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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00)화 (101/145)

100화

지홍의 흔들리는 두 눈이 탁자 위에 널브러진 붕대를 응시했다. 그 앞에 앉은 주군께서는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계셨지만, 그의 몸을 둘둘 감싼 붕대를 보고 있자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흰 붕대가 넓은 가슴팍과 등판을 가로질렀다. 어깨 위에 단단히 매듭지어져 풀리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닌지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지홍은 괜히 식은땀을 흘렸다.

“가져가서 태워 버려라.”

그가 턱짓으로 발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피 묻은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이 정도 태우는 건 그에게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저를 불러 명령한다는 건….

“힘을 아끼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눈치를 살피며 묻던 지홍은 입을 합 다물었다. 별 쓸데없는 걸 다 묻는다는 성가심이 주군의 얼굴에 가득 드러났다.

“태우겠습니다.”

지홍은 고분고분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이런 일을 믿고 맡기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교인들이 수두룩해도 사적으로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았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예,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지홍은 불경하게도 주군의 말을 끊고 답했다. 피 묻은 옷을 손에 들고 조금은 속상해졌던 탓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는 놀라 몸을 굳혔지만, 다행히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부교주에게는.”

낮은 목소리가 경고하듯이 말했다.

“…예.”

지홍은 고개를 숙여 답하면서도 한쪽 구석에 놓인 대도를 곁눈질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베여 피가 날 것처럼 흉흉한 기운을 뽐내는 무기였다.

호연(浩緣).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졌지만 주군께서 아끼시는 물건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저 대도가 원망스러웠다.

한동안 대도를 바라보던 지홍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타박하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후다닥 예를 갖춘 뒤 방을 나섰다.

옷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돌아오니 문 앞에 서 있는 주군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새 옷을 갖춰 입어 흰 붕대는 옷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를 바라보던 지홍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옷을 입든 태가 나는 분이시지만, 오늘따라 더 신경 쓴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포에 금박으로 수 놓인 문양이 화려했고, 좀처럼 좋아하지 않으시던 장신구까지 하고 계셨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지홍은 또다시 주제넘은 질문을 건넸다. 딱히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그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손님이 오신다.”

“손님이라면… 아.”

그가 손님이라 지칭하는 사람을 스스로 깨달은 지홍은 몰래 미소 지었다. 주군께서 이토록 옷차림에 공을 들이시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물론 그분을 만나실 땐 항상 신경 써 차려입은 모습이시니 당사자는 이런 노고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왕 차려입으셨는데 머리도 한번 묶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신이 난 지홍은 이제 자신의 위치도 잊은 채 떠들고 있었다.

“머리를 묶으시면 훤한 인물이 더욱 돋보일 것 같습니다. 시비들을 부를 테니….”

“닥쳐라.”

“옙.”

성큼성큼 봉우리 아래를 향해 걷는 주군의 뒤를 쫓으며, 그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정말 입을 닥친 건 아니었다.

“손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특별히 진수성찬을 차리라 명하겠습니다.”

“그럴 겨를이 없을 터인데.”

“예?”

식사할 겨를도 없을 거라니. 두 분이서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아!’

골똘히 생각하던 지홍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하긴, 혼사까지 염두에 두셨을 정도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듣는 귀가 많으니 괜히 부끄러워져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면 침소를 장식하라 이르겠습니다.”

“…….”

“향을 피우고 따뜻한 목욕물도 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기력 보충에 좋은 영약도 하나… 아, 물론 주군이 아닌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주군께서는 영약 같은 거 드시지 않아도 충분하실 거 압니다.”

사내끼리 밤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군께서도 이런 일에는 문외한이실 테니.

지홍은 제 주군의 손등 위로 툭 불거져 나온 힘줄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떠들었다.

“오늘 밤은 침소 앞의 호위들을 전부 물리겠습니다. 그러니 소리가 새어 나갈까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언은 끝났나.”

“예?”

일순 지홍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는 순식간에 몇 장 밖으로 날아가 커다란 바위벽에 몸을 부딪치고 거친 흙바닥 위로 쿵 떨어졌다.

“허억….”

