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02)화 (103/145)

102화

그날 밤에도 마을로 내려가 일을 끝마친 세화는 다시 도관으로 향했다. 평소와 같은 속도로 올라간다면 보초 교대 시간에 맞출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산기슭으로 막 접어들던 때였다. 어디선가 풍겨 오는 피비린내가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짐승의 피는 아닌데.’

미심쩍은 생각에 세화는 곧장 혈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산기슭을 빙 돌아 걸음을 옮길수록 향은 점점 짙어졌고, 시간이 더 지난 뒤에는 코를 찌를 듯이 진동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이었다.

세화는 곧장 달려가 시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곤륜의 도복을 입은 제자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의 몸에는 칼로 난도질당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해당한 흔적이었다.

‘왜 이 시간에 여길….’

산맥이 워낙 크니 도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점이었다. 한밤중에 이런 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다니 누구의 짓일까. 억지로 끌려 나온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쫓으려고 한 걸까.

‘…어?’

순간 시신의 얼굴을 알아본 세화가 움찔 놀랐다. 이 얼굴은 지금 보초로 서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스승이 달라 마주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분명히 본 기억이 있었다.

보초를 서던 사람이 산기슭에서 죽은 채 발견되다니, 문파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당장 돌아가서 알려야 했다. 어쩌면 이미 다들 알아채고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몰랐다.

세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산을 오르려고 했다.

“멈춰라.”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그는 우뚝 멈춰 섰다. 여태 기척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딱 한 번 들어보았지만 뇌리에 박혀 잊을 수 없던 목소리. 그 소리에 몸이 즉각적으로 얼어붙었다.

세화는 뻣뻣해진 목을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가면을 쓴 남자였다.

“…….”

그토록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내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뜻밖의 충격으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누님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이 발목을 잡아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세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 정신 차리자.’

오랫동안 꿈꿔왔던 복수를 자행할 기회였다. 이렇게 가만히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신 짓이야?”

세화는 시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조금 전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등에 무언가를 메고 있었다.

그딴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세화는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굳건하게 다진 마음과는 달리 발은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그를 만나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 몇 번을 다짐했으나 겁을 잔뜩 먹은 몸은 둔하게 움직였다. 이미 머릿속을 장악한 어린 시절의 기억 탓에 속이 메스꺼웠다.

사실은 그때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간 무공을 익혔음에도 저놈의 무위가 압도적으로 높은 건 여전했다. 그와 겨룬다면 단 일초식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겁이 나느냐?”

남자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죽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그의 말대로 겁이 났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화는 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손의 힘이 스르륵 풀리고 검이 미끄러졌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다. 몸이 둔한 것도, 속이 메스꺼운 것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세화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단지 겁이 나서 그런 건 아닐 게다.”

남자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몽혼약을 풀어놓았으니.”

“…몽혼약?”

“그래. 그러니 편히 잠들거라.”

“방금 뭐라고….”

세화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게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도착하면 깨워 주마.”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세화의 몸이 바닥에서 번쩍 들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그의 검과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뿐이었다.

***

“정신이 드느냐.”

세화는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에 힘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어두컴컴한 동굴의 천장이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세화는 팔에 힘을 주어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

“신강이다.”

순순히 답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걸어왔다. 가면 뒤편으로 보이는 두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세화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마교의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강렬한 마기가 느껴졌다. 숨기지 않고 풀어놓은 마기가 숨을 옥죄어 왔다. 세화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나, 나를 왜….”

왜 신강까지 데려온 거야.

동굴 바닥을 짚은 손에 버석한 모래의 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오늘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바라던 복수는 시도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그렇게 못난 아우로 세상을 뜨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이지 않을 것이다.”

세화의 생각을 읽은 듯, 남자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의 앞으로 걸어와 앉았다.

“적어도 내 손으로는.”

“…….”

이게 무슨 개소리야.

세화는 얼어붙은 채 그를 죽어라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손끝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단전 부근을 짚었다. 그 틈을 타서 공격하려고 해보았지만 그의 반응이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점혈 당한 세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끙끙거리며 몸을 비틀어도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마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달싹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을까.

“푸, 풀어.”

“기다려라.”

그는 다시 손가락을 세화의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서서히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평생 정공만 익힌 몸에 마인의 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소 주화입마였다. 죽이지 않을 거라더니. 역시 죽이려는 거였다.

경맥을 타고 들어와 몸속에 자리를 차지한 기운이 불쾌했다. 불쾌한 걸 넘어서 고통스러웠다. 마치 뼈를 깎고 근육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세화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전해 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점혈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혈도를 제멋대로 건드리도록 내버려 둔 채 아파하는 것밖에는.

“그만…!”

세화가 헐떡이며 외쳤다. 남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힐끗 보고는 그의 입 속에 단환 하나를 억지로 밀어 넣어 삼키게 했다. 그와 동시에 뱃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맥을 짚으니 몸을 짓누르던 점혈이 풀렸으나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차라리 불에 타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세화는 차가운 돌바닥을 손톱으로 벅벅 긁으며 몸부림쳤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가면 뒤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라리 죽여….”

“죽이지 않는다니까.”

지금 이런 짓을 해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세화는 생리적인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굳이 신강까지 데리고 왔겠느냐.”

“…….”

“네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데리고 왔겠지.”

“무, 무슨….”

남자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화를 내려다보는 두 눈이 가면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말했지. 너와 나는 같은 부류라고.”

그러니까 그게 뭔 헛소리냐고.

저딴 놈과 단 하나의 접점이라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같은 부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대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서서히 손을 가면으로 가져갔다.

‘벗으려는 건가.’

세화는 활활 타오르는 통증에 몸을 떨면서도 눈을 똑똑히 뜨고 지켜보았다. 저놈의 얼굴을 보고야 말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무고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다니는지 알아야겠다. 저 얼굴을 꼭….

‘어?’

가면이 벗겨진 순간 세화는 호흡을 멈췄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 숨이 막혔다.

‘운현진인?’

다른 사람도 아닌 곤륜의 장로였다. 문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었고, 수많은 제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곤륜의 장로가 어째서….

‘설마 마교의 간자인가.’

마교에서 종종 정파에 간자를 심어놓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목적은 주로 내부 기밀을 빼돌리기 위해서였다.

마교와 지리상으로 밀접해 있는 곤륜은 특히 이런 간자를 색출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전에도 몇몇이 발각되어 심문 끝에 처형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장로라니. 그토록 오랜 시간 문파에 몸담은 채 마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다니. 당황한 세화는 고통도 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천마신교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길러졌지.”

그가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어느새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