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가만히 서서 청연을 바라보던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노인의 것처럼 들렸다. 몸에 두른 흰옷과 손에 들고 있던 꽃과 사과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청연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저는… 그….”
무슨 말을 해야 돌아갈 수 있을까. 청연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일단 좀 걷자꾸나.”
“어디로… 말입니까?”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휙 돌아섰다. 저승으로 건너가는 길일까 불안했지만 얌전히 그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청연은 착잡한 마음으로 걸음을 떼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멀어져 가는 객잔과 여름의 무성한 숲이 눈에 밟혀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웠다. 이대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 산만하니 그만 돌아보거라.”
“…예.”
청연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답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그들은 봄의 땅에 도달해 있었다. 분홍 꽃잎들이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청연은 사방에 가득한 꽃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리 기쁘지 않았다.
“널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
아이의 물음에 청연은 고개를 떨궜다. 제하가 가졌어야 할 기연을 제가 대신 맞닥뜨린 이유.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가… 원작을 어그러뜨려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원작? 그런 건 애초에 없다.”
“없다니요?”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손을 거쳐 다른 세계에 전해질 뿐이지.”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청연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그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날,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가 닿으면….”
“…….”
“그러면 차원의 문이 열린다.”
마침 두 사람의 눈앞에 탁 트인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 너머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고전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암절벽과 산봉우리들 사이로 운무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아이가 절벽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자 청연도 그의 옆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제가 여기 오게 된 게 전부 세화의 염원 때문이었다는 겁니까?”
“그래.”
“어떤 염원인데요?”
“그거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곰곰이 생각하던 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화는 이미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었기에 알 수 있었다. 여운의 생존과 누님을 위한 복수,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렇다면 민아는요? 민아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 여기 오게 되었습니까?”
“그 점쟁이 말이냐?”
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건은 예외였다. 참 신통한 점쟁이였지.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저 혼자서 차원의 문을 열었더구나.”
“문을 열었다는 건 그 사람이 지금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겁니까?”
“아니.”
그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누군가를 끌어올 수는 있어도 나가는 건 불가능해. 그 문을 여는 순간 소멸했다.”
“아….”
“그것도 어쩔 땐 예외가 있는 것 같다만.”
혀를 쯧쯧 차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에게 청연은 물었다.
“혹시 저와 민아 전에도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어디 보자.”
그는 작은 손을 펼쳐 천천히 수를 세며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접힌 손가락은 단 세 개였다.
“셋이 있었는데 전부 파멸했구나.”
“파멸이라니요?”
“하나같이 마음속에 탐욕이 득실득실한 놈들이었다. 몸 주인의 신념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다가 혼백이 흩어져버렸지.”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까닭은….”
“거스른 적 없었으니.”
절벽 너머를 바라보던 청연이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꼬질꼬질한 건 변함없었지만 말이다.
신이라고 부르기에는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외모였다. 앙상하게 마른 몸과 움푹 팬 볼이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어르신, 혹시 그 비 오던 날 밤에….”
“왜. 아직도 내가 강시처럼 보이는 것이냐?”
지금까지의 진지한 표정은 개나 준 듯,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청연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며 마른침만 삼켰다.
“나는 어디에든 있다. 비 오는 밤에 빈털터리 노인네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기녀가 되어 술상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예?”
“가끔은 배고픈 거지 아이들 틈에 숨어서 밥이나 얻어먹으러 다니기도 하지.”
“…….”
청연은 지금까지 그가 한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세화의 염원. 자신의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그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언제나 약자의 모습으로 제 곁에 존재했던 신.
노인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가지고 놀며 청연에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예…. 떠나기에는 이승에 남은 미련이 너무 큽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그동안 여기 왔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부 떠났다. 딱 한 놈만 빼고.”
“한 놈이라면….”
노인은 청연의 몸을 가리키며 답했다.
“그놈 말이다. 네 몸에 남은 혼백.”
