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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58)화 (58/102)
  • #058

    오늘, 이겸은 오랜만에 협회에 방문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강의가 끝나고 저를 태우러 온 서도현의 차를 얻어 타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그가 잠시 차를 협회로 돌린 탓이다.

    지난번 만났던 배상우 아저씨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 해서 이겸은 협회 안의 사내 시설 카페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들려오는 인사에 고개를 들자 테스트 때 잠깐 마주쳤던 노정규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네. 분명 예호의….”

    예호의 예비 신입이었다. 지금은 예호에 가입해 활동 중이려나.

    “오! 기억하시네. 저는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요?”

    이겸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금 나 기억력 안 좋다고 무시하는 건가?

    “아뇨, 아뇨. 저를 기억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해서요.”

    “그럴 것까지 있나요.”

    “왜요, 이겸 씨 완전 유명 인사잖아요.”

    처음에는 돈으로 한 트럭을 준다 해도 들어가지 않을 래터에 들어간 신입으로 알음알음 소문이 났었고, 후에는 협회 습격 사건 때 고작 막 테스트를 마친 주제에 뮤턴트 크리처를 해치우는 데 큰 공을 기여했다.

    그 이후에는 예호의 2팀 상대로 대련해 승리를 거머쥐고, 심지어 최근에는 블러드 헌터와 싸워 이겼다는 말까지 들려오며 협회가 한바탕 떠들썩했다.

    “전적이 화려하신데 어떻게 소문이 안 나겠어요.”

    “…그런 것도 소문이 나요?”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요. 비밀 같은 거 없어요.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인데.”

    웃으며 친절히 알려 주던 노정규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또 제가 너무 아는 척했나요?”

    “네?”

    “이겸 씨가 이렇게 대단한 분인 줄 알았으면 테스트 때 헛소리 안 했을 텐데. 괜히 제가 오지랖 피우며 잘난 척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이겸 씨 소문 들려올 때마다 그 일 생각나서 부끄러웠어요. 흑역사 뭐 그런 거?”

    “아닙니다. 테스트 때 조언은 저도 도움 됐고요.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이겸의 앞자리에 착석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 잠시 합석해도 되죠?”

    ‘이미 앉았으면서.’

    “네. 이미 앉아 계시네요.”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이 바닥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며.

    노정규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연락하고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따지고 보면 저희 동기인데, 테스트 동기.”

    “그렇네요.”

    이겸은 순순히 번호를 입력했다.

    “아, 맞다. 이겸 씨 그 소문 들었어요?”

    “노정규 씨 소문 되게 좋아하시네요.”

    “헛, 제 이름도 기억해 주시고 있었군요.”

    “…네.”

    노정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겸만 들으라는 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린 뒤 조용히 속삭였다.

    “예호 선배에게 들은 얘기인데….”

    “네.”

    “협회 습격 사건이 있고 나서 협회에서도 유야무야 넘어갔잖아요.”

    “그렇긴 했죠.”

    협회의 대처가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사건에 대한 조사도 올바르게 하지 않고 부서진 건물을 수리하는 걸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때 혈액 보관실에 누가 침입했었대요.”

    “…거길 왜?”

    일반 헌터들은 달마다 한 번씩 협회나 길드에서 혈액 검사를 실시한다. 혹시나 모를 블러드 헌터 검거를 위해서였다.

    “그동안 기록해 놓은 데이터베이스도 다 삭제했다더라고요.”

    “삭제요?”

    “네. 협회에서 지금 적극적으로 혈액 검사 유도하는 이유도 다시 자료 수집하려고 그런 거래요.”

    “…근데 그게 비밀이에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전 헌터들의 피를 다시 검사해 보는 게 낫지 않나? 그걸 왜 비밀로 하지?

    “모두가 알면서 쉬쉬하는 거죠. 조용히 해결하려고. 우리 사이에 블러드 헌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 봐요.”

