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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45)화 (45/102)
  • #045

    이겸은 도아와 흐지부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후, 넷×릭스를 시청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딩동- 딩동-.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어제 오늘 방문객이 많네….

    인터폰을 확인했지만 일부러 얼굴을 가린 건지 화면이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딩동- 딩동-.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소리에 이겸은 눈을 감았다. 협회 사건 이후로 훈련만 했지 잘 사용하지 않았던 이능을 발휘할 시간이다. 이를 위해 현관문 밖에 생수병을 가져다 놓았다.

    어디 보자.

    물 틈 사이로 방문객의 얼굴이 비춰졌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겸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방문객을 철저히 무시하기로 했다.

    딩동- 딩동-.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

    결국 폭력적으로 울려 대는 초인종 소리에 항복했다. 문을 안 열어 주면 집주인이 부재중이구나 생각할 만도 하건만, 방문객은 집주인이 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겸은 짜증 가득한 손길로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왜 왔는데.”

    “들어가도 돼?”

    “안 돼.”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던 질문이 아닌지 도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이겸의 자취방으로 입장했다.

    “저녁 먹고 있었어?”

    “무슨 상관인데.”

    “같이 먹자.”

    “너한테 기부할 쌀 없어.”

    “넷×릭스 보고 있었네?”

    도현은 마치 제집인 것처럼 이것저것에 손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이겸이 아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 닳아.”

    그는 넌지시 이겸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

    이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낮에 도아가 제게 했던 말이 오버랩됐다.

    “예전?”

    “요즘 좀 친해졌다 싶었는데 또 으르렁거리기 바쁘잖아.”

    “무슨 으르렁이야. 할 말 없으면 가든가.”

    불쑥 찾아온 서도현 때문에 다 먹지 못한 밥그릇을 치웠다. 그가 돌아간다 해도 먹을 맛이 나지 않았다.

    “할 말 있어. 대화 좀 하려고 왔어.”

    “난 할 말 없어.”

    “…….”

    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이겸을 올곧게 비췄다. 이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어. 그래 보여.”

    “비꼬지 말고 들어.”

    “비꼬아? 나는 있는 사실을 말한 건데? 비꼬아 듣는 건 너겠지. 부탁한 적도 없는데 특별 대우 운운하는 것부터 잔뜩 비꼬아 듣는다는 증거 아닌가?”

    도현은 눈매를 가늘게 늘어트렸다.

    “그거 때문에 화난 거야? 그렇다면 사과할게. 내가 말이 심했네.”

    “시발.”

    서도현은 순순히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겸은 그게 더 아니꼽게 보였다.

    그가 사과하는 이유는 뻔했다. 나는 잘못한 걸 모르겠고, 네가 왜 화가 난 건지 전혀 공감은 못 하지만 래터들이 우리 둘이 화해했으면 하는 분위기니 한 수 접고 먼저 사과해 준다.

    미안한 기색이 비치지 않는 서도현의 검은 두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기보단 오히려 곤란한,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준다? 그런 담담한 눈빛이었다. 배알이 꼴렸다.

    “사과했으니 화해한 거지?”

    “돌았냐. 너 어릴 때 도덕 안 배웠어?”

    “배워서 사과하는 거잖아. 사과를 한다,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 준다, 화해한다. 이거잖아?”

    이곳에 오기 전 인터넷에 검색까지 해 가며 공부한 방법이다.

    “네가 말한 거기서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 준다는 과정이 빠졌잖아.”

    “아. 그럼 받아 줄래?”

    “내가 왜?”

    “어떻게 하면 받아 줄 건데?”

    이겸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

    “뭐가?”

    “네 성격에 왜 그렇게까지 나와 화해하려 하냐고.”

    자신이야 어디 있든 서도현의 가상 세계를 인지할 수 있어 지친다지만 서도현은 돌아서면 그만이다. 하등 아쉬울 것 없을 텐데 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밖에 모르는 그라면 더욱 그래야 했을 터였다.

    역시 래터 때문인가.

    “애들이 원하니까.”

    정답이군.

    “…이해는 하겠는데, 왜 자꾸 애들을 끼워 넣어. 네 주장은 없어? 나중에 사람 죽여 놓고 너희를 위해서, 라고 말하면 애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런 적도 있긴 한데, 반응이 안 좋아서 최대한 비밀로 부치고 있어.”

    있었냐. 이겸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은 모순덩어리야.”

    “모순?”

    “비밀로 부쳐 왔다며. 최대한 비밀로? 그건 도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야? 재우는 나 같은 사람 죽이고 다닐 때 마실 나가듯 데리고 다녔잖아? 산하 형은 그런 거 알고 있고?”

    “아아, 그거? 재우밖에 몰라. 근데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어때? 이제 모순은 좀 풀렸어?”

    도현은 힐끔 이겸을 곁눈질했다. 충분히 설명을 해 줬음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자 이겸이 다시금 물어 왔다.

