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하윤은 꽤 오랫동안 여름이 오지 않길 바라서 내내 지긋지긋한 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노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여름이라도 느낄 만한 날씨가 와 버리더니, 첫 출근을 하는 날에는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볕이 따가웠다.
아직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볕이 대신 울음을 뱉는 것만 같았다. 하윤이 멍하니 차창 밖을 보고 있자 무경이 재차 빠진 것이 없는지 살폈다.
“안에 들어가면 쓰고 있던 스마트워치랑 휴대 전화는 제출해야 해. 대신에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 전화를 줄 건데, 인터넷은 되긴 하지만 워낙 제한적이고 기록도 남기 때문에 이상한 짓은 하지 마.”
“에이, 애도 아니고. 그런 짓을 내가 왜 해.”
“아랫도리 달린 새끼들 멘트가 다 그거야. 그리고 꽤 많이 걸리고.”
“…….”
“대신 밖에 나오면 바로 스마트워치 찾아서 차고 있어. 안 차던 거라고 또 까먹고 오지 말고. 각인도 새겨 놨으니까 찾기 쉬울 거야.”
“각인 넣으려면 꽤 오래 걸리던데 언제 주문한 거야?”
“산 건 얼마 안 됐어. 각인은 바로 해 주던데?”
하윤은 각인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시계를 뒤집었다. 차고 있는 상태라 살짝만 들린 탓에 제대로 확인하진 못했다. 다만 무경이 있다고 했으니 그러려니 했다.
‘휴대 전화도 있고.’
무경은 하윤이 퇴원한 날 집에서 하윤이 보는 앞에서 그의 휴대 전화를 해체했다. 휴대 전화 자체 기능만 켜 놓기는 미덥지 않다는 게 이유였는데, 하윤이 알겠다고 하자마자 기계를 냅다 열더니 그 안에 위치 추적기를 삽입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스마트워치까지 채워 놓고 늘 끼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물론 스마트워치는 건강 확인을 위해서라는데, 사용해 보지 않아 진위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무경은 그 외에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준비해 놨다. 하윤은 자신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입학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릴 때 같았다. 초중고등 교육기관에 입학할 때. 그때도 무경은 이와 비슷하게 굴었다. 하윤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신경 써 놓고도 입학 자체는 못마땅하게 여기던 행동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하윤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싫어한 것이다.
혼자 몰래 울고 스트레스를 받아 열을 낼 정도로. 물론 지금의 무경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얼굴을 찡그리고 가던 길을 돌아와 하윤을 빤히 바라본다든가 할 뿐.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준비한 것들을 자신이 준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몇몇 물품을 빼고 하윤이 어디서 사 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굴었다.
하윤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숨이 턱턱 막혔다. 언제 무경이 괴수한테 먹혀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차는 이른 시간에도 교통 체증으로 잠시 묶였다가 다시 한산한 도로를 달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도착해서는 복잡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하윤은 이 과정에서 휴대 전화와 스마트워치, 무경에게서 받은 서류 일체를 제출했다.
그 결과 묵직하고 사용감이 많은 휴대 전화와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이 임시 출입증에는 사용 기간과 출입 가능한 장소가 정해져 있었다.
무경은 하윤과 정문에서 내려 준 뒤 다른 건물, 초인특수관리청으로 갔기 때문에, 하윤은 사전에 그가 알려 준 부서의 사무실로 움직였다.