    최근 들어 블러드 헌터에 관한 주제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이겸은 그럴 때마다 자꾸 한 인물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칠 지경이다.

    ‘주승태.’

    걔는 헌터 등록도 안 하고 블러드 헌터가 된 건가? 어떻게?

    이겸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들이 가득 찰 무렵, 노정규가 스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게 저일지도 모르죠.”

    “…….”

    장난삼아 으스스하게 내뱉었는데 이겸의 반응이 좋지 않자 밝게 웃으며 외쳤다.

    “이겸 씨일지도 모르고요!”

    “아, 네.”

    그때 서도현이 다가왔다.

    “윤이겸.”

    “어. 대화 끝났어?”

    “응. 앞엔 누구?”

    “노정규 씨. 나랑 같이 테스트 본 동기분.”

    도현은 오도카니 노정규를 훑었다.

    “안녕하세요! 예호의 노정규라고 합니다.”

    “아아, 예호.”

    “네! 이겸 씨와 잠시 수다 좀 떨었어요. 급한 일이시면 제가 자리 비켜 드릴게요.”

    도현이 입매를 늘어트렸다.

    “꼭 겸이랑 선약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하시네.”

    “야, 그냥 가자.”

    “왜 그렇잖아. 너 원래 나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내가 오니까 인심 쓴다면서 자리 비켜 준다는 꼴이.”

    이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꼭 예호만 보면 시비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날게요. 이겸 씨, 나중에 연락해요.”

    노정규는 황급히 떠나며 이겸에게 폭탄을 던지고 갔다.

    “연락? 너 쟤랑 번호도 주고받았어?”

    “뭘 그렇게까지 따지고 있어.”

    이겸은 볼일 다 봤으면 얼른 가자며 도현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예호와는 친하게 지내지 마.”

    “다른 길드는 괜찮고?”

    “괜찮을 것 같아? 다 미심쩍은 놈들뿐이야. 분명 블러드 헌터랑 내통하는 애들도 있을걸?”

    네네. 그러시겠죠.

    ***

    “남궁산하의!!”

    “부대 복귀를!”

    “진심으로.”

    “…….”

    말이 끊기자 재우가 도현을 재촉했다.

    “뭐 해요, 도현이 형. 형 차례잖아요. 축하합니다!”

    “아, 내 차례야? 축하합니다.”

    이윽고 산하의 얼굴 앞에 케이크가 들이밀어지고 후우 촛불을 껐다.

    이겸은 폭죽을 터트리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부대 복귀 하는데 축하까지 해? 위로는 못 할망정.

    서도현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니 뒤로하고, 도아와 재우는 분명 군대는 자신과 먼 얘기라며 해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헌터가 되면 굳이 군대를 안 가도 된다 하니 나도 면제긴 한가.

    “고마워! 정말 고마워, 얘들아! 남은 4개월 동안 열심히 복무하고 올게!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언제나 건강하고!”

    “형님! 군 생활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을게요!”

    “그래, 재우야. 너도 학교생활 열심히 해야 해! 도아 너도!”

    “겸이 오빠도 대학생인데 수업 열심히 들으라고 한마디 해 주세요.”

    도아가 산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이겸을 가리켰다.

    “어… 이겸이는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쳇.”

    ‘왜 아쉬워하는 건데.’

    이겸은 혀를 차는 도아를 어이없는 시선을 바라봤다. 이후 산하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형, 군 생활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휴가차 나온 건데 쉬지도 못하신 것 같네요. 오늘이라도 댁에 일찍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너희 보는 게 쉬는 거지. 난 복귀하기 몇 분 전이라도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있어!”

    “그래도 그때는 가족과 보내는 건 어때요. 여기 선물이요.”

    이겸은 여상히 덤덤하게 답하며 어제 강태하와 백화점에 갔을 때 구매한 선물을 건네주었다.

    “헉, 선물까진 안 바랐는데! 고마워!”

    “형님, 저희도 선물 준비했어요. 여기 제 거요.”