    “나도 래터라며.”

    “그럼.”

    도현은 새삼스레 왜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냐는 어조로 대답했다.

    “근데 왜 난 속하지 않아?”

    “뭐가?”

    “저번에 식사했을 때도, 내 기분은 거들떠도 안 보고 애들 눈치 보니까 분위기 망치지 말라고나 하고, 난 래터 아냐? 래터가 무시당하면 내가 무시당하는 거고, 내가 기분 나쁘면 래터 모두가 기분 나빠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다수결, 그런 건가?”

    윤이겸이 우다다 말을 쏘아 댔다. 말이 좀 길어졌다. 더군다나 이런 세세한 걸 따지고 드는 제 모습에 회의감도 들었다.

    원래라면 서도현과 맞지 않는 성격이라며 관계를 끊었을 텐데, 억울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뒀다가 타이밍이 오니 쏘아붙이듯 따지고 들기까지 하니.

    그간 함께 싸우며 정이라도 든 건지 뭔지 자신도 은연중에 그와 화해할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네 말로 따지면 래터는 가족이고, 나도 거기 속해 있으니 가족 아닌가?”

    “…….”

    이겸은 고개를 기울였다. 도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읊조렸다.

    “화난 게 아니라… 삐진 거였어?”

    부끄러움에 이겸의 귀 끝이 달아올랐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자신도 여태까지 몰랐다. 그저 갑자기 서도현에게 열이 뻗쳐서. 하지만 지금 우다다 쏘아붙이고 보니 그에게 화난 이유가 다른 원인도 있지만 이 사실이 제일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 같았다.

    “됐어. 이만 나가.”

    “겸아.”

    “꺼져.”

    이겸은 민망함에 도현을 우악스레 잡아 일으켰다. 그는 뿌리칠 수 있음에도 순순히 이끌려 나와 주었다. 더 이상 대화해 봤자 이겸의 화만 돋우게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화해할 생각이 나면, 그때 다시 와.”

    도현의 눈앞에서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그럼에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

    “이… 이겸아! 안녕! 아침부터 멋대로 집에 찾아와서 미안해! 오기 전에 연락했어야 됐는데 내가 그럴 정신이 없어서….”

    “집들이할 거면 한꺼번에 와요. 삼 일에 걸쳐 오면 저도 번거롭고 피곤해요.”

    “그랬구나. 미안해. 앞으로는 주의할게.”

    이겸이 퀭한 눈으로 남궁산하를 맞이했다.

    며칠간 강태하의 집에서 머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럼 자신이 피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고, 문을 안 열어 주자니 하필 인터폰 화면에 비친 이가 남궁산하였다. 안 열어 주면 분명 지구 내핵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갈 성격임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밥은 먹었어? 여러 가지 사 와 봤는데 다 네 취향 아니면 내가 직접 요리해 줄게! 헉, 냉장고 안의 재료를 쓰겠다는 건 아니야. 혹시 몰라 재료들도 다 사 왔어. 포장해 온 음식도 있는데 이걸 먹을 거면 구입한 재료들은 냉장고 안에 보관….”

    “일단, 일단 들어오세요…. 그리고 밥은 포장 음식이면 돼요.”

    “앗, 고마워!”

    구구절절 끊이질 않는 말에 이겸은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재우와 도아, 서도현은 막무가내로 집을 들어왔지만 남궁산하가 입구부터 쭈굴거리는 탓에 그를 쫓아낸다면 자신이 악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불러왔다. 양손 가득 짐을 한 보따리 들고 힘겹게 여기까지 왔을 그를 생각하면 문전 박대도 못 할 짓이다.

    “이겸아! 냉장고 문 열어 봐도 돼? 다름이 아니라 재료들을 정리하려는데….”

    “제가 정리할게요.”

    “그럴 순 없지! 괜히 일 시키는 것 같잖아. 넌 편하게 앉아 있어.”

    …제가 지금 딱 그런 기분이에요, 형. 괜히 일 시키는 것 같아 편히 앉아 있기도 민망한데요.

    “혹시 건들면 안 되는 물건 있어? 미리 알려 주면 주의할게.”

    “딱히 없어요.”

    남궁산하는 냉장고 속 재료를 정리하면서도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 질문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 굳이 대답하는 데 기를 쓰고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재우랑 도아는 와서 뭐 했어?”

    “재우랑은 떡볶이 먹으러 바로 나갔고, 도아랑은 같이 카페 갔다가 산책했어요.”

    “그래? 그럼 오늘 나랑은 뭐 할까? 하고 싶은 거 있어?”

    이겸은 올망졸망 그를 바라봤다. 막무가내인 아이들과 달리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별거 아닌 말에도 감동이 일었다. 이게 바로 연륜인가.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어…응? 나 밥도 사 왔는데!?”

    “아뇨. 그러니까 식사는 같이….”

    산하는 벌써부터 쫓겨난다는 생각에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물어 왔다.

    “나… 나가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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