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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크리처 (Under creature) (41)화 (41/102)
  • #041

    예호에게서 대련으로 승리를 거머쥔 그들은 회식을 하러 어느 고급스러운 한우 오마카세 식당으로 향했다.

    재우와 도아보다 일찍이 협회로 출발했다던 남궁산하는 결국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헐레벌떡 도착한 남궁산하는 협회로 가던 길에 무거운 짐을 든 어르신을 만나 돕고 오느라 늦었다고 쩔쩔맸다. 흔하디흔한 변명 같겠지만 신뢰가 갔다.

    만약 서도현이 이 말을 했다면 변명하지 말라고 타박했을 텐데,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식당으로 달려온 남궁산하를 보면 어르신을 도왔다는 말이 그저 변명일 것 같지가 않았다.

    “늦어서 정말 미안! 오늘은 내가 살게!”

    “에이,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잖아요, 형님! 이게 얼마일 줄 알고요?”

    “아냐! 나 그 정도 돈은 있어!”

    산하가 부득부득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지갑을 꺼내려 하자 재우가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전투력 자체는 래터 내에서 가장 약하지만 남궁산하는 기술계이기에 무기를 만드는 데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무기를 래터 멤버들에 우선 분배한 후 남은 것은 다른 길드에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 그 덕에 남궁산하는 래터 내에서 재력으로는 도현 다음가는 2인자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래터에 들어온 직후 곧장 입대한 터라 도현과 도아를 제외한 이들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괜찮아! 군대에만 있어서 쓸 곳도 없는걸. 여기 아니면 어디에 쓰겠어! 많이 먹어 얘들아, 더 시켜 줄까?”

    “오빠, 그럼 저 이거요.”

    “그래! 재우는? 도현이랑 이겸이도 골라!”

    “어. 저… 저느은.”

    도아가 추가 메뉴를 시키자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난감함을 표하던 재우는 슬그머니 먹고 싶은 메뉴를 골랐다.

    “전 아무거나 좋아요.”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아세요? 알러지는 없는지! 선호하는 음식은 뭔지! 매운 걸 잘 먹는지 못 먹는지! 적어도 그런 거라도 알려 주고 아무거나라고 말해야죠.”

    이겸의 대답에 도아가 광분하며 소리쳤다. 아무거나 종족은 박멸되어야 한다부터 비싼 한우를 잔뜩 태워도 아무거나란 말이 나올 수 있나 보자면서까지 중얼대기 바빴다.

    평소라면 도아의 눈치를 보다 눈에 차는 아무 메뉴나 고르던 이겸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식당으로 올 때부터 느꼈지만,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도아와 재우가 아웅다웅할 때마다 하는 그만 싸우라는 잔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개운치 못한 얼굴로 창밖을 살피기 바쁠 뿐이었다.

    남궁산하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겸아. 무슨 일 있었어?”

    “난 이걸로. 너도 나랑 같은 거 먹으면 되지?”

    서도현이 이겸을 대신해 메뉴를 고른 후, 그를 불렀다.

    “아까부터 왜 그래?”

    “…….”

    “윤이겸. 말을 해야 알지.”

    이겸은 자신을 부르는 재촉에도 입술을 꾹 다물기만 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겸에게 쏟아졌다. 식사 자리에서 제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해 삐진 철부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축하해야 할 좋은 날인데 자꾸 분위기 망칠래? 애들도 네 눈치 보잖아.”

    그의 말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시발.”

    “…뭐?”

    “시발, 이라고 했다.”

    이겸이 당당히 외치며 따져 물었다.

    “누구 덕분에 좋은 날이야? 누구 덕분에 축하하는 날인데.”

    “그야 겸이 형이 예호를 상대로 이겨서….”

    “그러니까. 난 기분 별로라고.”

    “네? 왜….”

    재우의 떨떠름한 질문에 이겸은 줄곧 자신이 개운치 않았던 이유를 읊조렸다.

    “편법 쓴 것 같아.”

    “편법이요?”

    “그래. 상대는 날 배려해서 이능 없이 싸웠는데 너흰 기억 못 하겠지만 난 서도현 이능을 썼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게 왜요?”

    도아가 눈을 말갛게 뜨고 이겸을 쳐다봤다. 이겸은 입 안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

    그게 문제였다. 대련에서 이겸은 지성호에게 몇 번이나 얻어터졌다. 결론적으로 우승하긴 했지만 순수한 실력이 아닌, 단지 싸움 경로를 예상해 지성호를 이긴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것조차 지성호가 패배를 언급하지 않고 장기전으로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도현이 굳히기를 한 후 다음 5분을 시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든 이겸은 그 사실이 못마땅했다.

    “어쨌든 래터가 이겼잖아. 불만족해?”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나는….”

    문득 마주친 눈빛들에 이겸은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그들의 눈빛에서 이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왜? 어째서 화를 내는 거지?’라는 의문만 가득히 담겨 있었다. 순간 설명해 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분위기 망쳐서 미안하다. 먼저 일어날게.”

    조촐히 겉옷을 챙겨 일어나자 도현이 그를 붙잡았다.

    “윤이겸.”

    제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서도현의 말에는 더 분위기 망치기 싫으면 일단 앉으라는 명령이 담겨져 있었다.

    ‘네가 뭔데.’

    가볍게 무시하곤 자리를 떴다.

    남궁산하는 험악한 분위기에 차마 잡지도 못한 채 이겸이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히 재우를 불렀다.

    “예호랑 싸울 때 무슨 일 있었어?”

    “별일 없었는데요. 왜 그러지?”

