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61화 (161/162)

161화

김기준. 일 년 전 그가 질질 짜며 걸어가던 CCTV 화면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선했다. 하윤이 약속을 어기게 만든 새끼. 그렇게 생각하자 이렇게 뻔뻔한 인간이 또 없었다. 설사 김하윤이 처음부터 지키지 않을 작정으로 자신과 약속했다 치더라도.

어쩌면 늘 그렇듯 비겁하게 탓할 인간이 필요했을지도 몰랐고.

“……!”

김기준은 무경의 주먹 한 방에 나동그라졌다. 그의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짓이에요!”

무경을 알아본 김지하가 무경에게 소리 질렀다. 김기준의 모친이 김기준을 감쌌고, 그의 부친이 무경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말려 보려는 것 같았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경은 김기준의 부친을 매달고도 아무런 제약 없이 김기준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다.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벌였어?”

“이, 이이! 이……!”

“저리 가세요! 우리 오빠한테 손대지 마세요!”

“무경아, 왜 이러니? 어? 말로 하자? 어?”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 있는지 말해 보라고.”

“이이!”

“네가 김하윤 거기로 불렀지.”

“……!”

“네가 그날 그랜드 파라디스로 김하윤 부른 거잖아. 김하윤은 그날 나랑 아무것도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 분을 이기기 어려웠다. 격앙되어 소리치자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지하가 울먹이며 고개를 젓고 있었고 모친이 곁에서 그만하라고 말리고 있었다. 무경은 김지하와 김기준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쌍둥이가 하나씩 맡았었나 보네?”

“…….”

“한 새끼는 놀러 가서 갇히고, 다른 하나는 그거 구해 달라고 걔를 거기로 보내고.”

틀리냐고 물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쌍둥이들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때쯤에 무경의 출현을 예감했던지, 아니면 원래부터 비치되기로 한 것인지 무장한 안전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왜 그랬어? 대답해 봐. 왜 그랬냐니까!”

“그럼 너는 왜 그랬는데!”

멱살이 잡혀 숨이 막혔는지 김기준은 벌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안전요원들은 기준에게서 무경을 떼 내려 했으나 무경은 저항하며 팔을 휘둘렀다. 마침 그를 말리려 팔을 잡았던 사람이 나동그라졌다.

“아이고고고고.”

나동그라진 사람은 일부러 더 크게 앓는 소리를 내며 무경의 주의를 끌었다.

“김기준 씨는 일반인입니다. 훈련받은 사람도 아니고 맷집도 없어요. 백무경 씨 주먹 몇 방이면 죽는단 말입니다.”

재수 없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뱀 같은 눈을 가진 남자. 박건영의 등장에 무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정신계 능력자인 그는 사람 속을 살살 긁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기껏 고생해서 살려 둔 동생, 백무경 씨가 때려죽이면 김하윤 씨가 아주 좋아하겠네요. 그쪽도 김하윤 씨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아서 김기준 씨가 싫은 거잖아요?”

“……박건영.”

“민간인 많은 자립니다. 이쯤에서 일어나시면 저희가 수습하겠습니다.”

박건영은 이 자리에 하윤의 동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무경은 짧은 한숨과 함께 기준의 멱살을 놓았다. 살려 준 줄도 모르고 김기준은 혼자 울부짖으며 씩씩거리더니 무경에게 달려들려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막았으나, 그건 무경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김기준을 걱정한 것이었다. 괜히 시선이 맞아 다시 시비가 붙을까 봐 가족들이 몸으로 그를 가렸다.

“놔 봐, 놔 봐! 이거 놔 보라고!”

“……?”

“당신은 뭐 우리 형 사람 취급이나 했어? 산송장같이 바짝 말려 놓은 거 우리가 아니라 너잖아.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형 안 죽었을 수도 있어. 그렇게 잘났었는데, 몸만 괜찮았으면 안 죽을 수도 있었어! 우린 가족이기라도 하지 당신은 뭔데! 넌 뭔데 네가 잘한 사람처럼 굴어? 당신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

“우리 가족한테서 형을 뺏어 가 놓고서는. 이 지경이 돼서도 반성 하나 없는 거, 그거야말로 사람이 할 짓이냐고! 어?!”

“기준아, 기준아 제발 그만해!”

“왜요, 지금 아니면 저 사람이랑 언제 얼굴을 본다고요. 난 안 봐요. 평생 안 볼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해야겠어요. 저 쓰레기 같은 새끼가 얼마나 개X 같은 새낀지. 말해야겠다고요.”

반성. 반성. 반성. 빌어먹을 반성.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눈앞이 벌겋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경이 몸의 이상을 느끼고 움직임을 멈추자 곁에서 숨을 헉 들이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건영이 다급히 무경을 말렸다.

