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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94)화 (94/102)
  • #094

    “그럼 한 달 수업료는 결제하셨고, 아…! 혹시 운동복도 대여하시겠어요?”

    “운동복이요?”

    “네, 글러브까지 대여해 드리거든요. 아니면 개인 물품을 가져오셔도 됩니다.”

    “그건 따로 살게요.”

    현재 이겸은 체육관에 와 있다. 앞으로도 혹시나 있을 전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훈련이 된 편이 좋기 때문이다.

    헌터가 되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해도 그건 상대 블러드 헌터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들은 크리처화도 가능하고, 피를 내어 환각 공격도 할 수 있는데 그들에 비해 일반 헌터들은 이점이 별로 없었다.

    이거라도 배워야 뭐라도 해 보지. 언제까지 서도현의 능력 뒤에 숨어 있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찾아온 복싱 체육관이었다. 만사 귀찮아하던 이겸이 큰마음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크리처 사냥으로 벌어들인 돈이고, 미래를 계획하는 올바른 투자이긴 하지만 카드를 건넬 때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헌터 세계에 발을 들인지 1년도 안 된 탓에 큰 금액을 턱턱 결제하려니많이 어색했다.

    “네. 오늘은 글러브가 없긴 하지만 가벼운 운동 정도는 가능해요. 시간 괜찮으세요? 꼭 운동이 아니라 구경도 좋아요~. 저희 체육관 소개시켜 드릴게요.”

    결제 전에 사전 설명은 들었으니까 굳이 구경은 안 해도 상관없지 않나?

    이겸은 오늘은 일이 있다며 직원의 권유를 거절했다. 다음 주에 배우러 오겠다고 말하고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체육관을 나섰다.

    운동은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 이후로는 처음 해 보는 거라 떨리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위치가 래터 사무실과 가깝기도 하고, 땀을 뺀 후 바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간이 샤워장도 있었다. 시설 역시 합격이다.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뭐냐.”

    “어때요? 잘 어울려요?”

    사무실 문을 여니 다들 어디로 갔는지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린 도아 혼자서 이겸을 맞이했다.

    “잘 어울리고 말고가 아니라….”

    밤마다 울다 잠드는 건지 얼굴은 평소보다 부어 있었고, 턱선까지 똑 자른 단발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왜?”

    “싸울 때 찰랑거리는 게 방해되더라고요. 위급 상황에 여유롭게 묶어 올릴 시간도 없고 그냥 거추장스러워서 잘랐어요.”

    도아는 호쾌하게 말했지만, 지난날 자신의 잘못들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재빨리 판단하지 못해 서도현을 다치게 하고, 이겸이 배상우의 손목을 찌르게 만들었다. 이겸의 앞으로 날아오던 총알을 배상우가 대신 맞아 준 것도 알고 있다.

    적어도 소장실에서 환각에 취한 배상우를 제압하는 건 자신이 했어야 했는데.

    배상우의 죽음으로 이겸이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에 허덕인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거기에 손목을 찔렀다는 짐을 추가로 준 게 자신이었으니까.

    “저 앞으로 운동도 다니려고요. 요 근처로 알아보는 중이에요.”

    아, 나돈데. 이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뭔가 다음 주부터 복싱을 다니기로 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운동은 집 근처가 좋지 않을까.”

    사무실 쪽은 내가 다니고 있으니까 혹시나 오가며 마주치지 않게 넌 너희 집 근처에서 다녀라, 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무실도 집만큼 자주 들락거리는데요. 여기도 제2의 집이죠, 뭐. 운동 끝내고 출근하고. 근처 시설 좋은 곳 어디 없나? 추천해 줄 만한 곳 없어요?”

    “…글쎄.”

    자신이 한 생각과 소름 끼치도록 같아 슬그머니 답변을 피했다.

    이겸은 소파에 앉아 단발이 된 도아를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아깝진 않고?”

    “뭐가요?”

    “머리.”

    “애초에 미용실 가기도 귀찮아 기른 거였어요. 짧으니까 머리 감을 때 편하고 더 좋은데요? 전혀 안 아깝죠.”

    “그럼 다행이고.”

    이번엔 도아가 물었다.

    “오빠는 아저씨가 준 핀 잘 가지고 있어요?”

    “응.”

    이겸은 안쪽 주머니에서 은색 핀을 꺼냈다. 본래는 물이나 음료에 넣어 크리처 독을 판별하는 용도로 쓰이지만 만약 그랬다간 설거지도 해야 해서 닳아 버릴 텐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배상우가 제게 준 소중한 부적이었다.

    잠시 도아에게 보여 주고 다시금 안쪽 주머니에 넣을 무렵, 도현과 재우가 들어섰다.

    “엇, 겸이 형 오셨네요?”

    “응.”

    재우는 이겸의 옆으로 다가가 재잘재잘 방금 있었던 일을 자랑했다.

    “저 방금 크리처 사냥하고 왔는데 그때 제가….”

    그러고 보면 재우는 꼭 서도현과 CA 지역에 나가지 다른 이들과 나간 적은 없었다. 싸우던 도중 크리처가 유독 재우에게는 적의를 품고 있지 않은 걸 들킨다면 곤란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맨 처음 래터에 들어왔을 때 재우가 자신과 같이 크리처 잡으러 가자고 권유했으나 이겸이 거절해 불발된 적이 있다.