‘특수재난관리청 정보지원과. 정보지원…….’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 있는 표를 보고 하윤은 층을 찾았다. 정보지원과라는 글씨가 어찌나 구석에 있는지 한 번에 알아보기 힘들었다. 멋들어진 디자인이 들어간 폰트로 적힌 것 옆에 작은 글씨로, 그것도 층을 나뉜 채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층에 내렸을 땐 익숙한 냄새가 하윤을 반겼다. 숨겨져 있던 서이주의 방에서 나던 냄새, 김희원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갈 때 맡았던 냄새였다. 같은 바닥재를 쓰기 때문일까? 하윤은 슬쩍 바닥을 보다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꼽사리 낀 글씨처럼 정보지원과는 타과의 옆에 붙어 있었다. 멋들어진 창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옆에 누리끼리한 가벽으로 나뉘어 있었다. 복도도 자료를 적재하느라 다소 좁게 쓰고 있었는데 처음 방문한 소감으로는 오래된 책방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안에는 이른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머리가 떡져 있고 책상에 제대로 앉아 있지도 않았다. 몇몇은 책상에 엎드려 있고 또 몇몇은 턱을 괸 채로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나마 서 있는 사람들은 죽은 눈으로 벽에 기대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 출근한 게 아니구나.’
날이 밝은 시간까지도 퇴근을 못 했구나……. 다만 속단하긴 일렀다. 이래놓고 교대 근무라 이제 곧 출근하는 다른 사람과 교대할지도 몰랐으니까.
“으 썩는 내 난다, 썩는 냄새가 나. 샤워실에서 샤워 좀 하고 와. 사흘 밤새운 거 티를 내지 말고.”
“어? 그거?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표현? 자제 부탁드립니다. 이런 건 티를 내야죠. 그래야 일을 덜 시키지!”
“그런 거 상관없이 시키려고 왔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럼 견디십시오!”
밤을 새운 부작용으로 말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이, 그, 저, 어, 하는 것을 보니 며칠 연속으로 퇴근을 못 한 게 확실했다.
‘국가기관인데 사람을 이렇게 굴린다고?’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윤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자신이 고민한다고 해서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냥 배정된 곳으로 가면 될 일이었다. 다만 배정된 곳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게이트 정보지원과의 게이트 데이터 센터를 찾지 못했을 뿐.
결국 하윤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잡고 물어봤다.
“아! GTS! 아, 이쪽으로 오세요. 근데 새로 배정된 분이세요? 신입은 배정 끝난 거로 아는데.”
“자문……위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아. 아……. 그렇구나.”
알겠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안내해 준 사람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사라졌고, 하윤은 GTS라는 곳 앞에 섰다. 다른 과는 천장에 팻말이라도 달렸지만, 여기는 파티션에 종이 한 장만 덜렁 붙어 있었다.
파티션 안에는 책상이 네다섯 개가 놓여 있었고, 중앙에는 불편한 의자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은 연식이 제법 되었는지 초록색 부직포를 깔고 그 위에 유리를 올린 모양새였다. 컴퓨터는 켜져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하윤은 중앙 테이블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를 길게 땋은 여자가 들어와 켜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뒤늦게 하윤의 존재를 알아차려 화들짝 놀랐다.
“아이, 깜짝이야! 누구세요?”
“아, 저 자문위원으로 온 김하윤이라고 합니다. 여기 서류.”
“아……. 아. 잠깐만요. 진정이 안 되어서요. 후우, 후.”
여자는 긴 숨을 내쉰 다음 하윤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류에 붙여 둔 증명사진과 하윤을 번갈아 보다가, 그가 쓴 이력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력이 좀 특이하시네요. 고등기관은 중퇴하신 모양이고.”
“네, 일반고로 다시 진학했습니다.”
“그럼…….”
“그때쯤에 능력이 없어져서요.”
“아…….”
탄식이 이어졌다. 아마도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려웠으리라.
“아, 일단 인사부터 해요. 저는 이주미예요. 이 주사라고 하면 되는데, 김하윤 씨는 그냥 씨로 부르면 돼요. 어차피 여기 사람도 아니고 외부인인데. 다만 서동호 주사님만 팀장님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저희 팀장님이신데, 호칭에 예민하시거든요. 정말 왜 그런지 몰라.”
“예에.”
