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신을 만난 것 같다고?”
여운의 물음에 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배에서 떨어지고 나서 뭘 봤냐면….”
설명을 이어 가려고 할 때였다. 여운이 갑작스레 경계를 세우며 한 손을 검 자루로 가져갔다. 그의 시선은 청연의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청연도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두 사람이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 사람과 질질 끌려오는 듯한 한 사람….
“…쟤네 뭐 하는 거야?”
뒤를 돌아본 청연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으려 하는 여운의 손등을 톡톡 치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어둠 속을 뚫고 나온 두 사람은 무호와 제하였다. 무호는 한 손으로 제하의 뒷덜미를 잡은 채였다. 제하는 그에게 단단히 잡혀 발버둥 치며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놔! 이거 안 놔?”
살짝 쉰 듯한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잔뜩 화가 난 데다 경황이 없어 아직 청연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가오던 무호와 청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냉랭하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일까.
그는 한 걸음 앞에 멈춰 서 청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손을 휙 휘둘러 제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청연은 자신의 발치에 나동그라진 제하를 보고 놀라 외쳤다.
“왜 그래!”
그 목소리에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제하는 고개를 들어 청연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휘둥그레지고, 눈가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객주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청연의 다리를 더듬거렸다.
“…객주님!”
그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 청연은 허리를 숙여 그를 달래 주려고 했다. 그러자 무호가 소매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청연에게 건네주었다. 작은 칼 한 자루였다.
“죽여.”
“어?”
“이놈. 찢어 죽이라고.”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니….
청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가 건넨 칼을 도로 돌려주고 제하의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커다란 강아지 한 마리가 몸을 구깃구깃하게 접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이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제가, 제가 잘못, 했어요…. 저, 때문에….”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바보야.”
들썩거리는 제하의 등을 토닥여 주고, 무호의 매서운 눈길을 견뎌 내고, 검을 뽑을락 말락 하는 여운을 말리느라 청연은 몸이 세 개여도 부족했다.
한참이 지나 드디어 진정한 제하는 히끅거리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얼마나 운 건지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걸 알아차린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객주님, 몸이… 얼굴이….”
“…….”
“단전… 이게 어떻게….”
제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청연의 몸을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자 그를 걷어차려고 발을 들어 올리는 무호를 저지하느라 한 번 더 진땀을 뺐다.
“내가 그… 강물 속에서 기연을 만났어. 그래서 환골탈태… 라는 걸 해버렸지 뭐야.”
청연이 목을 긁적이며 대충 설명하자 제하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조금 전까지 울던 건 까맣게 잊었는지, 그는 기뻐하며 청연을 끌어안았다.
“그럼 이제 약 안 드셔도 되는 거예요? 자주 아프지 않으셔도 되는 거예요?”
“으응….”
“진짜진짜 잘 됐어요!”
객주님께서 건강하시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어요, 행복한 얼굴로 말하는 제하를 보며 청연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기연을 제가 대신 얻었으니, 그걸 상쇄할 무언가를 꼭 찾아 주겠노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
“그래서 쟤네들을 또 다 데리고 왔다고?”
민아가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청연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직원들도 자리를 비운 깊은 밤중,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세 사람이 한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떠나려고 하지를 않아, 어쩔 수 없이 모두 데리고 온 참이었다.
물론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검을 들고 얼어있는 두 놈, 그리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는 한 놈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청연이 자리에 없었다면 이미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였다.
“이러다 네 객잔에서 정마대전 일어나는 거 아니냐?”
“불길한 소리 좀 하지 마.”
전쟁이 장난도 아니고. 청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민아의 등을 계단 위로 떠밀었다.
저세상에서 만난 이가 제게 말했다. 전쟁이 나지 않도록 막으라고. 대체 뭘 해야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었다. 마침 마교주와 인연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간밤에 뭐 재밌는 일이라도 생기면 내일 나한테 말해 줘야 해?”
“…그럴 일 없다.”
“꼭!”
민아는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아래층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산 시간이 길어서 아직 현실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소설 읽는 기분으로 모든 걸 지켜보는 듯했다.
청연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그들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날을 세운 세 사람 사이에는 지독한 침묵뿐이었다.
