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불러도 되는 거였냐니. 당연한 거 아닌가? 그걸 이제까지 신경 쓰고 있었나? 이겸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어, 응! 그럴게!”
산하가 밝게 웃었다.
재우가 회식 먹으러 출발하기 전에 케이크를 한 움큼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냥 막 불러도 된다니까요.”
“응. 그래도 확실히 하고 가는 게 좋잖아.”
“형님이 그렇다면야.”
도아가 휴지를 뽑아 재우의 얼굴에 찰싹 던졌다.
“애도 아니고 좀 닦고 먹어.”
“다 먹고 한꺼번에 닦으면 되잖아.”
“그만 먹으라는 뜻이잖아. 언제까지 먹고 있을 거야. 회식 안 갈 거야?”
“가! 지금 갈게!”
재우는 서둘러 상자에 케이크를 집어넣고 옷을 챙겨 입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도현이 이겸을 불렀다.
“애들이 많이 먹으면 어쩌려고.”
“그럼 많이 내야겠지.”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지.”
이겸의 주머니에 도현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손 안쪽에서 카드의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말똥히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감당 안 되면 이걸로 결제해.”
이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준 카드를 쓸 일은 없겠지만 허락도 맡은 데다가, 갖고 있는다고 나쁠 것도 없었다.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법이니까.
“겸이 오빠, 이것도 먹어 봐요. 오늘은 오빠의 날이니까 맛있는 거 먹어야죠!”
“왜 내 날이야? 산하 형 복귀 파티잖아.”
“산하 오빠는 단순 축하 파티 주인공! 실세는 오빠죠. 무려 돈을 지불하는걸요!”
‘벌써부터 돈맛을 알아 버렸구만.’
야금야금 음식을 씹으며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를 경청했다. 함께 있으면 별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함을 느꼈다.
모두 한 성깔 하는 성격에 막무가내인 기질을 기본 탑재하고 있었다. 물론 남궁산하는 제외하고.
그리고 이겸은 이런 기질들과 잘 맞았다. 모두가 막무가내라면 나 하나쯤 추가한다고 티가 나지도 않고, 평소보다 행동을 더 편히 할 수 있었다.
“형님, 군대 가서도 저희 잊으면 안 돼요!”
“당연하지! 매일 밤 연락할게!”
“우어어어어, 건강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눈물겨운 이별을 마쳤다.
다음 날, 복귀했다는 산하의 연락을 받았다.
한 사람이 떠나서 그런가, 어쩐지 채팅방이 조용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이겸은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좋은 오후.”
“왜 왔어?”
“놀러 왔지.”
도현은 습관처럼 현관문 틈 사이로 구두를 구겨 넣었다.
“…뭐 해?”
이겸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냥. 안 닫네?”
“닫아 줘?”
“그럼 슬플 것 같아.”
“들어오든가.”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안으로 들어왔다.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같이 먹자.”
“방금 밥 얹었어. 좀 기다려.”
침대에 다시 누워 휴대폰을 만지는 이겸을 콕 찔렀다.
“왜?”
“심심해. 놀러 왔는데 손님 놔두고 휴대폰만 만지고 있을 거야?”
“혼자 놀아. 그리고 네가 손님이야? 불청객이지.”
이겸은 무던히 말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제 겉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
어제 서도현이 몰래 주머니 속에 넣어 줬던 카드였다.
“왜 안 썼어?”
“쓸 상황이 안 와서.”
도현은 카드를 건네받아 대충 아무 곳에 놓아두며 질문했다.
“저번에 너희 집 왔었을 때 처음 본 놈 있던데, 누구야?”
“아, 강태하? 내 친구.”
눈꼬리가 미세하지만 잘게 떨려 왔다.
“자주 와?”
“그렇지. 왜, 질투해?”
이겸이 장난삼아 물었다. 홀로 특별 대우라 운운하며 대판 싸웠던 적이 생각나 복수라도 하는 셈 놀린 거였다.
얘라면 자존심 상해 하려나?
도현의 반응을 확인했다. 역시 내키지 않아 보였다. 장난은 이쯤하고….
“질투한다고 하면.”
“뭐?”
“질투한다고 하면 여기 못 오게 할 거야?”
멍하니 눈을 깜빡인 이겸이 대답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질투 안 해.”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현에게 이겸은 어째 자신이 놀림받은 기분이었다.
“겸아,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블러드 헌터와 싸운 날 어떻게 싸웠어?”
“어떻게 싸우긴, 열심히 싸웠지.”
죽을 둥 살 둥 열심히 굴러 가며 이겼다.
“좀 더 자세히.”
“자세히? 너도 참고인 조사 뭐 그런 거 하냐?”
“일단 말해 봐.”
이겸은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지 어림짐작하면서도 낱낱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고했다.
