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며칠 뒤에 박건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무경의 집 근처로 와서 자신이 유가족에게 하윤의 장례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하윤이 일 년 전 그날 정말 훌륭한 일을 하긴 했지만, 그 일을 하기 전에 불법적인 일도 했으므로 소송에 연류될 가능성이 컸다고 했다. 돈 앞에서는 염치 불고한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지 무경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일반인이 된 무경만 해도 몇 명 알고 있었다. 그날 하윤이 그랜드 파라디스의 붕괴 직전에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면서, 몇몇은 말도 꺼내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가만히 있었으면 이십 분 안에 찌그러지거나 터져 죽었을 테지만, 그런 것보다는 하윤이 멋대로 경기도 외곽에 던져 놓은 바람에 그들은 부러진 다리와 놓고 온 재산을 아까워했다. 하윤이 나서지 않았으면 무사히 구출돼 호텔과 보험사의 보상을 온전히 받았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도 하윤이 자신의 능력이 회복되었음에도 보고하지 않은 것, 능력이 발현했다는 신고를 고의로 누락하고 김희원의 동의도 없이 정신계 능력을 사용한 것, 개인이 총기를 소지하고 사용한 것, 능력을 사용하여 건물을 파손한 것 등이 문제가 되었다.
어찌나 영상으로 잘 찍혔던지 아니라고 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박건영의 말은 김하윤이 이래저래 법적으로 엮일 일을 많이 했으므로 사태를 마무리해 놓는 게 좋았다는 소리였다. 다 같이 할 때 해야 신고든 청구든 쉬워진다고. 그러나 그건 하윤이 죽었을 때의 이야기지 살아 있을 때는 아니었다.
박건영은 다른 본론이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무경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침이 밝으면 또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갑갑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특별히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약물에 절어서 다소 멍한 상태로 그저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무경은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을 작은 컵에 쏟아 내다가, 막연히 막막한 기분에 두 손을 늘어트렸다. 수없이 삶을 끝내고 싶었다. 홀로 있는 시간을 버텨 내는 자신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나 자신을 약에 절이면서 숨을 붙여 가는 것은 김하윤을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김하윤은 죽지 않았다. 어떤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참고 기다리면 언제 떠났느냐는 듯이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맞지?”
무경은 소파에 세워 둔 싸구려 액자를 향해 외쳤다. 액자는 좌우로 까딱이며 무경을 향해 돈 다음 제자리를 콩콩 뛰었다. 무경은 차가운 눈과 달리 입꼬리를 삐죽 끌어 올렸다. 그런 다음 약이 담긴 작은 잔을 보란 듯 흔든 뒤, 내용물을 삼켰다.
이제는 혼자 하는 인형 놀이, 아니 액자 놀이가 퍽 자연스러웠다. 아주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기준을 후드려 팬지도 이미 몇 달이 지났다. 여름을 대체 어떻게 나나 했는데, 발작 몇 번 하고 격리 시설에 잠시 있다 나오자 계절이 바뀌었다. 해도 바뀌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아직 봄을 거론하기엔 멀었고 여름은 좀 더 멀었다.
“다행이지 뭐야.”
무경은 자리에 앉아 하윤의 액자를 닦았다. 하윤의 액자를 닦는 것은 무경의 몇 없는 일과 중 하나였다. 몇 번 하윤이 사던 액자를 똑같이 사서 끼웠는데, 앞이 유리가 아닌 필름지 비슷한 것이라서 자꾸만 구겨졌었다. 하는 수 없이 솜씨 있는 공방을 소개받아 비슷한 모양으로 액자를 맞췄다.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사진을 닦았다. 간밤에 남긴 수많은 지문과 각종 흔적을 말끔히 지운 뒤 고요 속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에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너는 아니지?”
이번엔 염동력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액자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안 오지. 피식 웃은 무경은 저 혼자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액자를 안아 들었다. 그러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TV를 틀었다.
뉴스에서 한 대기업의 대대적인 불매 소식이 흘러나왔다. 불매는 작년 가을, 해당 기업이 범죄 조직의 인체 실험을 지원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잠시 잠잠한 것 같다가 최근에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회장의 인터뷰가 다시 논란에 불을 지폈다. 해당 건을 인정하는 녹취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본래부터 인체 실험 지원 사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해당 기업의 연구원이 중국에 회사 기밀을 유출하려다가 체포되었고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출하려던 자료가 무엇인지 밝혀졌으며, 그것이 재작년에 있었던 사건과 연관 있다는 것도 함께 드러났다.