세화의 혼백이 남아 있다고?
청연은 놀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놈도 어지간히 미련이 남았는지 딱 한 조각을 남겨 놓고 갔는데,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참이었다. 마지막 한 조각이 없어 귀계를 떠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처지라니.”
“그렇다면… 제가 이대로 죽으면….”
“그 마지막 한 조각이 소멸하겠지.”
그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그러니 나와 거래를 하자꾸나. 그놈이 남겨 놓고 간 혼백을 내게 넘겨주면 교룡의 내단을 내어주마. 너의 원신은 이미 부상으로 반쯤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 그게 있어야만 새 몸을 얻어 이승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야.”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그의 말에 청연의 귀가 솔깃했다. 귀가 솔깃한 정도가 아니라 희망이 차올랐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제가 그걸 넘겨 드리면 세화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귀계를 떠도는 나머지 혼백과 하나 되어 그놈이 평안해지겠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청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물었다.
“그러면 저는요? 기억을 전부 잃게 됩니까?”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반복되는 질문에 노인은 성가시다는 듯이 답했다.
“아, 그리고 교룡의 내단… 그건 원래 제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걸 제가 가지면 주인공은….”
“주인공 같은 건 없대도!”
그는 버럭 짜증을 냈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은 것이야?”
“하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전쟁이 나게 되면 어찌합니까? 원작, 아니, 제가 본 이야기에서는 제하가 크게 공을 세운 덕분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물론 그가 정말 천마의 목을 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묻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교룡의 내단을 흡수한다고 한들, 제하가 그랬듯이 엄청난 힘을 갖게 되지는 않을 터였다. 이 몸은 이미 부서지고 찢겼으니 건강한 새 몸을 되찾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만약에라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거기에서 크게 활약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청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자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초에 전쟁이 나지 않도록 막으면 될 것 아니냐.”
“…….”
“이렇게나 꾸물거리다니, 돌아가기 싫으냐?”
“아니, 아닙니다! 거래하겠습니다.”
다급해진 청연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미안하다, 제하야. 일단 좀 살고 보자.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지막 혼백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몸 주인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찾아… 아, 그래! 그거면 되겠구나.”
노인은 기쁜 얼굴로 손뼉을 짝 쳤다. 청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손가락을 들어 지나온 길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저걸 네 손으로 가져와 내게 건네주면 된다.”
청연은 나뭇가지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곳으로 다가갔다. 분홍색 꽃이 만개한 나뭇가지에 익숙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화….’
아름답게 피어난 꽃송이들 가운데, 마치 제 자리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청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네 번째 손가락은 텅 비어있었다.
‘부디 평안해지기를.’
그는 세화의 안식을 빌며 반지를 집어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이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연이 반지를 건네자 그는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햇살이 쏟아져 내려왔다. 이것이 그의 본존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돌아갈 준비는 되었느냐?”
“…예.”
청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손이 다가와 청연의 가슴팍을 가벼운 손길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몸이 순식간에 절벽 밖으로 밀려났다.
덜컥 겁이 나 눈을 감았지만, 떨어지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청연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부드러운 목소리만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거라, 아해야. 떠난 이들은 반드시 돌아온단다.’
***
청연이 눈을 번쩍 떴을 때는 축축한 흙바닥에 드러누운 채였다. 그는 여전히 강가에 있었다. 얼마나 떠내려온 건지 주변 풍경이 온통 낯설었지만, 그런 데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몸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 있다니. 온몸의 기혈에 막힘이 하나도 없었다. 청연은 손끝 발끝까지 차오르는 깨끗한 기운에 감탄했다. 이 몸에 빙의한 뒤 처음으로 느껴 보는 힘이었다.
부상으로 너덜너덜해졌던 몸이 완벽히 치유된 건 물론이고, 근골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한 듯했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 정좌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곤륜의 내공 심법을 비롯한 세화의 기억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