“그래서 여러 번 실험을 통해 남자의 공간? 뭐 그런 능력을 나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굳이?”
서도현이 입매를 늘어트렸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그냥 팔 집어넣어 보고 절단 안 되면 확인 끝난 거잖아. 고작 그런 놈 상대로 다섯 번이나 소비했어? 되도 않는 실험 하며?”
“…절단 안 되면 확인이 끝난다고? 그래도 아프잖아.”
일반 사람의 상식이 아니었다. 누가 제 팔이 절단되는 걸 대가로 실험을 끝내겠는가. 물론 서도현의 능력으로 원래대로 돌아온다지만 그럴 만한 담력이 없었다.
“그렇게 아프다, 아프다 칭얼거리다가 나중에 죽고 나서 후회할래?”
열 번밖에 못 쓰는 소중한 기회를 아프단 핑계로 막 사용했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없으면? 그땐 진짜 죽는 거야.
“나도 알아.”
이겸이 꿍얼거렸다.
사실 자신도 열 번이란 기회를 최대한 아껴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리 간단히 정해지는가.
전투를 거치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신경 쓸 게 많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 아껴 쓴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뒷전이 되고 말았다.
도현은 그런 이겸을 한 문장으로 평가했다.
“그러니까, 자상, 관통에는 어느 정도 겪어서 익숙한데 절단상은 낯설다 이 말이지?”
“…뭔 말이 그렇게 돼. 자상, 관통도 포함이거든.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냐?”
“…….”
서도현에게서 돌아오는 답변이 없었다. 뭉근히 불안감이 차올랐다.
“무슨 생각 해?”
“그냥. 윤이겸이 어떻게 해야 여러 고통들에 익숙해질까 하는 고민.”
이겸은 솜털이 바짝 섰다. 이러다 얘 날 잡고 피 보자 하는 거 아니야?
“소름 끼치게 무슨 그딴 고민을 해.”
기겁하며 서둘러 대화 주제를 변경했다.
“밥이나 먹자.”
도현이 수저를 들며 물었다.
“친구에 대해선 계속 알아보는 중?”
“그냥저냥.”
그날 이후 이겸은 블러드 헌터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 이곳저곳 정보를 캐고 다녔다. 그래 봤자 인맥이랄 것도 없어 도아와 재우에게 지난날의 언급을 은근히 피하며 물어보거나, 또는 남궁산하에게 묻는 게 전부였다. 의외로 재우는 블러드 헌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만나고 싶진 않아?”
“누굴?”
“주승태.”
도현이 여상히 물어 왔다. 수저를 든 이겸의 손이 멈칫했다.
“만날 수 있어?”
“지금 수감되어 있을걸.”
“…면회 갈 수 있나?”
“갈 수 있으면 가려고? 또 어떤 쓴소리를 듣게.”
이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강태하의 답변이 떠올랐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만나 보면 정말 실감이 날까 무서워 겁이 났지만 혼자 지레짐작하는 것보단 직접 대면해서 그의 진의를 듣고 싶었다. 사정을 듣고 싶었다.
뭐가 됐든 좋았다.
‘이, 이겸아. …쿨럭! 도망, 도망쳐.’
아직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보다 행동들을 믿고 싶었다.
“그래도 갈 수 있으면 만나서 대화해 보고 싶어.”
“블러드 헌터는 면회 금지야.”
“…아쉽네.”
도현은 눈에 미련이 가득한 이겸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상우 아저씨한테 부탁했어.”
“부탁?”
“잠깐이라도 괜찮으면 만나게 해 주겠대.”
“뭐?”
이겸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어제 협회 가서 그분 만나야 한다더니 그날 나눈 대화가 이거였어?
“만나고 싶으면 내일 보러 가자. 태워 줄게.”
“…….”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잠깐, 응? 지금 뭐라고?”
“머리가 나빠서 이해가 잘 안 돼?”
“아니. 아니야. 어, 응. 보러 갈래. 가고 싶어.”
이겸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 서도현이 날 생각해서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너 누구야? 서도현 맞아?”
도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3시까지 준비하고 나와.”
***
이겸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며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일단 만난다 하긴 했는데,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긴장돼?”
“조금.”
“죽는 것도 아닌데 뭘 긴장해.”
도현이 팔을 뻗어 이겸의 귀를 지압하듯 눌러 줬다. 그의 손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거랑 비슷하게 긴장돼.”
“그래? 그럼 한 번 죽고 갈래?”
“돌았냐?”
오늘 저녁 뭐 먹을까? 라는 일상적인 어조로 가볍게 물어 오는 그에 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농담이야.”
도현이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도 할 게 있지. 입술을 비죽이며 목도리 속에 폭 파묻었다.
끼익-.
“딱 10분입니다.”
철문이 열리며 주승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왔어.”
그가 삐뚜름히 물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