“늦었는데 이러지 말고 차라리 올라가서 자는 게 어때? 다들 종일 고생했잖아.”
“세화야, 네가 제일 고생했으니까 가서 쉬어.”
긴장감 속에서 고맙게도 답을 해 준 여운에게 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들만 남겨 놓고 갔다가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너희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손님이잖아.”
청연은 손님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여운이 입을 다물었다.
“저는 손님이라고 하기에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하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약관에 이르기까지 객주님 곁에 있었으니 손님보다는 깊은 관계 아닐는지요.”
“…….”
그래. 가족 같은 관계긴 하지.
청연은 혈 자리를 꾹꾹 눌렀다. 건강한 몸도 얻었겠다, 단전도 새로 만들었겠다, 기운이 넘쳐야 당연한 일인데 고집스러운 놈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저승을 향해 걷던 길, 이들과 함께한 기억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기로 한 거지만… 그렇다고 이런 지옥 같은 사각 관계를 원한 건 아니었다.
“청연.”
그때, 다른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던 무호가 입을 열었다. 나른하게 한쪽 턱을 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청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나 목욕 좀 해야겠는데.”
“…그런데?”
“같이 할래? 지난번처럼.”
“…….”
저 미친놈이?
청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이 마교…!”
“…제하야,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객잔에서 검 휘두르면 출입 금지라고.”
그리고 교주 앞에서 자꾸 마교라고 지칭했다가는 정말 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니까.
“저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시랑. 출입 금지.”
‘출입 금지’는 그야말로 마법의 단어였다. 씩씩거리던 두 사람은 마지못해 검을 검집에 넣었다. 도발에 성공한 무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청연을 바라보았다.
저 망할 놈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먼저 두 사람을 공격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앉아 그들이 자신을 공격해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는 걸.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에 청연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발 이러지 마. 다들 체통 좀 지켜달라고.”
특히 마교주, 너 말이야.
청연이 콕 집어 눈짓하자 무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너희 진짜 잘 생각 없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먼저 주무세요.”
“너 먼저 자.”
“목욕부터.”
마침 차를 마시려던 제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찻잔을 든 손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덕분에 잔이 깨져 찻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치겠네. 괜찮아? 손 안 다쳤어?”
“안 다쳤습니다. 저, 저 후안무치한….”
이미 한번 말렸음에도 자꾸만 손을 검으로 가져가려는 두 사람 때문에 청연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차라리 검을 압수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다. 쟤들이 검 없다고 못 싸울 놈들은 아니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아.”
좋은 생각을 떠올린 청연이 손뼉을 치자 세 쌍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기다려봐. 나 없는 동안 꼼짝도 하지 말고.”
그는 단단히 당부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남은 세 사람 사이에는 더욱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이윽고 청연은 주방에서 술병 하나를 꺼내왔다.
“…그게 뭐야?”
여운이 묻자 청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들 두고 자러 갈 수는 없으니까 술이나 한잔하려고. 너는 너 할 일 해.”
“혼자 마시게?”
“응. 익숙하니까 괜찮아.”
청연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제하가 벌떡 일어나 잔을 가져왔다.
“같이 마셔요, 객주님.”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제가 마시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는 청연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잔을 채웠다. 청연은 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으나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평소 스승님의 술 상대가 되어 주는 제하는 말술이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안주라도 만들어 올까?”
“괜찮습니다.”
제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에 든 술을 꿀꺽 넘겼다. 청연도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호를 보며 물었다.
“너도 한잔할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여운이 술을 딱 한 모금만 마시게 하는 것. 그에게 술을 권하기에는 양심이 아프니, 그가 분위기에 휩쓸려 자발적으로 마실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잔 가져다줄게. 너도 원하면 마셔, 시랑. 절대 무리하지는 말고.”
몸싸움을 하도록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게 할 생각이었다. 제하와 무호는 웬만해선 취하지 않을 것이고, 여운은 한 모금만으로도 보내 버릴 수 있다. 취하면 이것저것 해 달라는 게 많아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얌전한 편이니까 얼른 먹이고 데려가서 재우자. 셋한테 시달리는 것보다는 둘이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꺼내온 술이었지만, 청연은 그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