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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43)화 (43/102)
  • #043

    “아는 사람이야? 문 열어 줄까?”

    강태하의 물음에 이겸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망칠 시간도 없게 도착한 후에 문자를 보낸 재우의 치밀함에 기가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강태하를 제집에 부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의 자취방으로 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추운 겨울 밖에 나가기 귀찮다는 나태한 마음가짐이 이겸을 궁지로 몰았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어제 그 일도 있고 해서 당분간은 래터에 관련된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학생? 겸아, 누구야? 아는 동생?”

    “…고등학생. 아는 동생.”

    고등학교 2학년임에도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신장이 작은 차재우는 여자인 서도아와 비슷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자주 중학생으로 오해받곤 했다. 첫 만남 때 이겸도 그랬었고.

    “아는 동생이면 열어 줄게. 밖에 추운데 계속 서 있게 할 순 없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 아는 동생이 생겼네. 중얼거린 강태하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당황한 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윤이겸 씨 댁 아닌가요?”

    “이겸이 친구예요. 들어오세요.”

    “아, 감사합니다. 겸이 형 아프다길래 병문안 왔어요.”

    “…이겸이가?”

    강태하의 의문 섞인 표정에 재우는 오늘 아프다는 이겸의 말이 거짓이란 걸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태연스레 신발을 벗으며 포장해 온 죽을 내밀었다. 무릇 인간의 마음을 돌리는 데 돈과 선물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산하의 주장 덕이었다.

    “네에. 여기 죽도 사 왔어요. 근데 이미 점심 드셨나 봐요?”

    이겸의 자취방에 떡볶이 냄새가 가득했다.

    “겸이 형!”

    “왜 왔어.”

    “형 간호하려고 왔죠. 여기 죽도 사 왔어요. 저녁에 드세요.”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야. 그 화분은 뭐야?”

    남궁산하의 작전이 통했는지 이겸은 재우를 바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한층 누그러진 기세로 물었다.

    “노송나무요! 꽃말은 불사인데 형의 건강을 오래오래 기원하는 의미에서 골라 왔어요. 나중에 커지면 분갈이해야 하는데 사무실로 가져오시면 제가 해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불사라.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서도현의 능력이 있는 한 윤이겸은 불사라 봐도 무방하니 말이다.

    “밥은 먹고 온 거야?”

    서도현과 남궁산하가 애들을 굶겼을 리는 없고.

    “방금 먹고 왔는데 떡볶이 냄새 맡으니까 또 배고파졌어요.”

    화분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재우가 주린 배를 문질렀다.

    “가자. 사 줄게.”

    이겸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우리 잠깐 나갔다 올게.”

    강태하에게 서슴없이 제집을 맡기고 신발을 챙겨 신었다. 그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재우가 강태하의 눈치를 살폈다. 타인에게 집을 맡기고 나가도 되는지 의문스러운 얼굴이었다.

    “차라리 내가 나갈게.”

    강태하도 신경이 쓰였는지 이겸을 붙잡았지만 그도 계획이 있었다.

    “아니야. 금방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

    언제 떠날지도 모를 재우를 집에 놔두느니 차라리 분식집에서 밥을 먹이고 보내는 게 더 빠른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강태하를 두고 집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이겸으로선 하루에 두 번이나 먹는 떡볶이였지만 크게 싫지는 않았다.

    메뉴를 시킨 뒤, 차재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아프단 거 거짓말이죠?”

    “거짓말은 맞는데…, 병문안으로 죽까지 사 온 놈이 할 소리야?”

    “헤헤. 그건 형 만나려고 만들어 온 핑계였죠.”

    이겸이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그래서 왜 찾아왔어?”

    “어음, 어제 일 때문에 저희한테 화난 거라면 사과하려고요. 죄송해요. 제가 눈치가 없었어요.”

    “뭘 잘못한지는 알고?”

    “으음…으으음! 크흠!”

    재우가 구슬 같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며 회피했다. 이겸이 그의 앞에 수저를 놓고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뭘 잘못한지 모르면 사과하지 마.”

    “그럼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 주세요. 반성하고 사과하고 싶어요.”

    이겸은 재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재우도 빼지 않고 눈에 힘을 주고 이겸을 마주 봤다. 하지만 그러던 중 음식이 나오자 재우가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허겁지겁 수저를 챙겨 들었다. 재우는 음식만 보이면 며칠 굶기라도 한 사람처럼 사족을 못 썼다.

    “천천히 먹어.”

    “그래서 제가 뭘 잘못했어요? 계속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답이 왜 안 나오겠어.”

    “네?”

    “잘못한 게 없으니까 답이 안 나오지.”

    재우가 떡을 우물우물 씹으며 불안한 얼굴을 했다.

    “혹시 제가 갱생할 여지도 안 보여 잘못을 말해 봤자거나, 필요가 없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서도현한테 화난 것뿐이야.”

    “마스터한테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그래.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알겠어요.”

    이겸이 화난 대상을 들은 재우는, 마음 놓고 맛있게 떡볶이를 흡입했다!

    아무 질문도 없이 쭉 늘어난 치즈를 떡에 감싸 입 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잘 먹네.’

    이겸은 가끔 젓가락을 뻗어 한두 개 집어 먹을 뿐, 점심도 먹었다는 재우가 2~3인분으로 나온 양을 대부분 혼자 해치웠다. 재우는 볼록하게 솟아오른 배를 퉁퉁 치며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이겸에게 인사를 전했다.

