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101화 (101/162)

101화

“그래서 그게 뭔데.”

“지금처럼 말고 사람답게, 평범하게 살게 해 주겠대. 회사에 취직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런 거. 연애도 좋고 결혼도 좋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나고 그런 게 좋지 않겠냐던데.”

“중매라도 서겠다?”

“나야 모르지. 그게 단순히 취업 청탁이나 사람 소개는 아닌 것 같던데. 좀 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활을 할 수 있게 보호해 주겠다는 느낌인데.”

더는 무경이나 그를 둘러싼 상황에 개입하지 말고 그냥 다른 평범한 사람같이 살라고.

“그런데 이런 거 말해도 되냐? 내가 받은 개인적인 제안인데.”

“그럼 말하지 말든가. 네가 말한 거잖아.”

너나 묻지 말든가. 하윤은 차마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소소하게 반항했다. 어느새 물은 가슴 바로 밑까지 찼다. 하윤이 물을 잠그자 무경은 수건을 꺼내 적시곤 그것을 하윤의 어깨에 둘렀다.

“……?”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준다고 했지.”

“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는 신세인 것 같아서.”

“왜?”

계속되는 물음에 하윤은 고개를 들어 무경을 바라보았다. 그냥 대답했다고 하기엔 정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진짜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른 사람한테 연락한 이유라고?”

“그럼 뭐가 있어?”

“너 이제 휴대전화도 없잖아. 번호는 그럼…….”

“마침 기억이 나더라. 전에 전화번호를 받았었거든.”

“…….”

“왜?”

이번엔 하윤이 물었으나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연 자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뭔가를 참듯이 이를 악문 채로 목을 꼴깍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윤과 마주했다.

“그다음엔 뭐 했는데?”

“그다음에?”

“그 이야기만 했는데 그렇게 오래 있을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낮에 계속 집에 없었잖아.”

“에이, 점심때쯤에 나갔다가 해 지기 전에 들어왔는데. 뭘.”

“…….”

“진짜 별거 안 했어. 그냥 아까 말했던 이야기나 좀 하고. 네 욕도 좀 하고.”

“내 욕?”

“그래. 맺힌 게 좀 있는 것 같던데.”

정확히 무경이라고 지칭하긴 어려웠다. 다만 조각이 있는 에스퍼들에겐 별로 좋은 감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박건영이?”

“그러게. 사방을 긁고 다녀서 정작 자기는 남한테 맺힌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좀 있더라. 그런데 뭐 심한 건 아니고.”

“너나 좀 심하겠지.”

판이 벌어져서 자신을 신나게 욕했겠다는 무경의 말에 하윤은 어깨만 으쓱였다.

“박건영이 이상하게 말 옮길까 봐 좀 사렸지 뭐.”

“말할 거면 뭐라고 할 거였는데?”

“그걸 본인 앞에서 어떻게 말하냐?”

“말이 이상하게 들어갈까 봐 걱정됐으면 본인 앞에서 바르게 말하면 되는 거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박건영 앞에선 했으면서 내 앞에선 왜 못 해?”

하윤은 무경의 태도가 이상함을 느꼈으나 지적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을 눈치채는 게 두려웠다. 무경의 채근에 고개를 흔들다가 이만 일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그것 말곤 더 말한 건 없어?”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럼 됐어.”

몸을 말려 주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준 다음 약 몇 알과 물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먹어. 이대로 자면 열날 것 같더라.”

무경은 하윤이 물잔을 쥐고만 있자 곧장 돌아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윤은 무경이 준 알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꿀꺽 삼켰다.

◇◇◇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손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무경은 떨리는 손을 맞잡은 채 벽에 몸을 기댔다. 긴장이 풀린 탓인가 싶다가도 생각해 보면 그가 긴장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다만 놀랄 일은 있었는데, 그것도 이미 몇 시간도 지난 뒤였다. 그러니 이제 와서 놀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떨림은 어디에서 왔는가. 떨림을 인지한 순간부터 함께 밀려드는 불안과 초조는 또 어디에서 왔는가.

무경은 샤워기를 틀며 물소리에 자신의 긴 한숨을 묻었다.

‘씨발. 씨발, 씨발!’

기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대신 억지로 견뎌 내기 위해 욕설만 머릿속에 들끓었다.

사실 무경은 오늘은 내내 이런 상태였다. 무척 정신이 없고 감정 기복이 심했다. 집에 있어야 할 김하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부터 그랬다. 박건영이 하윤과 식사하러 가는 중이라고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무경은 박건영에게 추적을 붙여 하윤의 위치를 알아냈다. 식사 장소는 무경도 아는 한정식집이었고, 한 상 거하게 받은 박건영과 달리 하윤은 달랑 죽 한 그릇을 받았다. 물론 김하윤이 병상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긴 했으나 괜스레 속이 꼬였다.

그래, 거기서부터 확실히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받은 상차림도 상차림이지만 김하윤이 박건영을 앞에 두고서 음식을 삼키는 게 또 못마땅했다. 김하윤이 뭘 먹는 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을 보자 그거라도 좀 먹지 싶었으니까.

다만, 그냥. 자신의 앞에선 밥 한 숟가락 삼키지 못하던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다.

‘박건영 앞에선 먹으면서 왜 내 앞에서는.’

하지만 또 왜라고 하기엔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을 알았다.

‘그래, 내가.’