이것은 또 마침 초능력자 우월주의 세력의 쿠데타 시도가 적발되며 수사가 이루어지던 중에 알려진 것이었다. 해당 기업이 범죄 조직의 특정 초능력에 관한 연구를 지원했고 그 자금이 초능력자 우월주의 세력의 규모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하나를 뽑았더니 다른 하나가 나오고 또 그것들을 파냈더니 다른 건과 연결되어 있던 셈이었다. 덕분에 작년 하반기엔 자극적인 뉴스가 넘쳐났다.
“그래 봤자 좀 있으면 휠체어 타고 다니면서 쇼 좀 하다가 몇 년 안 살다 나올걸.”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 감옥에 보낼 수도 있었다. 무경은 뉴스를 비웃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안 밝혀진 것보다는 낫네.”
밝혀낸 사람도 수사한 사람도. 각자 자기 할 일은 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무경은 하윤이 남겼던 말을 떠올리다가 약효가 들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문득 자신만 가만히 고여 있다는 생각을 했으나, 이내 그것만으로도 버거워 생각을 그쳤다.
그저 오늘이 얼른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내일을 견디는 게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가만히 숨죽인 채 오늘을 견디던 중에 낯선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받지 않자 문자가 왔다. 주차하다가 무경의 차를 긁었다는 내용이었다. 무경은 괜찮다고 답장했으나, 차 상태나 보자 싶어 차 키와 하윤의 액자를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가라고 했음에도 운전자는 달달 떨면서 무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긁었길래 저러나 싶었더니 제법 시원하게 긁어 놨다. 부위도 한곳에 몰아 찍지 어찌나 분산을 해 뒀는지 차를 보자마자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보, 보, 보험사에는 이미 여, 연락을 해 뒀고요. 저, 접수 번호 나오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운전이 미숙해서…….”
무경은 저자세인 운전자와 주차장 내 CCTV 위치를 보고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CCTV에 딱 보이는 자리라 혹여 나중에 무경이 다른 말을 할까 걱정된 것이리라. 그의 명함을 받아 둔 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
그냥 서비스 센터에 가서 알아서 수리할 생각이었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보험사에 연락을 넣어 배터리를 충전하자, 수리기사가 삼십 분에서 사십 분은 시동을 걸고 있으라고 말했다.
가만히 공회전을 시키며 앉아 있는데, 업데이트하느라 한참을 회사 로고를 띄워 두던 내비게이션이 드디어 본래 화면을 보였다. 최근 목적지 목록이 떠서 습관적으로 끄려다가, 서울이 아닌 주소가 찍힌 것을 발견했다.
보험사에 차를 이송할 때 남긴 흔적인가 싶다가도 직접 내비게이션을 찍어 운전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주소를 선택하자 하윤과 함께 갔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산이 나왔다.
“어?”
무경은 조수석에 앉혀 둔 하윤의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을 담은 시선이었으나, 늘 그렇듯 액자 속 하윤은 대답이 없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볼을 톡 건들다가, 액자에 벨트를 매어 주며 말했다.
“가 볼래?”
“내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주차장에서 공회전만 시키고 있는 게 싫어서 왕복 네 시간 훌쩍 넘을 것 같은 곳을 간다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 변명 하나를 더 댔다.
“그날 너랑 세 군데 가기로 했는데 마지막 목적지는 못 갔거든. 어딘지 네가 알려 주지도 않아서. 여기가 혹시 거기일 수도 있잖아.”
늘 궁금했다. 그날 한 곳은 어디로 가려 했는지. 하윤은 그에게 서해에 가자는 말을 이따금 꺼내곤 했으니까 그곳에 뭔가가 더 있긴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먼저 열었던 타임캡슐일 수도 있었다.
김하윤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온갖 곳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던 반지가 있을 수도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산에 도착하자마자 무경이 한 것은 자신의 기운으로 산 전체를 훑는 것이었다. 산 중턱쯤 길도 제대로 없는 곳에 인위적으로 만든 공간을 발견했다. 근처로 가자 익숙한 수법으로 숨겨진 은신처를 발견했다.