    “으아, 배부르다. 형,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래.”

    이겸이 떨떠름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도현이 형이랑 잘 푸세요!”

    걔랑은 평생 못 친해질 것 같은데….

    “사무실엔 언제 나올 거예요?”

    “글쎄.”

    “네. 그럼 이제 곧 저녁이니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집 들어가면 연락할게요!”

    그 배로 저녁도 먹으려고? 떡볶이는 간식이었나. 먹는 양에 비해 홀쭉한 재우였다.

    “…조심히 가.”

    이겸은 저 멀리 사라지는 재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서도현한테 왜 화가 난 거냐, 그 이유는 뭐냐,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다.

    얘는 고작 이거 말하러 집까지 찾아온 거야?

    의외로 담백하게 끝낸 재우와의 만남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응! 대화해 봤는데 겸이 형은 우리가 아니라 도현이 형한테 화가 난 거래.”

    “그래서?”

    재우가 순진한 눈을 깜빡였다.

    “응?”

    “그래서? 뭐 때문에 화가 난 거래?”

    “응? 그게 끝인데?”

    “차재우!”

    도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어제 둘이 대화를 나누고 도현의 뺨이 부어올랐는데 이겸이 그에게 화가 난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고작 그거 하나 알아 왔어!?”

    “떡… 떡볶이도 먹었어! 겸이 형이 사 줬어.”

    “떡볶이이? 자랑이다! 아주 자랑이야!”

    “도, 도아야아…. 너무 그러지 마. 재우도 생각이 있었겠지.”

    “오빠는 얘가 생각이 있어 보여요!?”

    “…그건.”

    산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재우는 억울해 소리쳤다.

    “왜! 중요한 사실 알아 왔잖아! 우리한테 화난 게 아니라 도현이 형한테 화났다니까!?”

    “그러니까 왜 화난 거냐고!”

    “왜 화가 났냐고?”

    “그래!”

    재우의 눈동자가 드르륵 소파에 앉아 이 사태를 관망하는 도현에게 향했다.

    “그건 도현이 형이 제일 잘 알지 않을까?”

    “…….”

    “이제 둘이서 대화하고 잘 풀면 돼.”

    천진한 재우의 대답에 도아는 또 한 번 벼락같은 고함을 쳤다.

    “대화가 됐으면 진작에 했지! 우리 오빠 성격에 누구랑 잘 푸는 게 말이 돼? 저 뺨을 봐! 어제 겸이 오빠와 대화하다가 맞은 자국이잖아!”

    “어… 그런가?”

    “괜찮아, 도아가 내일 가서 왜 화났는지 물어보면 되지. 둘 다 그쯤 해 둬.”

    산하가 나서서 둘을 중재했다.

    “왜 화났는지 알 것 같기도.”

    도현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놓치지 않고 들은 재우가 반색했다.

    “뭔데요? 뭐 때문에 화났는데요?”

    “특별 대우를 해 달라는 것 같은데.”

    그것 말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겸이 형이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다른 문제가 아니냐 캐묻던 재우와 산하 너머로 도아의 명쾌한 해답이 나왔다.

    “이거다.”

    “뭐가?”

    “우리 오빠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쳐서 겸이 오빠를 오해하고, 그쪽이 먼저 특별 대우를 해 달라고 했다느니 그딴 걸 바라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으니 겸이 오빠가 화났나 봐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산하가 제 턱을 문지르며 동의했다.

    서도아가 보다 빠르게 해답에 근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하고 쉬웠다. 지극히 객관적으로 판단한 사실이다.

    서도현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이 사실을 전제로 깔고 가는 것이다.

    “내가 잘못한 건가?”

    도현이 제 피어싱을 매만지며 조용히 혼잣말했다. 확실히 어제의 윤이겸은 자신이 먼저 특별 대우를 해 달라 부탁한 적 없었다. 도현이 혼자 한 추측에 멋대로 확신을 가지고 당연하다 여긴 거였다.

    ‘그래도 그 상황에 제일 그럴듯한 추측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먼저 사과를 건넨 적도 극소수였고, 인간관계로 문제가 생긴 적도 이겸이 처음이었다. 자신에 대한 험담을 듣더라도 너는 네 할 일 해라, 나는 내 할 일 한다는 심보로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이들은 도현이 시간을 쓸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

    제 친동생 서도아, 그리고 가족과도 같은 재우와 남궁산하는 처음부터 군말 없이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었다. 신경을 거슬리게 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도현에게 있어 이겸은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잘못 찍혀 자신을 싫어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건 서로에게 고역이었다.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훤히 보여도, 그래도 래터의 사람이라, 가상 세계를 공유하는 동지라, 자기 딴엔 최선을 다해 친절히 굴어 주고, 잘해 주려 노력했다. 묻는 말엔 꼬박꼬박 답해 주고, 화가 났을 땐 설득도 했다.

    하지만 어려웠다. 도현은 이겸을 볼 때마다 그렇게 느꼈다.

    인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겸과 크리처를 사냥하러 나가는 게 그와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배는 더 편할 것 같다. 그때는 전투 호흡만 맞추면 되니까 차라리 그게 쉬웠다. 그래서 윤이겸과의 전투가 즐거웠을 수도.

    “그럼 내일은 내가 만나 보고 올게.”

    하나하나 단계별로 격파해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음 날은 자기 차례라며 씩씩하게 외치는 서도아를 보면 자신도 뭘 해야 하긴 할 텐데.

    아무래도 따로 윤이겸을 만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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