 일어나 잠시 창밖을 보고 있다 보니 기절할 것 같은 수마가 닥쳐들어 침대로 뛰어들었다. 죽음의 공포는 다행히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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