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청연은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지만 이번에는 야명주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저 무호의 손이 자신을 잘 이끌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참 우스웠다. 지난번에 여길 왔을 때만 해도 무호가 저를 언제 죽일지 몰라 목숨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이제는 그를 철석같이 믿다 못해 의지하고 있었다.
“있잖아.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청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왜 교주가 되기로 했어? 전임 교주가 죽고 나서 그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잖아.”
“그건 왜 궁금한데.”
“그냥…. 나는 네가 여길 싫어한다고 생각했거든. 어렸을 때 잡혀 와서 좋은 기억 하나 없었을 거 아니야.”
원작 같은 게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래도 편의상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원작이라고 부르자면, 거기서 무호를 교주로 만든 건 그의 야망과 탐욕이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자라난 것 같아 왜 마교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응? 내가 뭐?”
청연이 묻자 그는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
“윗대가리가 썩으면 답이 없다고.”
“…어?”
잠깐. 내가 애한테 그런 소리를 했다고? 말도 안 돼.
기억을 되짚어 보던 청연은 자신의 이마를 내려칠 뻔했다.
“야, 그건 술주정이었잖아! 술 마시고 한 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떡해?”
“통치자가 정신 나간 놈이면 전쟁이 난다며.”
“…제발 농담이라고 해. 내가 한 말 때문에 교주 된 거 아니라고 해.”
당시 취한 것까지는 아니었기에 기억이 났다. 알딸딸한 상태로 지나가던 무호를 붙들고 한탄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글도 제대로 모르던 어린애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건지 후회되는 마음이었다.
“진짜 그거 때문이야? 아니지? 네가 직접 교주가 되어서 윗대가리들을 바꿔 놓아야겠다, 그런 생각한 거 아니지?”
“그럴 리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청연은 안심했다. 이놈은 못 본 사이에 몸만 큰 게 아니라 저를 농락하는 방법도 깨친 모양이었다.
“그러면 왜….”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그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답했다.
“저런 놈 잡아다 가둬놓는 것도.”
저런 놈이라면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그 사람을 의미하는 거겠지. 청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계단은 내려가고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떨렸다. 손가락이 바짝 움츠러들자 긴장하지 말라는 듯 손등을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왠지 민망해진 청연은 중얼거렸다.
“여기 진짜 깊네. 감옥을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만들었지?”
“…….”
“예전에는 기관진식까지 깔려있었다며. 탈출 같은 건 꿈도 못 꿨겠어. 아, 아니다. 너는 해냈으니까.”
새삼 그가 대단해 보였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은 걸로도 모자라 그 어린 나이에 탈출까지 했다니, 자신이었다면 진작 죽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힘들었어?”
“뭐가.”
“여기 갇혀있었을 때.”
이번 질문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들은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내가 웬만해선 이런 말 안 하는데 그놈들은 정말 죽어도 싸. 너 여기다 가둬 둔 놈들 말이야. 애들한테 그런 짓 하는 놈들은 싹 다 천벌 받아야 해.”
“…….”
“늦었지만 고생 많았어.”
살아남느라. 청연이 덧붙이자 이번에는 무호의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계단을 모두 내려가니 평탄한 복도가 등장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건 여전했다. 복도를 따라 걷던 청연은 공기 중에 진동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이건….’
지독한 피비린내였다. 이게 누구에게서 흐른 피인지 짐작하다 보니 호흡이 절로 가빠졌다. 청연은 작게 심호흡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자 무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청연도 덩달아 멈춰 서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기다려.”
“…응.”
꼭 잡고 있던 두 손이 떨어졌다. 이윽고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연은 눈을 감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모두 괜찮을 것이다,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문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호가 들어가 등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에 청연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와.”
무호가 다시 복도에 나와 말했을 때도 청연은 굳어있었다.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을 발견한 그는 재촉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잠시 기다려 주었다.
“…미안. 나 조금만….”
“이거.”
그가 소매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청연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힘들면 이거 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청연은 순간 긴장이 풀려 미소 지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아주 익숙한 물건. 세화가 빼앗겼던 아버지의 단검이었다.
“너 진짜… 아니다. 가자. 나 준비됐어.”
청연은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음을 굳게 먹은 그는 무호의 뒤를 따라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피비린내가 한층 짙어짐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문이 막혔다.