    그때 긍정했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지. 뒤늦게 내빼기라도 하려 그랬나.

    “이거 보여요!?”

    “응. …응!?”

    한가롭게 예전엔 그랬었지, 라며 옛 기억을 회상하던 이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 눈앞에 크리처의 거죽처럼 단단하고 검은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재우의 크리처화였다.

    “이거요, 이거! 저 이제 숨길 생각 없으니까 보여 드리는 거예요.”

    “아니…. 숨겨도 괜찮은데. 그러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상관없어요. 들켜도 지들이 뭘 어쩔 건데요? 전 이제 크리처 피도 완전 끊었고 일반인으로 생활하고 있는데요? 찔릴 것도 없죠! 전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이걸로 싸울 거예요. 방금도 도현이 형이랑 이 상태로 크리처 잡고 왔어요! 어때요?”

    이겸은 복싱을 끊었고, 도아는 머리를 싹둑 자르며 이 근처 체육관을 알아보겠다 하고, 재우는 앞으로 크리처화를 숨기지 않겠다 선포했다.

    래터에 한 단계 변화가 찾아올 예감이 들었다.

    “하지 말지.”

    “…….”

    그러다 서도아의 차가운 말에 활기차게 떠들던 재우의 말이 뚝 끊겼다. 이겸이 되레 재우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재우가 얼른 크리처화를 거두며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렸다.

    “아, 미안. 역시 좀 혐오스럽나? 앞으론 자제할게. 겸이 형도 무턱대고 보여 줘서 죄송해요. 싫으셨을 텐데.”

    “아니, 난 그런 생각 안 했는데.”

    “네, 감사합니다.”

    이겸이 급하게 말했지만 울상이 된 재우의 표정은 돌아오질 않았다. 그때 도아가 버럭 소리쳤다.

    “아니! 뭐가 징그러! 하나도 안 징그럽거든? 왜 멋대로 판단하는 건데!?”

    “미… 미안?”

    분노를 토해 내듯 말하는 서도아에 재우가 화들짝 놀라 사과했다.

    “네가 왜 사과해! 나는 그냥… 그거 계속하면 참기 힘들 테니까….”

    “힘들어? 뭐가?”

    도아가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며 웅얼거리자 이겸이 되물었다.

    “크리처화 계속 하면 중독 증상 더 심해지잖아! 가뜩이나 넌 피도 안 마시는데 뭐가 좋다고 그걸 계속 해 대!”

    뭐? 진짜? 이겸은 처음 듣는 지식이었다. 재우를 쳐다보자 그는 입술을 비죽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차재우. 너 그거 금지야.”

    “그래도 전….”

    “부사장 명령.”

    “오랜만에 들어 보네, 그 말.”

    재우는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며 소파 옆으로 상체를 뉘었다.

    그 모습을 본 서도현이 나지막이 일렀다.

    “거 봐. 안 될 거라 했지.”

    “그래도 거의 허락할 뻔했는데에-.”

    “겸이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잖아. 그렇지?”

    서도현이 이겸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이겸이 의문 섞인 표정으로 그와 재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둘이 짰냐?”

    “그게에….”

    결국 머뭇거리던 재우가 순순히 자백했다.

    크리처화 사용을 래터 전원이 동의하면 마음껏 써도 된다고 사무실로 오는 길에 서도현과 합의를 봤단다.

    “안 돼! 난 동의 안 해. 정 네가 위험하다 싶으면 그땐 어쩔 수 없지만. 난 무조건 반대.”

    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당연히 반대지. 그런 부작용이 있을 줄이야.”

    뒤이어 이겸의 불찬성에 재우는 아쉬운 눈빛을 하면서도 내심 기뻐 보였다. 그들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좋은 듯싶었다.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붙잡고 소파에 얼굴을 파묻었다.

    “얘들아!!!”

    그때 사무실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문이 부서지기라도 할 기세로 세차게 흔들렸다. 재우도 소파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방문객을 확인했다.

    “…산하 오빠?”

    그리고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남궁산하였다. 군대에서 더 근육을 키웠는지 이전보다 더 몸집이 거대해져 왔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서도현도 그의 등장이 의외라며 물었다.

    “형 군대는?”

    “군대는 무슨! 도현이 너야말로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겸이는! 재우는! 도아는!”

    그는 군대에서 짐을 싸 집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온 건지 산만 한 짐을 등에 지고 모두를 꼼꼼히 살폈다.

    “아! 다쳤다 해도 이미 다 나았겠구나.”

    그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해. 너흰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군대에나 있고….”

    남궁산하에게 그래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은 해 줘야 할 것 같아 재우가 회개한 블러드 헌터였고, 이련에서 있었던 일, 배상우의 죽음 등 큼지막한 사건들만 정리해 얘기해 줬다.

    “힘든 시기에 옆에 있어 줘야 했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남궁산하가 왜 여기에?

    이겸은 떨떠름히 물었다.

    “형, 와 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군대는….”

    “아, 군대?”

    남궁산하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나 탈영했어!!”

    …네? 뭐라고요? 일제히 눈을 깜빡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군대가 무슨 소용이야! 너희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줘야지! 휴가 신청 처리가 너무 늦어서 그냥 탈영했어!”

    남궁산하가 딱 그 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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