    답변을 듣고 나서도 남궁산하는 어수선하게 눈알을 굴렸다. 윤이겸을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지만 그가 사소한 일로 화를 내거나 예민해질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분명 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재우와 도아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고…, 서도현은? 어딘가 짐작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먼저 일어날게. 맛있게 먹고 와. 산하 형, 겸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애들 좀 집까지 태워 줄 수 있어?”

    “어, 응! 당연하지! 애들은 내가 책임지고 데려다줄게! 이야기 잘 하고 와!”

    도현은 뒤늦게 이겸을 따라나섰다.

    “저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단 도현이가 대화해 본다니까 우선 식사부터 하자!”

    “그래도….”

    “배고프지? 자, 자. 어서 먹어. 그보다 예호와 대련할 때 어땠는데?”

    산하는 아이들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며 아까 전의 일을 세세히 물었다. 아이들은 혹여나 자신이 말실수를 해서 이겸의 기분을 망친 건 아닐까 우울한 얼굴로 넘어가지 않는 고기들을 꾸역꾸역 삼키며 예호와 있었던 일을 낱낱이 얘기했다.

    “윤이겸. 잠깐 대화 좀 해.”

    “할 말 없어.”

    “집까진 어떻게 가게? 태워 줄게.”

    “택시 타고 가면 돼.”

    이겸은 도현의 팔을 뿌리쳤다. 이에 도현이 제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삐뚜름히 말했다. 곤란하거나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뭐가 문제인데? 아까 말했던 편법? 그거 때문에 그래? 양심에 찔려서?”

    “당연한 거 아니야? 상대는 날 배려해서 이능 없이….”

    “정말 널 배려했다 생각해?”

    “…뭐?”

    이겸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널 배려했으면, 그쪽도 신입을 내보냈겠지.”

    “…….”

    “그건 그냥 단순히, 이능 없이 싸워 줬다는 체면치레에 불과해. 이능도 제대로 못 쓰는 신입 상대로 그 정도 페널티도 없이 이기면 욕먹는 건 자기들이니까.”

    “…….”

    “그것도 몰랐어?”

    도현이 연이어 말했다.

    “애들도 그걸 아니까 네가 왜 화내는지 이해 못 하는 거야. 나중에 애들한테 사과해.”

    이겸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도현의 설명은 잘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해는 돼도 공감은 하지 못했다.

    “여기는 무시당하면 끝이야. CA 지역 빼앗기고, 수입도 적어지고, 후에는 부산물 해체 작업이나 잡무 등 다른 길드 똥이나 닦아 주고 있겠지.”

    “…….”

    “난 그 꼴 못 봐. 그러기 위해선 이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서도현은 조금 전보단 진정된 것 같은 이겸을 내려다봤다. 코끝과 양 볼이 추위로 인해 새빨갰다.

    “춥지. 일단 차에 가서 얘기하자. 데려다줄게.”

    다정히 이끌려 했지만 이겸이 거세게 뿌리쳤다.

    “왜 하필 나야? 난 아직 이 바닥 굴러가는 거 잘 모르겠고, 그 상태로 이딴 편법 쓰기 싫어. 왜 내가 다치면서까지 이런 짓을 해야 돼?”

    “안 다쳤잖아.”

    이겸은 한숨을 머금었다. 사방이 어지러웠다. 그래, 안 다쳤지. 안 다쳤다. 지금의 자신에겐 생채기 하나 없다. 하지만….

    “난 다쳤고, 아팠어. 다들 잊었을 뿐이지.”

    “…….”

    “내가 왜 그 고통을 참아야 하는데? 5분 사이에 상처가 사라졌다고 내 기억도 잊혀져? 난 너와 다르게 참는 것도 서툴고, 종이에 베인 손가락도 아파서 나을 때까지 끙끙대는 인간이야.”

    난 그렇게 못 해. 내가 왜? 왜 하필 내가? 굳이 왜 내가 그걸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는데? 이겸은 눈을 부릅뜨고 도현을 올려다봤다. 왜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눈빛이었다.

    도현은 차디찬 밤공기에 나직한 호흡을 뱉었다. 이겸과 마찬가지로 그는 도저히 이겸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겨웠다. 입김이 나오는 동시에 고저 없는 목소리도 함께 울렸다.

    “래터잖아.”

    “…뭐?”

    이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소속감이 없는 거야? 넌 래터잖아. 래터가 무시당하면 네가 무시당하는 거고, 래터가 이기면 네가 이기는 거고.”

    “난 아직….”

    “반대로.”

    그가 서늘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무시당하면 래터가 무시당하는 거고, 네가 이기면 래터의 승리야. 몇 번이나 말해야 새겨들을래? 래터는 가족이라고. 운명 공동체 몰라?”

    “…네가 무슨 길드를 만들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난 아직 래터에 대한 정이 크게 없고, 그걸 위해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거야.”

    “희생? 네가 언제 희생했어?”

    이겸은 말문이 막혔다. 진심으로 그렇게 물어 오는 도현의 눈동자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하아, 아니다.”

    도현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이겸을 붙잡았다.

    “예호와 한 대련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싸운 걸 희생이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몇 번을 반복해 겨우 승리했는데 그걸 몰라줘서 화가 난 거야? 칭찬을 안 해 줘서?”

    “내 말은 그게…!”

    “그 순간에 가장 맞는 멤버가 너였을 뿐이었어.”

    이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재우가 적합했다면 재우를 내보냈을 거고, 도아나 산하 형 역시 마찬가지야. 단지, 그 상황에 제일 걸맞은 인물이 너였을 뿐이라고.”

    “…….”

    “다들 각자의 역할이 있어. 당연하게 제 역할을 수행한 것뿐인데, 왜 칭찬을 바라? 그것도 아니면….”

    도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깐의 고민 후 내뱉은 말은 이겸의 화를 돋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별 대우라도 해 달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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