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열일곱 이전의 [기억] 속 무경은 싫어하는 것들은 많고 좋아하는 것은 적은 사람이었다. 이 모든 싫고 좋음이 대부분 한 존재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무경은 그 아이를 세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아이의 세상이 미웠다. 그 아이의 세상에서는 자신이 타인과 같은 존재일까 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무경은 [기억] 속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도무지 자신의 기억과 생각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열일곱 이후의 ‘기억’에 의거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부정했다가, 고작 몇 번의 부정과 언뜻 떠오른 [기억]으로 손쉽게 와해되길 반복했다.
이런 것이 정신 착란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착란이라고 한단 말인가. 망상이 아닌 [기억]이라고 구분이 가능해진 이래로 무경은 혼란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한 그를 어지럽히는 혼란이 기억 속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유리시켰다.
자신의 기억이지만 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자기 모습을 하고 있으나 자신이 아니다. 그래, 아예 다른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현재 무경에게는 불가해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과거에 이상한 새끼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미친 새끼.’
그러나 이렇듯 생각을 정리했음에도 생각과 마음이 불쑥거리는 때가 있었다. 그야말로 영문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솟아서 마음을 뒤집고 생각을 뒤집었다. 자신이 이상한 새끼라고 정의했던 놈이라도 된 양, 모든 감각을 김하윤에게 집중하고 그를 탐냈다.
곁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만지고 있으면 하나가 되고 싶었다. 입버릇을 놓지 못한 어린애같이 깨물고 핥고 싶고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웃게 하고 싶었고 울게 하고 싶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전엔 느끼지 못한 욕구가, 탐욕이 자꾸만 솟아났다. 자꾸만 불어나는 탐욕이 어느 순간에 자신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이제는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
퇴근 준비를 마치자마자 무경은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먼저 퇴근한 김하윤이 중간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분명 땅을 딛고 있는데도 발걸음이 허공을 헤매는 것 같았다.
두 건물의 중간 지점인 데다 외부에서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오가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머리꼭지를 발견하는 순간에, 그 공간에 오로지 김하윤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낯설고 이상한 감각이어야 할 터였으나, 도리어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
김하윤은 자신이 자기를 보는 줄도 모른 채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던지 휴대 전화 화면에 고개를 밀어 넣을 것만 같았다.
문득 김하윤을 놀라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인 채 다가가다가 올라간 입꼬리가 낯설어 얼굴을 비볐다.
장난이라니. 김하윤과 자신 사이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김하윤이 자신에게 장난을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어떻게 했느냐면…….
“…….”
기어오르지 말라고 벽으로 밀치고 머리를 짓눌렀다. 김하윤이 자신의 힘을 견디다 못해 몸을 구부리고, 바닥에 주저앉게 했으나 이도 모자라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눌렀다. 자기 손 아래에서 뻣뻣하게 견디던 모습이, 틀어쥐었던 머리칼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았음에도 뜯긴 머리칼이 남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경은 재빨리 손을 비벼 털어 냈으나 불쾌한 감촉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침을 꼴깍이는 사이, 김하윤이 어느새 가까워진 그를 발견했다.
“무경아. 오늘은 일찍 왔네.”
“……그래.”
목과 뱃속을 베인 느낌이 났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팠다. 그러나 무경은 익숙하게 태연함을 가장했다. 오랜 훈련으로 만들어진 버릇이기도 했고 김하윤에게 자신의 가책을 들키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김하윤은 무경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었다. 바로 뒤에 선 것도 아니고 대각선으로 서서 남들이 봤다간 일행이 아니라 그냥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맞는 일인데도 자꾸만 고개가 돌아가려 했다. 아니, 고개만 돌아가면 다행이었다. 손과 몸이 자꾸만 김하윤을 향해 틀어지려 했다.
맞은편에 사람이 오자 김하윤이 이미 피하고 있는데도 그를 자신의 뒤로 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놀랜 김하윤은 무경의 손을 피해 몸을 돌렸다. 김하윤을 잡으려던 손이 옷 끝만 스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경은 숨을 크게 들이켜다 불이라도 피어오른 것 같은 속에 눈을 깜빡였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해가 길어져 아직 사방이 환할 텐데도 컴컴하게 느껴졌다. 차에 올라탄 뒤에 무경은 곧장 문을 잠갔다. 차갑고 저린 손을 몰래 주무르다가 김하윤을 힐긋 바라보았다. 무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그냥, 물어보는 거 조금 이야기했지. 여전히 다들 바빠서 마주할 시간이 없더라. 그러다가 탕비실 음료랑 간식이나 좀 주워 먹었더니 퇴근 시간이더라. 아, 그리고.”
“……?”
“조만간 희원이랑 자리를 마련할 거래. 김희원한테 확인받고 싶은 게 있는데, 김희원이 그걸 보는 방법을 몰라서 나보고 훈련을 도와줬으면 좋겠대.”
