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물어본다며.’
하윤은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채 서 주사가 첫 만남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주 많은 걸 할 것처럼 말하더니 그는 어느새 자리에 없다. 의도적인 따돌림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나 바빠 보였으니까.
지금은 비어 있었지만 다섯 개의 책상은 모두 주인이 있었다. 소개 나눴던 셋을 제외한 둘은 열 시가 다 되어 갈 때쯤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 둘은 하윤을 소개하는 서 주사의 말에 고개 한번 꾸뻑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컴퓨터를 켰다. 화면이 켜질 때까지 마우스를 흔들다가, 이주미와 같은 프로그램과 메일을 켰다.
그러고는 “파일이이 어디 있나아아아.” 하고 타령하듯이 말하며 파일을 찾더니 또 한숨을 내쉬었다. 둘뿐만 아니라 이주미도 아침부터 하던 행동이라 하윤은 행동 강령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하윤이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눈만 깜빡이는 사이,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그러다가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주미도 신입과 함께 회의하러 떠나 버리고 말았다. 미안해하는 이주미에게 괜찮다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하윤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세 시 반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그래,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래도 괜찮은 건지.’
아무리 자문위원에다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 유명인인 무경이라고 해도 외부인은 외부인 아닌가. 보안을 중요시한다고 겁을 그렇게 줘 놓고 막상 안에 들어오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해서인가. 그게 아니면 봐도 일반인은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해서인가.’
잠깐 앉아 있는 것으론 GTS의 업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대충 컴퓨터 화면을 훑어본 결과 미궁관측연구소의 과거 자료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한편, 현대 기술로 관측한 자료를 함께 취합하여 전산에 등록하는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다들 작업하느라 바빠 각종 자료를 마구잡이로 쌓아 두었다. 심지어 돌아와서 마저 작업하겠노라고 펼쳐 둔 것도 있었고, 이면지로 복사한 종이들도 많았다. 하윤은 앞에 아무것도 두지 않고 있는 게 민망해 이면지 하나를 뽑아 왔다가, 그 안에 빼곡하게 들어가 있는 지방 좌표를 보며 아연했다.
그들이 당장 사무실에 둔 자료 중에는 하윤이 가진 것도 있었고, 가지지 못한 것도 더러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윤은 사무실이 사무실이 아니라 참새가 들린 방앗간 같았다. 다만 GTS의 사무 공간에만 사람이 없을 뿐,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는 탓에 마구 펼쳐 놓고 볼 수 없었다.
‘아, 그래도 궁금한데.’
기왕이면 첫날부터라도 여기까지 온 수고에 대한 보상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결국 하윤은 그 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쌓인 이면지를 정리하는 척하다가 일부를 바닥에 쏟아 [문] 틈 사이로 빼돌렸다.
본디 이곳은 미궁관측연구소가 있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문]이 더러 존재했다. 오가기 편하게 만들어 둔 것일까? 하지만 답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큼.”
홀로 있는 것이 편하기는 했으나 묘하게 불편했다. 이렇게 혼자 둘 거면 일찍 퇴근이나 시켜 주든가. 남들 일하는 곳에 홀로 일하지 않고 가만있기란 생각보다 뻘쭘한 일이었다.
‘빼돌린 자료를 좀 읽고 싶은데.’
그때 낯익은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주미와 신입 사원 최현진이 돌아왔다. 최현진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고 이주미는 어째 조금 화나 보였다. 최현진이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을 수도 있고 그냥 단순히 일이 많아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 최현진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는 작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아마도 하윤을 의식한 탓이리라. 대충 들었더니 최현진이 자료를 착각해서 입력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열의에 넘쳐서 상당량을 작업한 바람에 자료가 꼬였고, 그걸 그대로 들고 갔다가 회의에서 창피를 당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에휴. 네가 무슨 말을 하겠냐. 그래, 제대로 확인 못 한 내가 잘못한 거지. 이만 자리로 가 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 그만하고.”
“넵. 죄…….”
“…….”
이주미는 최현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가 염동력을 가진 에스퍼였다면 최현진의 목은 480도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최현진은 삐죽거리며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자료들로 탑을 쌓아 경계를 만들다 못해 책상의 반절을 내주고 있던 자리였다.
그는 잠시 앉아 있다가, 눈시울을 붉히더니 화장실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주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괴상한 신음을 내다가, 하윤을 의식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민망해하던 것도 잠시.
그들이 자리에 돌아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금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프로그램을 띄워 이리저리 확인하다가, 뭘 출력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하윤은 그녀가 띄워 둔 화면을 보다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좌표들을 떠올렸다. 자료가 꼬였다더니 자신의 기억과 조금 달랐다.
‘엉킨 부분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얼굴을 씻고 온 최현진이 돌아왔다. 최현진은 서랍에서 영수증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삐죽거리며 하윤이 있는 탁자에 다가왔다. 책상이 좁아서 같이 써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하윤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최현진은 봉지에서 영수증을 꺼내더니 날짜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제 일인데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해야죠.”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남들 일하는 곳에 홀로 일하지 않고 가만있기란 생각보다 뻘쭘한 일이었다. 하윤은 영혼 없이 사탕 껍질을 접다가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 출근했을 땐 언제 가나 싶던 시계는 어느덧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몇 년간의 직장 생활로 이제부터 시간이 빠르게 흐를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때 돌돌 말려 있던 영수증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최현진은 떨어진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하윤이 대신 주웠다. 살살 올린다고 올렸는데, 기척을 느낀 그가 고맙다며 고개를 꾸뻑였다.
