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하윤은 교체된 현수막을 다시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자 조금 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어?’
사진을 찍어 확대하자 현수막의 양 귀퉁이에 전통 무늬를 흉내 낸 것 같은 장식 문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하윤에게 익숙한 숫자가 있었다. 우연이 겹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착각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하지만 또 정확하다고 하기엔 완전한 표시는 아니었다.
‘02#16-15-571.’
뒤에 누가 연 문인지에 관한 숫자와 성이 잘려 있었다.
“…….”
순간 폐가에 찾아가는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곳을 굳이 찾아가나 욕했는데, 지금 상황이 되어 보니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무시하기 어렵고, 또 누가 자신을 불렀는지 확인해도 자신은 괜찮으리라는 자만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하윤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분명 하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찾아낸 숫자들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듯이 곱씹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샛길 위에서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다만 활짝 열고 나갈 배짱은 없는 탓에 그곳에 있는 문의 표기만 다시 확인했다.
‘02#16-15-571-34516정.’
정씨가 열어 34,516번째로 미궁 관측 연구소의 [길] 등록명부에 등록한 길.
‘정씨, 정씨라.’
하윤은 오랫동안 떠올릴 일 없던 자신이 아는 정씨를 떠올렸다.
‘정기오.’
문태강과 서이주와 함께 미궁을 연구했던 문지기의 이름이었다.
하윤의 스승 서이주는 생전에 그가 참여했던 문에 관한 연구를 하윤이 물려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하윤이 싫든 말든 그럴 수밖에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하윤은 이따금 스승 서이주가 예지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냥 흘러가는 상황이 빤해서 그랬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선생님은 머리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박건영도 자신이 능력을 되찾은 줄도 모르면서 그 ‘대단한 서이주’의 제자라고 취급해 주지 않던가. 비록 제안한 내용이 그냥 평범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아니, 어쩌면 지금 내 상황에선 굉장히 괜찮은 제안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상황 아닐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혹 죄책감이 생기더라도 전부 정부 탓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
‘이야. 박건영이 대단한 걸 내민 거였네.’
사실을 무기로 휘둘러 온몸의 뼈를 바스러트리는 줄 알았는데, 실은 정말 달콤한 꾐이었다. 하윤은 뺀질거리던 박건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아주 잠깐으로, 그의 얼굴엔 정적이 감돌았다.
‘……집에나 가자.’
집에 돌아가자 다행히도 무경의 퇴근 전이었다. 메모를 남긴 만큼 나갔다는 것을 들켰으면 싫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경은 하윤이 숨을 고르는 사이에 집에 도착했다. 무경은 이를 사리문 채 사나운 눈으로 하윤을 노려보았다.
“왔어?”
“…….”
“오늘은 일찍 왔네. TV 보니까 일 많겠던데.”
“…….”
“혹시, 뭐 할 말 있어?”
무경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무경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윤이 옅게 잠들었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로 “야.” 하고 불렀다. 하윤이 듣고 있다는 양 눈썹을 들자 됐다고 말했다.
“왜, 뭐가 된 건데.”
“됐으니까 그냥 자.”
“…….”
무경은 대꾸한 다음 바닥에 앉아 TV를 틀었다. 언뜻 시계를 보자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뭐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무경은 TV를 음소거 한 채 채널을 돌렸다. 하윤은 무경을 향해 돌아누웠다.
TV 불빛이 비친 무경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화가 난 걸까 싶어 하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그래.”
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하자 짚이는 게 많았다. 하지만 자수한다고 해서 광명을 찾을 것 같지 않았다. 하윤은 환한 TV 불빛에 눈을 감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뭔지 알려 줄 수 있어?”
“…….”
“싫으면 말고.”
“네가.”
“응.”
무경은 말하려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뭐가.”
“숨기고 있는 거.”
“내가?”
하윤은 몸을 일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내 발뺌은 어렵겠다 싶어 다시 누웠다.
“…….”
“왜 말이 없어?”
“너무 많아서 뭐가 들켰는지 모르겠어. 괜히 말했다가 다른 걸 들키면 안 되잖아.”
하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경이 몸을 돌려 하윤과 눈을 마주했다. TV 불빛 때문일까. 눈이 유독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나도 됐어.”
무경은 하윤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하윤은 사라지는 무경의 뒷모습을 따라 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긴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일어나 문을 바라보았다. 안방 안을 엿보려다가 이내 단념했다.
몇 가지 의심되는 것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자신 또한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것들이 많았다. 주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들키고 싶은 일들이었다. 하지만 무경이 이미 그것들을 알았다면 지금처럼 굴진 않았을 것이라고, 막연히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다른 거란 말인데.’
