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03화 (103/162)

103화

하윤이 잠에서 깼을 때는 오후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잘 만큼 잔 시간인데 아직 눈꺼풀이 제대로 뜨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잤다간 새벽 늦게까지 깨어 있을 것 같았다. 하윤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잠깐. 내가 침대에서 잤던가? 분명 소파에서 잤던 것 같은데.’

어제 꼴이 말이 아니라 침대에서 재워 준 것일까? 하윤은 뒤돌아 침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직접 가서 잤다면 외곽에 붙어 잤을 텐데, 베개가 침대 정중앙에 있었다. 물론 잠꼬대하느라 베개 위치를 옮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무경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옮긴 게 아니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뒀다는 건데. 그럼 무경이는 어디서 잔 거야?’

침대에서 함께 잔 건 아닌듯했다. 그러기엔 자신이 침대 정중앙을 사용했으니까. 함께 자려면 몸을 붙여야 했다. 암만 자신이 깊은 잠을 잤더라도 그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아, 맞다.”

몸을 붙여 잤어야 했다는 말에 간밤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어제 폭주했었지.’

분명 자신이 잠들기 전까지는 멀쩡했었으나, 잠든 뒤에 상태가 안 좋아졌던 모양이었다. 하윤은 이성 없이 자신의 품을 파고들던 무경을 떠올리며 눈을 비볐다.

‘하기야 상태가 안 좋을 만했다.’

문의 위치를 옮기느라 기진맥진한 자신도 자신이지만 거대한 탑 같던 긴다리불가사리를 제어한 무경이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그러고는 정해진 동선처럼 소파에 드러누웠다.

베개로 쓰던 쿠션을 찾아 손을 휘적거렸으나 잡히는 게 없었다. 쿠션이 있는 곳을 찾아 문을 열었으나 쿠션은 쓰레기봉투에 담겨 다용도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 꺼낸다고 해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꺼내 쓸 생각도 없긴 했지만.

“…….”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하윤은 결국 소파에서 일어났다. 물을 주방으로 향하자 냉장고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나갈 생각하지 말고 집에 붙어 있어. 밥도 챙겨 먹고.

“나도 오늘은 나갈 생각이 없네요.”

하윤은 음률을 붙여 대꾸하고는 메모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단번에 들어가리라는 생각과 달리 메모는 쓰레기통 귀퉁이를 맞고 튕겨 나왔다. 하윤은 구시렁거리며 떨어진 메모를 주웠다.

“음?”

튕겨 나오는 일이 없도록 쓰레기통에 바로 넣으려던 차였다. 하윤은 쓰레기통에 이미 똑같은 메모지 조각이 몇 개나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갈기갈기 찢은 것도 있고 그냥 구긴 것도 있었다. 하윤은 갈기갈기 찢긴 조각을 꺼내 본래대로 맞췄다.

병원에

박건영이랑

쓰레기 제안

긴 문장으로 이어진 것은 없고 전부 쓰다 만 것들이었다. 선으로 직직 긋다 못해 아예 까맣게 지운 것들도 있었다.

“…….”

하윤은 깊이 생각하길 포기한 채 메모 조각을 다시 쓰레기통에 넣었다. 어제 힘을 과하게 쓴 탓인지 아직 몸이 무거웠다. 무경이 준 약을 먹지 않았으면 정말 열이 났겠다 싶었다. 어쨌든 그 덕에 정신이 몽롱했다.

하윤은 습관적으로 소파에 드러누우며 TV를 켰다. 딱히 뭘 보려던 것이 아니라 멍하니 채널만 돌렸다. 그러다가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한 뉴스가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하루가 지났고 사후 수습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일까, 괴수 환경 전문가가 패널로 참여해 어제의 현상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들은 긴다리불가사리의 출현 주기와 장소가 달라진 이유와 이로 인한 피해, 그리고 정부의 보상 방안 등을 이야기했다.

출현 주기와 장소가 달라진 점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대기층이 미궁과 상호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아니면 저쪽 세상의 환경이 변화했거나.

“오. 그럴듯한데.”

[그렇다면 긴다리불가사리의 서식지가 바뀌었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출현 주기는 어느 정도로 조정이 될까요?]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부분이라, 현재로선 당장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태 지속되던 데이터가 달라진 것이기 때문에…….]

뉴스 화면에 [예견된 참사 · 안전 불감증 대한민국]이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패널은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이러한 분야의 연구 인프라가 부족하며, 과거에 존재했던 전담 기관을 되살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대체 왜 없앤 건지, 예산을 늘리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줘도 모자랄 판국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과거에 존재했다, 라. 선생님이 계시던 곳 말하는 건가? 그게 지금은 없어졌나?’

흥분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인 패널을 제지하며 MC는 긴다리불가사리의 출현 주기와 장소가 달라져 입게 된 피해에 관해 이야기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있었던 단체 추돌사고 및 긴다리불가사리의 낙하로 직접적인 상해를 입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여태 긴다리불가사리를 취급하던 업자의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장소가 달라진 만큼 이번 사태에선 서울의 재해복구 센터와 연계된 업체에서 단독으로 긴다리 불가사리의 사체를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독과점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고 화면에선 취재진을 무시한 채 건물로 들어가는 무경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무경은 하얗게 질린 낯빛을 한 채 취재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바쁘게 안으로 들어갔고 하늘은 이미 컴컴했었다. 하윤은 자신이 박건영과 만났던 시간을 떠올리며 무경의 퇴근 시간을 가늠했다. 그때 자막으로 뜬 업체 밀어주기 논란이라는 글을 보며 하윤은 아연한 얼굴을 했다.