“그럼 그 뭐냐. 죄송해요. 제가 지금 밤을 좀 새워서 말이 좀 그래요. 그 뭐냐. 그럼 그 능력이…….”
“텔레포터였습니다.”
“아, 그럼 김하윤 씨의 선생님이 혹시…….”
“예, 서 이 자, 주 자 되십니다.”
“아휴, 대단하신 분 밑에서 수학하셨네요. 아 중퇴면 실무를, 이쪽 일을 하신 적은 없다, 그쵸?”
“네. 아무래도 어렸기에.”
“아…….”
“하하, 음.”
“…….”
“…….”
이주미와 하윤은 둘 다 멋쩍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주미였다.
“원래도 일이 많긴 한데 지금 우리 부서 전체가 일이 정말 많아서요. 하윤 씨는 아마 서 주사님이 맡으실 건데, 조금 신경 써 주기 힘드실 거예요. 일이 너무 갑자기 덮치는 바람에 비상이라 어쩔 수 없는 거거든요. 양해 부탁드려요. 그리고 저…….”
“아, 네.”
“일 좀 해도 될까요?”
“아, 네네.”
“거기 있는 사탕 편하게 드셔도 돼요. 신문도 읽으셔도 되고. 관심 있으시면 옆에 사보도 있으니까.”
“네.”
하윤이 대답하기 무섭게 이주미는 돌아서서 컴퓨터 화면을 보기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출근 시간이 되자마자 전화가 숱하게 걸려 왔다. 이주미는 몇 번 받다가, 또 몇 번은 거르고, 또 몇 번은 받기 전에 욕설을 중얼거렸다.
팩스도 쉼 없이 들어왔다. 저만 빼고 다 바빴다. 하윤은 멍하니 있다가 테이블에 있는 사탕 바구니를 뒤졌다.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사탕 껍질이었다. 껍질을 빼고 보니 오렌지 맛 사탕만 남았다.
하는 수 없이 오렌지 사탕 한 알을 까먹은 하윤은 사무실 내 책상들을 살폈다. 책상 위에 놓인 파일들이 어째 꽤 눈에 익었다. 사무실에서 쓰는 파일 색이 대부분 노랗고 파랗거나 그도 아니면 검은 덕분이겠으나, 파일 등에 적힌 이름도 그랬다.
2003년 길 등록명부(1)
“아, 여긴 또 빵꾸가 나네. 뭐야 이게, 다 틀어져선.”
이주미의 중얼거림에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책상에도 길 등록명부가 있었고, 모니터에는 지도가 떠 있었다. 다만 일반적인 지도와는 달랐는데, 그녀가 스프레드시트 같은 곳에 뭔가를 입력하면 지도에 표시가 되는 형식이었다.
지도는 여러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2D, 3D뿐만 아니라 조금 다른 모양으로도 지원되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것도 3D라고 할 만했다. 천체처럼 구체를 두르는 듯한 모양으로 출력이 되었으니까.
“…….”
왜 여기로 보냈나 했더니 자신과 영 연관이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윤이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기려 할 때쯤,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막 대학 졸업한 것 같은 남자 하나를 뒤에 달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 아이고야, 오셨네?”
“안녕하십니까.”
“서로 인사는 했어요? 우리 이 주사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서 주사님 저 낯 안 가려요. 그냥 사람이 싫은 거지. 인사는 보자마자 했죠.”
사람이 싫다고는 했지만, 이주미의 눈은 서 주사만 싫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익숙했는지 서 주사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젊은 남자를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 신입 최현진. 이제 딱 한 달 됐지. 그리고 여기는 김…….”
“김하윤입니다.”
“어어, 그래. 김하윤 씨. 이 친구가 대단한 친구야. 어렵게 모셨다고. 미궁관측연구소 서이주 소장님 밑에서 배웠다고. 우리가 잘만 하면 아주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김하윤 씨도 잘 부탁해요. 우리가 너무 물어본다고 너무 귀찮아하지 말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