총흔이 남아 있는 벽은 콘크리트가 제법 두꺼웠으므로 무경은 바닥을 두드렸다. 두꺼운 벽과 달리 바닥은 타일 특유의 소리가 나서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빈 소리가 나는 곳을 열자 생각한 그대로 타임캡슐과 비닐로 칭칭 감아 둔 노트북이 나왔다. 감은 모양이 영 어설픈 게 김하윤의 솜씨가 분명했다. 김하윤의 노트북이니 당연한 이야기일수도 있었지만.
타입캡슐 안에는 자신이 넣었던 것을 제외하면 사진 뭉치 하나가 더 들어있었다. 사진 뭉치의 제일 앞에는 예전에 함께 서해에 갔을 때 하윤이 들고 다니던 사진이었다. 당시에 그것이 한 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렸는데, 그 기억이 맞았다.
무경은 사진 뒤의 글을 읽다가, 다시 타임캡슐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건 하윤이한테 남기는 거였으니까 없다 치고 김하윤 건?’
김하윤은 저 몰래 이동해서 넣었는지 기억나진 않았다.
‘안 넣진 않았을 텐데. 나중에 뺐나?’
무경은 고민했으나 답을 줄 사람이 아직 곁에 없어 그만두었다.
집으로 돌아가 노트북을 충전하자 다행스럽게도 전원이 켜졌다. 하윤이 주로 쓰던 비밀번호를 몇 개 넣어 보자 금세 로그인 할 수 있었다.
오래 쓴 컴퓨터가 아니라 바탕화면엔 아이콘이 몇 개 없었다. 그중에 하윤이 떠났던 날이 제목으로 된 영상이 있었다.
영상을 재생하자 무경이 내내 들고 다니는 액자 속 하윤과 달리 마르고 피곤해 보이는 김하윤이 나왔다. 영상을 찍는 게 어색한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멋쩍을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을 보며 무경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화면을 더듬었다.
무경의 손끝이 하윤의 입술에 닿았을 때, 하윤이 마침내 소리를 냈다.
에필로그. 원 라스트
[안녕, 무경아. 편지를 쓰려다가 편지를 쓰는 게 너무 오래 걸려서 이렇게 영상을 남긴다. 그런데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그렇게 쉬운 건 아니네.
네가 이 영상을 볼 때쯤이 언제일지 모르겠다. 일단 봤다는 건 내가 손대지 않았을 때겠지. 그렇다는 건 내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할게.
뭐부터 말해야 할까?
난 분명 회사에서 영업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말을 논리 정연하게 못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가만히 앉아서 웃은 기억밖에 없는 것 같아. 입을 턴 건 늘 박 대리였지. 그냥 헷갈리니까 처음부터 이야기할게. 들었던 이야기라 답답할 수 있는데, 이해해 주길 바라. 뭐 네가 이해 안 해 봤자 날 어떻게 하겠냐?]
김하윤은 이제는 십 년이 훌쩍 지났던 일의 시작부터 말했다. 김득철의 팔찌, 스승 서이주의 유언, 그리고 김하윤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문을 열고, 다시 닫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었던 일, 이계에서 기어들어 온 괴수의 일부가 자신에게 봉인된 것이 그의 기억상실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추정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백무경의 모친이 이전부터 하고 있던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눈독을 들이던 이들이 어떻게 행동했고, 그 피해자 중에 김응이란 이름의 문지기와 그의 아들 김희원의 이야기도 했다.
이야기는 다시 무경이 기억을 잃은 뒤로 돌아왔다. 당시에는 지금에 알던 것을 몰랐기에 무작정 자신을 부정하는 무경의 곁에 있기 위해 실존하는 김희원의 이름을 빌려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을 잘 하기 위해서 뒤늦게 김희원의 집을 찾았다는 것.
거기서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으나 능력을 쓰지 못하는 데다 지레 겁을 먹었고 자신과 무경만이 궁금해 깊이 알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김희원은 피노키오의 수중에서 인체 실험에 이용당했고, 피노키오는 연구를 이어 나갔노라고.
그 이후에는 문지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무경이 알지 못하는 능력이라 태반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김하윤의 문지기로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다며 자신의 모친이 해 준 일반적인 이야기는 다수의 경험을 정제한 정보같이 들리지 않았다. 주관적인 경험에 의거한 이야기라 무경은 하윤이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생각하던 계획이 이루어지면 아마 나는 네 곁에 없을 거야. 뭐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원래 죽으려고 했어.]