기침을 토해내자 잇새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지홍은 가슴을 들썩이며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 못다 한 유언을 끝마쳤다.

“즈, 즐거운 밤 되십시오, 주군….”

***

청연은 천산에 도착하자마자 무호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신 한 장 쓰지 않은 채 무작정 찾아온지라 실례가 아닐까 고민했는데, 무호는 이미 자신이 온 걸 알아차리고 마중까지 나와 있었다. 그것도 부하들을 줄줄이 이끌고 말이다.

“굳이 안 나와도 됐는데 번거롭게. 아, 이거.”

청연은 손에 있던 짐 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술이라도 좀 가져왔어. 저번에 너랑 제하가 거덜 낸 그런 술 아니고 훨씬 좋은 거야. 시간 날 때 마셔.”

무호가 뒤에 서 있던 흑의인들에게 눈짓하자 한 명이 잽싸게 다가와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덕분에 손이 가벼워진 청연은 무호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기분이 새삼스러웠다. 저번에 여기까지 끌려왔다가 떠날 때만 해도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제 발로 직접 찾아오게 되다니. 그는 조금 머쓱해져서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내가 여기 왜 온 건지는… 알아?”

그러자 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할 준비는 마쳤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청연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강 땅을 밟았을 때부터 심장이 떨렸다. 긴장되고 속이 울렁거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마음먹은 일은 꼭 끝마쳐야지.’

결심을 굳건하게 다지고 있을 때였다. 바람에 날려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 무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청연은 잎을 떼어 주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청연의 손목을 빠르게 낚아챈 무호는 어깨를 대충 털어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어? 방금 뭔가….’

뭔가 이상했는데. 꼭 자기 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 같았다.

청연의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호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더니 잡고 있던 손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뭐 묻었어?”

그는 말없이 청연의 손목을 더듬거리며 짚어보다가 넓은 소매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갑자기 맨 팔뚝을 내어 주게 된 청연은 영문을 몰라 그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무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소매 속에서 손을 빼낸 그는 이제 양손으로 청연의 허리춤을 만져 보고 있었다. 청연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뭔데?”

“왜 이렇게 말랐어.”

아.

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던 청연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변명했다.

“그 뭐냐, 내가 요즘 다시 무공 익힌다고 몸을 많이 썼더니 살이 좀 빠졌더라고. 다 근육으로 간 거니까 신경 쓰지 마.”

“…….”

말도 안 되는 변명인 건 알고 있었다. 이렇게 튼튼한 몸을 얻어놓고 무공 좀 익혔다고 야위어버리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홍이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발견한 청연은 여태까지 하던 생각들을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꼴이 왜 저래?’

몸에는 흙을, 입가에는 피를 묻힌 채였다. 마치 적과 싸우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새 청연의 몸을 놓아준 무호는 그를 돌아보며 명했다.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거라.”

“아니, 나 괜찮다니까. 진짜 안 그래도 되는데.”

“가능한 한 빨리.”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명령하는 그의 말투에 청연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무호와 발걸음을 맞춰 걷는 길, 청연은 힐끔힐끔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살이야 다시 찌우면 그만인 건데 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자신의 앞가림 정도는 알아서 하고 싶었다. 처음 빙의해서 이 세계에 왔을 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특히 무호가 성인이 된 후부터 자의든 타의든 그의 도움을 받는 일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글을 가르쳐 주거나 사과를 잔뜩 사다 주는 걸로는 갚을 수 없게 되어 버렸는데.

“뭘 봐.”

“어? 아니야.”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청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연무장을 지나고 대전을 지나, 깊숙한 곳을 향해 갔다. 지하 감옥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 세화의 누님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람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봐도 몸의 반응은 막기 어려웠다. 커다란 철문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문이 열렸을 때도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때, 따뜻한 손이 청연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무호와 시선을 마주한 청연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적혀있는 속마음을 읽었다.

‘걱정하지 마.’

자신과 함께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청연은 입을 열었다.

“…가자.”

꼭 맞잡은 손이 청연을 계단 아래로 이끌었다. 그들을 따르던 흑의인들은 그대로 바깥에 남겨 둔 채, 두 사람 뒤로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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