“…….”
이게 대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슬에 꽁꽁 묶인 채 차가운 벽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세화의 누님을 죽인, 가면을 쓰고 다니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의 사지가 온전했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팔과 다리가 전부 뜯겨 나간 채였다.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지혈만 겨우 해 둔 상처는 이미 곪을 대로 곪아 눈 뜨고 보기 힘겨울 정도였고, 버석버석한 피부와 풀어헤친 머리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대변하는 듯했다.
청연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청연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당신….”
“말 못 해.”
그에게 말을 붙이려 하자 무호가 끼어들었다.
“자결할까 봐 혀를 미리 잘랐거든.”
그런데 남은 부분이라도 깨물려고 하기에 이를 다 뽑아 버렸어. 덧붙인 무호의 말에 청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전도 부쉈으니 확인해봐.”
청연은 천천히 걸어가 남자의 앞에 섰다.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복부에 손끝을 살며시 가져다 댄 그는 놀라서 손을 떼어 냈다.
단전이 파괴된 걸로 모자라 맥이 엉망진창이었다. 산 사람에게서 이런 맥을 느껴 보는 건 처음이었다. 몸속에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지난번, 무호에게 그가 살아 있느냐 물었을 때 들었던 ‘간신히’라는 대답이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다. 이마저도 억지로 이어놓은 생명일 것이다.
구 년 전 시장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이런 꼴이 됐다니. 청연은 흔들리는 눈으로 무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반대편 벽에 기댄 채 가만히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청연은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서 단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누님을 잃은 날 밤에 어린 세화가 그랬듯, 검날을 그의 몸에 겨누었다.
“내가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
“그런데 말을 못 하신다니 아쉽게 되었습니다.”
청연은 그의 턱 끝에서부터 가슴까지를 검날로 훑어 내리며 간만의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운현진인.”
***
“그만해. 이러다 누가 오겠어.”
“나랑 이러는 거 싫어?”
세화는 난처해하는 여운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한 채 하얀 뺨 위에 입술을 쪼았다.
“다 네 업보야. 네가 먼저 시작한 거라고.”
“알았으니까 여기선 좀….”
“그러게 그날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삼 년 전 그날 계곡에서 접문을 한 뒤,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벌어졌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감정을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숨어서 입을 맞추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세화는 여운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어려워졌다. 연무장에서 그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빨리 둘만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그를 조금은 다른 식으로 좋아하고 있음을,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 그를 향해 품어온 동경이 다른 감정으로 발전했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그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인정하고 나니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세화는 이전부터 생각을 복잡하게 꼬아서 하는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다 좋았다.
사형제 관계가 되었을 때부터 늘 한 쌍으로 붙어 다녔기에 둘의 사이가 크게 달라졌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달라진 건 딱 하나였다. 지금처럼 이렇게 붙어서 쪽쪽거리기 시작했다는 거.
“알았어. 놔줄게.”
세화는 웃으며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좋다고 먼저 들이댈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부끄러운 척이야?”
“그거야 네가 너무….”
“너무 뭐?”
여운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를 놀리는 데 한창 재미가 붙은 세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수풀 속을 빠져나갔다.
“잠깐만.”
어느새 뒤를 따라온 여운이 세화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오늘 밤에 나가?”
“…모르는 척해 줘.”
세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자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차라리 같이 가.”
“안 돼.”
“위험할 수도 있어.”
세화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위험하니까 걱정 마. 내가 여러 번 말했지? 네 재능이면 나중에 아주 큰 일을 할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
진심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그의 휴식에 방해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종일 수련한다고 바쁜 사람을 밤에도 끌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 세화는 가끔 아무도 모르게 야행을 나갔다. 사문 앞을 지키는 보초가 교대하느라 자리를 비운 아주 짧은 틈에 빠르게 담을 넘었다. 기루에서 누님들 몰래 놀러 나가던 실력 그대로였다.
그의 목적은 단순했다. 과거 누님이 돌아가셨을 당시, 기루를 내놓으라고 겁박하던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화는 그들이 직접 운영하는 도박장에 찾아가서 깽판을 치고는 했다. 다행히도 여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몰랐다. 발각된다면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되겠지, 하는 속 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