“…….”
무경은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내장에 칼날이 돋은 것처럼 숨 하나 내쉬기 쉽지 않았다.
[그때는 앞에 말했던 걸 몰랐을 때라 나도 갑갑해서 많이 지쳐 있었어. 그래서 딱 십 년을 보고 산 거야. 그것만 버티면 네가 했던 말도 이뤄줄 수 있고, 그때쯤 가면 나도 할 만큼은 하지 않았나 싶어서. 그리고 십 년이 다 되어 갈 때쯤엔 네가 돌아오는 게 무섭더라. 내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거든.
네가 날 용서하기도 힘들 거고. 나도 그간 있었던 일을 다 없었던 일로 치고 받아들이기도 힘들 거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그리고 네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진 않았어. 사랑만 하는 거, 왜 그런 거 있잖아. 내 편이라는 걸 아니까 더 서운하고, 상대가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거. 그래, 복수보단 그런 거였을거야.
나는 김희원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걔가 너한테 접근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줄 알았어. 그 뭐 유혹 같은 거? 아, 이런 건 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어쨌든 김득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리라 여겼고 그가 손봤으니 내 눈에는 어설퍼 보여도 남들 눈엔 아니리라 생각했지. 원래 그런 거로 유명한 양반이랬거든. 그랬는데 둘이 서로를 진짜 소 닭 보듯이 하더라. 엮을 새도 없고 엮을 수도 없고. 김희원은 오히려 날 좋아하던데?]
김하윤은 멋쩍은지 카메라와 눈을 마주하진 못했으나 소리 내 웃었다.
[어쨌든 시도 했었는데 그때는 너도 알다시피 실패했지. 도무지 죽어지지가 않는 거야. 죽어야 하는데. 그러던 중에 용하다는 분이 그러더라고. 내가 초개같이 타오를 운명이래. 많은 사람을 구하고 죽을 팔자라는 거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마당에 얼마나 반가운 말이었겠어.]
“…….”
[그런데 그때쯤에 네가 기억을 잃은 이유가 뭔지 대강 눈치채 버린거지. 그럼 내가 너를 어떻게 미워하고 어떻게 복수를 하겠냐. 그런데 이미 나는 이미 내가 살 힘을 다 써 버리고 난 뒤였던지. 죽긴 죽어야 하는데 널 살리고 죽을 수 있으면 호상 아니겠나 싶더라. 너도 아마 다른 이유가 뭐가 더 있건 날 살릴 수 있다면 그랬을걸? 뭐……. 기억이 돌아온 뒤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하윤이 죽으려던 이유는 없어졌으나 죽어야하는 이유는 생겼다.
어지간해서는 백무경을 버릴 수 없었던 김하윤이 무경을 버릴 수 있었던 이유.
무경을 살릴 수 있다는 것.
무경은 그날의 하윤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다. 어떻게 그 세월을 둘이 있을 수 있어 좋았노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후련하게 갈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 거냐 하면. 내가 힘을 잃었을 때와 문지기 선배의 힘을 얻을 때의 경험에 의거하여, 나는 [문]이 될 거야. 난 김득철이 팔찌로 만들었던 곡옥으로 깨지고 사라진 [문]들을 수복한 적도 있거든. 그걸 보면 이 [문]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아. 아마도 문지기들의 생명과 관련 있지 않겠나 하는 게 내 결론이야. 물론 [문]이 되기 전에 눈치 없이 자꾸 찾아오려는 손놈도 쫓아내고. 그게 문지기의 역할 아니겠어?
그래도 영상이 삭제되지 않고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내 계획이 성공했다는 거겠지? 어때? 내가 잘 해냈어?]
무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은 의미와 달리 하윤은 잘 해냈다. 세상이 모르든, 알고서도 잊었든 간에.
[무경아.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조각 뭐 별거 없더라. 날 보면 알잖아. 지금은 힘들더라도 그거 잠시야. 살려면 살아지더라. 그래서 그게 겁나기도 했고. 뭐, 안 힘들다면……. 그럼 다행이고.]
눈앞이 흐려져서 도무지 화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만약에 정말 힘들어서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럼 나를 찾아. 조각이 별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통 조각을 말할 때 운명 말하는데 우리가 운명으로 엮인 사이라면 어쨌든 무슨 일이 있든 다시 만나게 되어야지 않겠어?]