눈앞의 민간인이 무경의 주먹만을 생각한다면 그는 무경의 초능력을 걱정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건물을 무너트려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민간인들은 싸움 구경하듯이 몰려오더니 동영상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박건영은 연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돌겠다고 중얼거렸다.

“우리도 이게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하, 씨발. 흐.”

기준은 무경을 향해 삿대질하다가, 울음이 났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울렁이는 목소리로 토해 내듯 말했다.

“이게 씨발, 형한테 낫다니까 그렇게 해 주려고 씨발. 그러니까…….”

“……김하윤 안 죽었어.”

한 대도 맞지 않았는데 몹시 지쳤다. 무경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다시 쥐어짜듯 말했다.

“안 죽었다고.”

김하윤은 죽지 않았다. 돌아올 것이다. 제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헤어짐이 무섭지 않다는 것을 제게 주지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무경은 김기준을 때렸던 손을 옷에 닦으며 돌아섰다. 흰 국화꽃 더미 앞에 앳된 김하윤이 웃는 사진이 있었다. 무경은 이 사진이 어떤 사진인지 알았다. 하윤이 스물넷인가 다섯쯤에 첫 취업을 준비하면서 찍은 증명사진이었다.

‘분명 나한테도 한 장 줬었는데.’

사진을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고.

무경은 형식상 갖다 놓은 빈 관을 확인한 다음 사진을 집어 들었다. 주변이 조용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국화 장식을 쓸 수 없도록 조각조각 냈다.

그가 장례식장 건물을 나서자 박건영을 비롯한 몇몇이 따라붙었다. 무경은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액자를 팔 만한 곳을 찾아 차를 운전했다. 그러나 쓸 만한 것을 파는 곳은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무경은 하윤의 사진을 더는 시커먼 액자에 가둬 둘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저렴한 가격에 다용도품을 파는 매장에 들어갔다.

이곳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어 얼른 제품을 집어야 했다. 무경은 그곳에서 익숙한 모양의 액자를 발견하고 눈가를 비볐다.

‘아, 여기서 샀었구나.’

고등교육기관을 졸업할 때, 하윤이 찾아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무렵부터 둘이서 찍은 사진이 극히 드물었다. 그랬기에 하윤은 모처럼 둘의 모습이 제대로 나온 그 사진을 매우 좋아했었다.

자신이 싫다고 던지고 액자를 망가트려도, 사진을 찢어 버려도 얼마 뒤에는 다시 사진을 뽑아 와 액자에 넣어 두었다.

‘어쩐지 사진이 번들거리고 액자가 잘 부서지더니.’

무경은 사진에 맞는 액자를 고르다가, 그것보다 작은 크기의 액자도 샀다. 사진이 없어 걸 수 있는 게 없는 액자였으나, 그것이나마 있길 바랐다.

차로 돌아가자마자 무경은 하윤의 사진을 갈아 끼웠다. 무경은 지나치게 가벼운 액자 속 하윤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맞댔다. 그러곤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 동생이 싫어.”

“아니, 그냥 네 가족이 다 싫어.”

“내내 곁에 있는 사람은 난데 그 사람들이 너를 다 가진 것처럼 굴잖아.”

그래서 그들이 부럽고 미웠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이미 서른 가까이 이어 온 것을 보면 관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고치지 않으리라.

“새파랗게 어린 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윤과 동생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던가. 두 살이었던가 세 살이었던가. 관심이 없어 잘 생각나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경은 몸을 웅크렸다. 그러다가 문득, 지나치게 불쑥 사진 속 앳된 얼굴의 하윤이 절 바라보던 날이 떠올랐다. 자신이 김하윤을 미워하는데 지쳐서 이제 그만두자며 김하윤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었다. 그때 하윤이 이 년 뒤를 말하며 자신에게 빌었다.

하지만 자신이 김기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하윤은 무경에게 넌 아무것도 모른다고 욕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어?”

“내가 많이 미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가, 왜 이 년 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는 새끼가 우스웠지?”

“응?”

“등신 새끼가 자기가 준 반지도 모르고 주제도 모르고 던져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제도 모르고. 내가.”

“……정말 하나도 모르고.”

가파르게 솟구치는 울음에 놀라 꾹꾹 누르다가 숨을 흐느꼈다. 얼마 막아 보지도 않고 터져 버린 눈물이 이제는 마냥 헤프게 느껴졌다.

지긋지긋했다.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쏟아 내고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김기준이 쏟아 낸 말을 계속 곱씹는 것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무경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알았다. 자신이 하윤을 내몰지만 않았다면, 김기준의 말처럼 산송장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하윤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후련한 얼굴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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