“유류 영수증이 많네요.”
“아, 저희가 운전을 많이 해서요.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확인해요?”
“예에. 실제 위치랑 [문]이 기록이랑 같은지요.”
“……이건 궁금해서 그런 건데, 확인이 됩니까?”
“……예?”
“아니, 제가 어릴 땐 그런 게 안됐었거든요. 직접 확인해야 했는데, 아……. 이렇게 말하니까 그렇다. 그, 뭐냐. 그걸 직접 쓰는 능력자가 아니면 안 됐거든요. 요즘엔 관측하잖습니까? 그걸로 기록이랑 매치하는 건가 싶어서요.”
하윤은 쌓여 있는 자료들을 가리켰다. 궁금하긴 했다. 현대 과학 기술로 문을 확인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모양새로 되는지. 정확도는 얼마만큼인지.
“아아, 맞다. 김, 음…….”
“김하윤이요.”
“네, 김하윤 씨가 그쪽 능력자라고 하셨었죠.”
하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현진은 하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죄송해요. 제가 대단한 초능력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라.”
“아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능력을 못 쓴 지 십 년도 넘었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네?”
반사적으로 수긍하던 최현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윤은 이제 아무렇지 않으니 그냥 편하게 말해도 된다고 말했다.
“되게 상심이 크셨겠네요.”
“뭐, 이젠 그렇지도 않아요.”
“그럼.”
“……?”
“그럼 혹시 전공이……?”
능력을 잃은 지 십 년도 넘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새파랗게 젊었다. 최현진은 십 대에 능력을 잃은 사람이 자문으로 온 것을 신기해했다. 뒤늦게 자신의 실례를 눈치채고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저도 여기 배치된 게 한 달밖에 안 돼서. 제가 여기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동안 누가 따지러 오면 따지러 왔지, 외부에서 자문해 주러 온 사람이 없어서. 그, 죄송해요.”
이주미가 왜 최현진에게 죄송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오래돼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능력을 잃은 지 십 년쯤 됐고, 대학은 이쪽이랑 상관없는 곳에 갔어요. 취직도 뭐 전공 맞춰서 한 건 아니고 그냥 될 만한 곳에 넣어서 들어갔고. 그런데도 자문을 온 건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텔레포터였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텔레포터.”
“비슷한 능력 가진 애가 하나 더 있긴 한데, 걔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능력에 관해 대답을 제대로 못 하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남은 지식이라도 좀 게워 내 보라고 데려온 게 아닌가 싶어요. 뭐, 근데 지금은 너무 바쁘셔서 잊힌 것 같지만.”
“아아아, 그래서 요즘 관측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셨구나.”
하윤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진은 좋은 말로 순했고 솔직한 말로 매우 답답했다. 하지만 덕분에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기존 기관이 해체되고 다시 세울 인력이 없어짐에 따라, 현장에는 최첨단 과학 기술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많은 예산과 인력이 달라붙었음에도 결과가 미미했는데, 다만 몇몇 특정 위치를 관측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지점을 기준으로 삼아 과거 자료를 정리했는데, 이번에 서울 한복판에서 긴다리불가사리가 출현한 뒤부터 이 지점이 이동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동 지점을 기준으로 데이터를 재정렬했는데 누가 뒤섞어 버린 것같이 틀린 부분이 많다고.
“…….”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 최현진은 자기 말에 집중하는 줄 알고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관측 가능한 특정 지점의 이동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이느냐는 것인데, 최현진은 하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쏟아 냈다.
대강 알아듣는 것으로 요약하자면 일정 기간 반복해서 나타나는 단발성 게이트나 미궁은 주변 포인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최현진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각종 용어를 늘어놓았지만, 하윤은 자신이 오래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문이 부서지는 소리, 그 소리에 불안해 미칠 것 같던 그날 밤.
“위에서 미궁이 열릴 것 같다는 소리가 내려왔대요. 그런데 마침 우리 쪽에선 관측 포인트가 일그러졌으니까 비상이 난 거죠. 그런데다 엉킨 포인트가 일본 쪽도 살짝 걸쳐 있을 만큼 광범위하니까 어느 한 곳에만 초점을 맞출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자료를 다시 살피고 비상대책회의도 연일 이어지고, 현장 확인하고 하는 거예요. 현장에서 바로 측정해서 확인하는 간이 관측 데이터도 자격증도 따고 연수도 어느 정도 받아야 리딩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선배들이 자꾸 불려가는 거예요. 본청 인원으로는 도무지 커버도 안 되고 취합도 늦고 하니까.”
“위에서 내려왔다는 건 뭔가요?”
“아, 그건.”
최현진은 몸을 바짝 낮추고 방울 흔드는 시늉을 했다.
“왜, 파란 지붕에 계신다는 용한 분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