    “여기요. 이건 제 거. 이건 우리 오빠가 주는 거. 참고로 두 개 다 제가 고르고 오빠는 값만 지불했어요.”

    산하는 한 아름 선물을 건네받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마워 얘들아. 돈 내는 게 얼마나 씀씀이가 커야 할 수 있는 일인데! 도현이도 고마워! 이겸이도, 재우도, 도아도 모두 정말 고마워!”

    ‘고마워’를 어찌나 자주 말하는지 아마 평생 접할 그 소리의 절반을 남궁산하에게서 들은 기분이다.

    “선물은 집에 가서 꼭 풀어 볼게. 모두 잘 쓸게.”

    “네? 받은 사람 반응까지 봐야 선물 준 기분이 나죠! 얼른 풀어 봐요!”

    “앗, 그… 그런가? 그럼 지금 열어 볼까?”

    재우의 재촉에 산하가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상관없는 눈치여서 슬며시 포장지를 열었다.

    이것저것 알차고 값진 선물들이었다.

    군대에 반입이 불가능한.

    “내가! 내가 제대해서 꼭 알차게 쓸게! 다들 너무 고마워!”

    선물에 대한 기쁨 때문인지, 내일이면 복귀한다는 슬픔 때문인지 산하의 눈에 방울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아와 재우가 들뜬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제 선물 교환식도 끝났는데.”

    “파티해요! 파티! 케이크도 먹고 과자 파티도 해요!”

    ‘파티 되게 좋아하네.’

    심지어 학생 아니랄까 봐 사소한 과자 파티로도 잔뜩 신이 났다. 이겸이 그들을 불렀다.

    “과자 파티 말고, 회식 가자.”

    “…회식이요?”

    재우가 눈알을 댕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회식도 좋지! 선물도 받았으니 회식비는 내가 낼게!”

    “아니에요, 형.”

    이겸이 지갑을 꺼냈다. 예호와 대련하고 나서 회식을 갔다 자신과 서도현이 대판 싸운 탓에 분위기가 죽창 난 일을 회상했다.

    “제가 살게요. 지난번 분위기도 망쳐서 다들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오마카세 그거 말이야?”

    “네.”

    재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겸이 형. 그때 제가 마스터, 겸이 형, 제 거까지 해서 삼 인분 다 먹어서 오히려 좋았어요.”

    …네가 다 먹었냐. 산하 형이랑 도아 좀 나눠 주지 그랬어. 산하 형은 가뜩이나 근육 유지하느라 힘들 텐데.

    남궁산하보다 차재우가 더하면 더했다. 작은 체구에 내장은 블랙홀로 되어 있는지 음식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넌 어때?”

    이겸은 재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도현에게 물었다. 케이크 위 올려진 과일을 집어 먹던 도현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너무 좋은데.”

    “그럼 가자.”

    “야호! 회식이다! 그것도 겸이 형이 쏜다!”

    “오빠, 겸이 오빠. 저 봐 둔 식당 하나 있는데 여기 어때요? 맛있어 보이죠? 그죠?”

    재우는 만세를 하며 얼른 겉옷을 챙겨 입었고, 도아가 저장해 놓은 음식 사진을 보여 주며 이겸을 설득했다.

    그 사이로 산하가 이겸의 소매를 꼬집듯 소심히 잡았다.

    “저기, 겸, 이겸아.”

    “네, 형.”

    그는 부끄럽다는 듯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도, 나도 겸이라고 불러도 돼? 그게…. 애들 다 그렇게 부르는데 나만 이겸이라 부르면 너무 사이가 멀어 보이고, 또 친하지 않은 것도 같잖아. 물론 네가 싫다면 난 괜찮으니까 사양 말고 거절해도 돼.”

    준비해 외워 온 문장인지 문장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겸은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지금까지 안 부르고 뭐 하셨어요?”

    “응? 어? 으응? 아?”

    산하가 눈을 깜빡이며 잔뜩 당황했다.

    “부, 불러도 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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