“……아휴, 새끼. 그러니까 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문득 조각이 있는 에스퍼에겐 다른 국민은 조각을 구하는 김에 덩달아 구하는 덤이라던 박건영의 말이 생각났다. 정신계 능력자면서 세뇌는 잘 못하고 남 속을 후벼 파는 데는 재능 있던 에스퍼.

‘어쩌면 그가 가진 정신계 능력이 이런 것일지도?’

하윤은 돌리는 뉴스 채널마다 나오는 무경의 영상을 보다가 TV를 껐다.

“덤이라.”

주면 좋고, 안 주면 어쩔 수 없는.

살리면 좋지만, 살리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아무도 자신이 덤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애타길 바란다. 자신의 목숨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고 북돋워 주길 바라는 것. 소중한 생명을 지켜보는 이 또한 같은 마음일 것이다.

“나 참.”

박건영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말한 무경의 모습이 비단 무경만이 아니라 자신도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남이 하는 남의 이야기 보다 남이 하는 내 이야기가 기억에 남으니까.

하윤의 스승이자 무경의 모친인 서이주는 때때로 둘이 너무 일찍 만났다고 말하곤 했다. 둘의 세상이 너무 빨리 닫히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어렸을 적에 무경에게 암시를 건 것도 어쩌면 이와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너무 일찍 사고를 칠까 봐 우려하시기도 했지만.’

만약 그날의 사건이 없었다면 둘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정말 박건영의 우려대로 됐겠군.’

하윤은 자신이 희원의 뒤를 캤던 때를 떠올렸다. 무경이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하윤은 희원을 찾지도, 또 서이주가 남긴 흔적을 쫓지 않았을 것이다.

하윤은 현관을 향해 몸을 틀었다. 신발장 안에 있던 문,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면 있는 방. 하윤은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눈이 내린 것처럼 갈 길을 몰라 헤매던 때와 달리 두 가지 길이 놓였다.

모른 척 버리고 살 것인지, 그게 아니면 받아들이고 책임을 짊어질 것인지.

확인해 보고 감당하기 어려우면 모른 척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의 자신이 보고 포기할 만한 일이면 이미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며, 이를 모른 척하는 건 자신도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한테 갑갑하다고 훈수 둘 사람도 막상 데려다 놓으면 비슷할 거라는 말이지.’

그리하여 남은 선택지를 보자면 하윤에겐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는 단순히 사느냐 마느냐와 달랐다. 사실 그것보다는 치졸한 이유였다.

모른 척하기엔 이미 아는 게 많았고, 책임을 지자니 자신이 이번엔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지 몰라서, 혹은 죽지 않고 다시 초라해질까 봐 싫었다. 아니, 이런 것을 다 떠나서 그냥 과거와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열일곱이던 그때 모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키만 조금 더 컸을 뿐, 과거의 서이주나 백진하처럼은 되지 못했다. 하윤은 갑갑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또, 또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네.”

하지만 이 모든 것 이전에 현대인으로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휴대전화부터 개통하자.’

◇◇◇

휴대전화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해야 싸게 살 수 있는 것일까. 하윤은 도통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연락 수단이 필요해서 사기는 샀는데 바가지를 쓴 기분이 들었다. 가격을 말하면 누구나 ‘아, 휴대전화 그렇게 사는 거 아닌데.’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에이, 모르겠다.’

이미 산 걸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가슴속에 묻은 몇 개의 휴대전화 가격같이 이 또한 묻고 수밖에.

‘시간이 좀 늦었는데.’

하윤은 휴대전화 화면에 뜬 시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충 사서 나가려고 했으나 통신사 대리점에서 의무고지인지 뭔지를 운운하며 놓아주질 않았다.

‘오늘 안 나간다고 했었는데.’

분명 하윤 또한 집 밖을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집 밖에 있으면서도 집 밖이 이라는 범위가 있었는데 그게 ‘요 앞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하윤이 다녀온 통신사 대리점은 하윤의 기준 요 앞 편의점 옆에 있었다.

그러니 하윤의 기준으론 그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냥 잠시 콧바람 쐬면서 바가지나 쓰고 온 것일 뿐.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하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으슥한 골목에서 집으로 가는 문을 열 생각이었다.

그때 문득 어느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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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을 네댓 개씩 걸어 놓는 곳에서 갓 교체하던 현수막이었다. 이전 것도 점집이라 경쟁자 몰아내긴가 싶었는데, 번갈아 보니 같은 곳이었다. 다만 현수막 디자인이 조금 달랐다. 그러나 앞엣것이나 지금 것이나 특이한 문구를 쓴 것도 튀는 색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뭐라도 잡고 싶은 자신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그냥 흔치 않게 현수막을 갈아 끼우는 모습을 봐서거나.

‘내가 진짜 힘들긴 힘든가 보다.’

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아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다시 뒷걸음질 쳐 현수막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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