[시험해 보자. 우리의 조각으로서의 운명이 초개같이 타올라 사라질 운명을 이기는지.]
[나를 찾아 무경아. 그리고 나를 불러. 네가 나를 부르면 난 그건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
“이것도 거짓말이지!”
그저 제 숨을 오래 붙여 놓으려는 수작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놈의 [문]을 찾든 김하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무시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무경은 운명이란 말을 믿기로 했으니까.
◇◇◇
유독 볕이 누런 가을이었다.
무경은 전국 지도와 컴퓨터를 옆에 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펼쳐 둔 전국 지도에는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예전엔 쓰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안경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올리면서 머그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울여도 커피가 입술에 닿지 않았다. 그제야 잔을 비운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
무경은 바닥에 쌓아 둔 책과 종이들을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다. 가까스로 종이의 협곡을 벗어나 주방으로 나온 그는 에너지바와 커피를 챙겼다. 다시 방 안에 들어가려니 TV를 보라고 소파에 앉혀둔 하윤의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무경은 쌓이지도 않은 먼지를 털며 다시 액자를 세워 준 다음, 말을 걸었다.
“왜, TV 재미없어? 다른 거 틀어 줄까?”
뭘 보면 좀 좋아하려나. 무경은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평일 오전 중이라 딱히 재밌어 보이는 건 없었다. 예능 재방송이나 틀어 줄까 하다가, 낯익은 영화를 발견했다. 명절에 자주 방영되는 고전 액션 영화였다.
전형적인 악당과 전형적인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나오는.
위기에 빠졌던 주인공이 스승이 남긴 유언을 통해 각성하고, 주인공은 도시를 위협하는 괴수를 쓰러트린다. 그러나 아뿔싸! 그 틈에 주인공과 연인이 적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연인은 주인공이 위험을 자초하지 못하도록 악당과 함께 빌딩에서 뛰어내린다.
연인은 진정한 힘을 각성한 주인공이 나타나 구해 주지만, 비행 능력이 없었던 악당은 땅에 처박혀 곤죽이 된다.
무경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인공과 그의 연인을 보며 머그잔을 기울였다. 이제 정해진 차례처럼 그들은 인근 빌딩 옥상에 내려 기나긴 입맞춤을 할 것이다.
그들의 입맞춤에 맞춰 무경은 액자 속 하윤에게 입을 맞췄다. 일부러 쭉 소리가 나게 했더니 유리에 입술 자국이 남았다. 무경은 작게 웃고는 다시금 말을 걸었다.
“너 저 영화 좋아했는데. 그렇지? 좀 더 일찍 틀어 줄걸.”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썩 재밌는 영화는 아니었다. 당시로 볼 땐 스케일이 큰 블록버스터였으니 그 재미로 봤을까? 그게 아니면 배우가 좋았나? 이건 좀 문제가 됐다.
“그런데 저 영화 왜 좋아했어? 혹시 누가 네 취향이었어?”
남자 배우였을까, 여자 배우였을까. 일단 남자인 자신을 좋아하긴 했으나 그쪽 취향인가 싶다가도 예전의 하윤이 바랐던 교제 대상을 생각하면 방심할 수 없었다.
무경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바람 소리를 냈다. 질투든 뭐든 일단 하윤을 찾아야 할 수 있었다. 무경은 패널을 돌린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종이의 협곡 사이를 지나 본래 자리에 앉아 들여다보던 부분을 체크했다.
김하윤이 [문]이 된 자신을 찾으라고 한 뒤로부터 삼 년이 지났다. 그동안 무경은 [문]에 관한 것을 배웠다. 다만 아직 이룬 경지는 하잘것없었는데, 기초부터 시작한 탓이 컸다.
하윤이 남긴 자료가 있었으나 그는 본디 천재라고 일컬어질 만한 능력을 갖췄기에 초심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그가 남긴 단서 하나 역산하는 것만으로도 따라가기 버거웠다.
다만 좋은 점은 버거운 만큼 하나에 집중하면 시간이 잘 간다는 것이었다. 내일이 오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도움이 됐다.
김하윤이 자신의 숨을 붙여 놓고자 부린 수작이라면 칭찬해 줄만 했다.