“많이 바쁘긴 바쁜가 보네. 진작 나온 이야기를 이제야 전하는 걸 보니.”
하윤이 자문으로 배치된 기간은 이 주 남짓. 이제 한 주가 끝나가니 남은 건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업무량이 많아 하윤을 불러 놓고 자문을 구하는 시늉만 할 것이라는 기존의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 아예 김희원과 만나지 않았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 여력은 짜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여력이란 말과 짜낸다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
그저 궁금한 것만 조금 알아내는 정도면 됐다. 무경은 하윤이 일에 너무 깊이 관여되지 않길 바랐다. 일반인 신분이라는 것도 하윤이 가진 고유 능력도 자칫 문제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무경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 숙인 하윤을 보고는 답을 재촉했다.
“알겠어.”
그러자 하윤은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경은 하윤의 시원찮은 대답에 그를 노려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김하윤은 다시 생각에 잠겨 이를 신경 쓰지 않았으나 정작 건드린 무경의 가슴만 철렁였다.
하지만 가슴이 철렁인 것과 별개로 더 만지고 싶었다. 더 닿고 싶었다. 추행에 미친 변태 새끼나 다름없었다. 무경은 자동차 핸들을 쥐며 자꾸만 다른 생각을 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손만 닿지 않았을 뿐, 무경이 얇고 넓게 펼친 힘의 장막이 수도 없이 하윤을 오롯이 감쌌다.
김하윤은 그의 힘이 몸 안으로 스미지 못하도록 밀어냈다. 덕분에 이처럼 힘으로 감싸고 있으면 그의 움직임을 도리어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경은 운전하는 내내 하윤의 움직임을 좇았다.
눈의 깜빡임, 들썩이는 가슴팍, 휴대 전화와 차창 밖을 번갈아 바라보는 고갯짓. 이따금 입술을 짓씹는 움직임까지.
더 자세히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경은 하윤에게 힘의 장막을 계속해서 덧씌웠다. 집에 도착할 때쯤 하윤에게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버거워할 만큼 힘이 쌓였다. 능력이 통하는 상대였다면 아주 간단히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하윤은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그의 힘은 여전히 아무 작용도 할 수 없고 그저 김하윤의 움직임을 따라 밀려날 뿐이었다.
김하윤은 자신을 뒤덮은 무경의 힘과는 별개로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지 단번에 떠올랐다. 차 안에서 나눴던 짧은 대화에 답이 숨어 있었으니까. 별 생각 없이 퇴근 시간이 임박했을 무렵 주워 먹은 주전부리가 문제였으리라.
자신의 옆에선 아무것도 주워 먹지 못하면서.
사람이 아픈 일인데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차를 타기 전임에도 입에 뭔가를 넣을 정도로 김하윤이 풀어져 있던 상태였다는 것. 또 자신의 곁에선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서 그들과는 먹었다는 것. 그리고 또 이렇게 아프면서도 자신의 곁에 붙어 있는 김하윤이, 함께 있으면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데리고 다니는 자신이 미웠다.
반면에 또 아프면서도 미련하게 곁에 함께하는 김하윤이…….
“…….”
미련한 김하윤이 좋았다.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싶을 정도로.
자신은 미친 게 틀림없었다.
◇◇◇
김하윤은 주차장에 내릴 때는 희게 질리다 못해 파랗게 보이다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 갔다. 속이 안 좋은 게 눈에 보이는데 왜 방에 갔을까. 그것은 김하윤이 방문을 열면서 빌어먹을 [문]을 열고 어디론가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김하윤의 기척에 무경은 하윤의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새 잠그고 간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열리지도 않는 문손잡이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문고리가 부서지기 전에 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인 염동력이 문의 잠금장치를 부쉈다.
힘없이 열리는 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무경은 텅 빈 방 안을 훑어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알다시피 김하윤은 그곳에 없었다. 무경은 휴대 전화로 하윤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하윤은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경은 자신이 심지에 불이 붙은 초가 된 것 같았다.
누군가 이미 불을 붙였고, 그 불은 무경을 태우며 녹이고 있었다. 무경은 숨을 고르며 하윤의 방을 나왔다. 마술이라도 부리듯이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면 김하윤이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문을 여닫았다.
계속된 연락 시도로 휴대 전화가 뜨거워졌을 때, 비로소 바닥에 발 디디는 소리와 함께 김하윤이 문을 열었다.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데 어처구니없이도 별다른 말 하나 꺼내지 못했다. 여전히 창백한 김하윤의 낯빛 하나 때문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러다가 고작 꺼낸 말이 왜 그랬냐는 말이었다. 저야말로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왜 이러냐고. 늘 그렇듯 답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기야 알았다면 자신도 이렇게 등신같이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