저 정도로 화낼 일이란 뭘까. 딱히 중요하진 않지만, 그냥 웃고 넘어갈 수는 없는, 그런 정도의 일인 걸까? 이번엔 산정 범위가 너무 좁은 탓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웠다. 하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
하윤은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기분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유일한 동거인인 무경이 그의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윤이 얼떨결에 휴대전화를 받아 들자, 잠금을 풀라고 말했다. 하윤은 그제야 무경이 내민 휴대전화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왜?”
“안 풀려서.”
“……?”
막 자다 깼기 때문일까. 무경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은 이미 잠금을 풀고 있었다.
“페이스 아이디는 어지간하면 설정하지 마. 털릴 수 있으니까.”
“번호도 딱히…….”
“잠금 풀었으면 줘.”
무경은 당당하게 하윤의 휴대전화를 가져가 안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윤은 시계를 힐긋거리며 출근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
“해야지.”
“…….”
“넌 더 자. 출근할 필요 없잖아.”
출근보단 무경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게 문제였다. 물론 지금은 딱히 문제 될 만한 것이 없었지만.
“현수막 사진은 뭐야? 학원이라도 다니게?”
“……아니. 점집. 갑갑해서 점이라도 보려고.”
“네가 점을?”
“볼 수도 있지.”
“이상한 데 가서 괜히 돈 털리지 말고 집에 있어.”
“…….”
무경의 말에 하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무경이 화난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하윤은 천천히 집 안을 훑어보았다. 어디에 카메라를 숨겨 두기라도 한 것일까?
하기야 엊그제 쓰러져 있던 꼴을 보면 눈치채지 못하려야 못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자신이 능력이 돌아온 것은 알까? 아니면 그냥 몰래 나갔다 왔다고만 생각할까.
능력을 찾은 것을 알면 왜 더 말하지 않는 것일까.
‘상관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면 그 이유는 뭘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거리를 좀 둬야겠는데.’
하윤은 휴대전화를 돌려받으며 입을 열었다.
“아, 나 집에 좀 갔다 오려고.”
“집에 왜?”
“내 집 말고. 부모님 댁에. 다치기 전날에 통화를 했었거든. 그때 주말에 집에 들르기로 했었는데 연락을 못 드렸었으니까. 너도 내가 다친 건 부모님께 따로 알리지 않았다고 했잖아.”
“통화 내역 없던데.”
“이제 해야지. 그러면 아무래도 들렀다가 와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언제 올 건데?”
“한 이틀? 사흘쯤 될 수도 있고.”
“왜?”
“그때는 집에도 좀 갔다 와야지. 정리도 좀 해야 할 거고.”
“김하윤.”
“응?”
“이번엔 허튼 생각 하지 마.”
“내가?”
“그래. 네가.”
“…….”
“부모님 댁에 갈 거면 데려다줄 테니까 저녁에 가. 어차피 낮에는 거기도 사람 없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그냥 내가 알아서 갈게.”
“타고 가. 그게 너한테도 좋지 않겠어?”
“그…….”
무경은 더 들을 생각 없다는 듯이 몸을 돌리더니 그 길로 집을 나섰다. 하윤은 집을 나서는 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새끼 진짜 빡친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기 뭣해서 화났다는 티를 내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윤은 다시 자리에 드러누워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무경인 내가 능력이 돌아온 걸 눈치챘다. 그러나 이걸 따로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 말인즉 능
력을 숨기는 걸 도와주려는 걸까? 아니면 별 상관없다는 걸까.’
하윤은 생각을 곰곰이 곱씹었다.
‘아니지. 추궁을 안 한 건 아니야.’
숨기는 것이 없느냐 물은 건 아마 능력에 관한 게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능력이 돌아온 것이 무경의 일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으니까.
‘그럼 걔는 왜 정확하게 안 묻는데? 조심할 필요가 있어서? 그러면 추궁하지도 말았어야지.’
하윤은 작게 코웃음 쳤다. 하지만 비웃은 것과 달리 손발이 차가워졌다.
“……내가 직접 말하길 바라서?”
오늘 한 생각 중에 가장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으, 시발. 소름 돋았네.’
하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자신을 질책했다.
‘일단 이 집에서 내가 이동하는 건 눈치채는 것 같은데.’
무경의 상태를 지켜볼 겸 자신에게도 감시가 붙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동한 게 아니었다. 그걸 무경이 안다는 것은…….
‘능력을 썼나?’
하지만 하윤이 아는 무경의 기술 중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무경은 염동력을 썼지, 추적술을 쓰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무경은 현역으로 일하고 있었고 다양한 현장에 투입되었다. 자신이 모르는 기술 십수어 개를 다룬다고 해도 이젠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 공간을 바꿔 보자. 집이 아닌 곳에서도 능력을 사용해 이동한 것을 알아차린다면 확신할 수 있을 테니까.’
하윤은 긴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부모님 댁으로 가서 무경과 거리를 둔 다음 박건영과 접촉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