다만 무경은 운명을 믿기에 하윤에게 칭찬 대신 욕을 했다.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것으론 네가 바랐던 연구는 까마득하다고 말이다.
‘대체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 ‘뚝딱?’이라고 말할 새끼.’
하지만 그래도 됐다. 뭘 말하든 좋았다. 저보고 징글맞다고 해도 되고, 이상한 소리를 내도 됐다. 그냥 살아서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거면 족했다.
“…….”
문득 불안이 밀려왔다. 자신이 사는 동안에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에서 솟구친 불안.
무경은 현재 하윤이 사건 당시 GTS에 특정해 줬던 구역 좌표를 역산하여 당시 이 세상과 겹쳤던 세상의 궤도를 정리하고 과거의 기록과 대조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하윤이 당시 사라졌던 곳에만 가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김하윤이 늘 쉽게 말해서 몰랐으나 생각보다 형태가 다양했다. 움직이는 것도 고정된 것도 있었다.
하윤이 말했던 대로 자신이 그를 찾을 수 있다면 [문]이 된 하윤의 형태는 지금도 움직이는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당시 하윤이 그곳을 짚었던 이유를 되짚어 가며 특정 문을 찾고 그 문의 궤도를 찾아보는 중이었다.
누군가 그게 무슨 소리냐 해도 무경은 이젠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자신도 처음 들었을 땐 무슨 소린가 했으니까.
‘그런 게 있지.’
무경은 프로그램상에 나타난 좌표와 실제 위치가 어딘지 확인하다가, 어긋난 결과값에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계산상의 위치가 맞지 않았다. 무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들이켜다가, 문득 예전에 하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그가 문을 섞었다고 말했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더라?’
차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김하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월암에 가기 전, 김하윤은 이상한 게 자꾸 기어들어 와서 뭔가를 휘저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좌표를 입력한다고 했었다.
“김하윤 노트북.”
무경은 허겁지겁 하윤의 노트북을 꺼냈다. 자신이 컴퓨터에 깔린 프로그램의 프로토타입 버전으로 보이는 구식 아이콘을 클릭하자 로그인 창이 떴다. 두어 번 실패했다가, 발상을 바꿔 모친이 쓰던 번호를 넣으니 그제야 로그인이 됐다.
내내 자신이 보고 있던 좌표를 검색하자, 자신의 컴퓨터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나왔다.
◇◇◇
정신없이 집을 뛰쳐나왔다. 신데렐라라도 된 양 신발 한 짝을 날려 버리기도 했고 손이 떨려 차 키를 놓칠 뻔도 했다. 미친 사람처럼 [문]의 좌표와 이를 해석한 위치를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그가 계산한 곳은 고층 빌딩과 호텔이 뒤섞인 곳이었다.
상시로 교통 체증이 심한 곳답게 길이 막혀 무경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쯤엔 손이고 발이고 덜덜 떨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고층빌딩의 옥상은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므로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진정해.”
진정하라는 목소리마저 덜덜 떨렸다. 이 순간만큼 자신이 초능력자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문을 열고 나가니 세찬 바람이 그를 맞았다.
오늘에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결말을 맞자. 실망을 대비하여 과한 기대를 하고 싶진 않았으나 심장이 먼저 쿵쾅거렸다.
노란빛이 어린 바닥을 보며 무경은 입을 열었다.
“하윤아.”
하윤아, 난 운명을 믿어. 예전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뱉는 순간, 이상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김하윤이 지나다니는 [문]에서 느끼던 그 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노려볼 때,
정말로 김하윤이 나타났다.
무경은 떨어져 내리는 김하윤을 받아 냈다. 품에 안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윤은 그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젖은 옷, 귓불이 날아가 피를 흘리는 데다, 이상하게 한쪽 팔이 흐릿했다.
“……왜 이제 찾았어? 내가 안 보고 싶었어?”
울지 않으려 했는데 울음이 났다. 무경은 목 놓아 울며 하윤을 힘껏 끌어안았다.
“너 찾는 게 개같이 어려웠어!”
하윤을 다시 찾게 된다면, 뻔하다고 깎아내렸던 그 영화처럼 입 맞추고 싶었다. 뻔하디뻔한 해피엔딩처럼. 다른 결말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상과 달리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으나 아무렴 좋았다. 하윤만 있다면 저는 뭐든 상관없었으니까. 그래, 이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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