자신을 밀어내며 소리치던 김하윤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손을 뿌리치던 김하윤의 모습이, 자신을 정말 싫은 듯 보던 그 눈빛이. 이제까지 김하윤은 그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건 어떻게 행동하건 간에 김하윤은 단 한 번도 그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낯선 탓일까. 고작 그런 이유라고 하기엔 그 눈을 떠올릴 때마다 속을 날카로운 날붙이로 찔러 넣는 것 같았다. 숨을 내쉬기가 어렵고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지나치게 감정이 요동쳤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괜히 서운했다.

‘서운해? 내가? 김하윤한테?’

무경은 제 생각이 너무나 우스웠다. 서운이라는 말은 정말 맞지 않았다. 서운이라는 말로 그치기엔 너무나 큰 동요를 느꼈으니까.

그냥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일 터였다. 물론 남이 들으면 이 또한 우스운 이야기이리라. 하지만 무경은 정기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다.

애써 벼려 낸 미움이 무뎌질 때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의 저열함에 환멸을 느끼며 김하윤을 차라리 무시해 보려고 했지만, 또 그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애써 미움을 세우고 김하윤에게 쏟아 냈다.

이번 것 또한 그냥 그런 주기가 온 것이리라. 그러니 또 얼마 지나면 다시금 무뎌질 것이다.

무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김하윤에 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박건영에게 붙인 추적을 풀지 않았으므로 김하윤에 관한 생각을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부분이 아니라, 박건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김하윤을 생각했다. 식사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건영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김하윤은 그것을 귀찮아하면서도 대답했다. 다만 거리가 제법 있고 무경 또한 해야 할 일이 있어 대화 내용까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경은 둘의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짜증이 났다. 하윤에게 신경이 쓰여 계속 힘을 써야 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무경은 둘이 얼른 헤어지기를 바랐다. 어서 용건을 마치고 각자 가야 할 길로 갔으면.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둘은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박건영은 하윤을 인적이 드문 곳에 데려갔다. 하윤은 딱히 불쾌해하지 않고 박건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박건영은 대화 중 몇 번이고 하윤과 눈을 마주했다. 하윤이 보지 않으면 위치를 바꿔서라도 눈을 마주했다. 그는 뛰어난 정신계 능력자였으므로 하윤에게 몇 번이나 능력을 사용했을지도 몰랐다.

대상은 분명 김하윤이었을 텐데 고통은 지켜보고 있는 자신에게 돌아왔다. 자신의 가장 약한 곳을 뾰족하고 단단한 것으로 힘주어 긁는 것처럼, 박건영의 행위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더욱 괴롭게 느껴졌다.

그만하라는 말을 몇 번 했는지 자신도 기억할 수 없었다. 무경은 자신이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헷갈렸다. 영원 같은 순간이 끝나고 박건영과 김하윤이 멀어졌을 때야 무경은 비로소 긴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장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온몸의 털이 삐죽 서고 서늘한 기운이 몸속을 어슬렁거렸다.

무경은 감이 유달리 좋은 대원 중 몇몇을 돌아보았으나 그들은 도리어 무경의 시선에 놀랄 뿐이었다. 그사이 창문가에 있던 천리안을 가진 대원이 괴수의 출현을 알렸다. 괴수는 긴다리불가사리로 등급이 높진 않았으나 수가 많고, 조기에 조치하지 않을 시 번거로워졌다.

게이트 오픈 증상 없이 괴수가 출현하면 일회성 게이트라고 추정할 수 있었지만, 일회성이라고 해도 긴다리불가사리는 집단이동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 더욱이 긴다리불가사리는 따로 사체 취급 업체가 있을 정도로 일정 주기별로 일정 장소에 출현하는 괴수였다.

본래라면 이런 하급 괴수의 출현에 무경이 나설 필요는 없었으나, 허공에 수천 톤 아니, 수만 톤에 이를 수도 있는 쇳덩어리가 낙하를 준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더군다나 그 부근에 김하윤이 있었다.

물론 박건영도 근처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는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협조 공문이나 연락이 오기도 전에 먼저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떤 협의를 거쳤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서 무경은 가장 먼저 김하윤의 위치를 살폈다. 그가 도로에서 어느 건물로 숨는 것을 본 다음 허공에 뭉쳐진 긴다리불가사리를 처리했다.

큰 덩어리였으면 취급이 쉬웠겠으나, 안타깝게도 그가 처리해야 하는 것은 긴다리불가사리의 군집이었다.

무경은 바깥에 있는 긴다리불가사리를 천천히 회전시켜 응축해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모를 긴다리불가사리들을 받아 냈다. 다만 무게가 무게고 개체의 수가 개체의 수인 만큼 회전을 제어하기 쉽지 않았다. 자칫 회전체의 크기가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힘이 무경의 힘을 막아 내며 회전체가 넓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그 순간 무경은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어야 할 도움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치 잊고 있던 요령을 다시금 떠올린 것 같았다.

무경은 그 힘의 도움을 받아 긴다리불가사리를 그릇처럼 빚어냈다. 그가 만든 긴다리불가사리의 기둥은 점점 더 높아져 긴다리불가사리들이 튀어나오는 허공에 다다를 만했으나, 무경은 더 높이 올리지 않았다.

얼마나 더 쏟아질지 모른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형용하기 어려운 찝찝함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리를 직접 귀에 대고 쏟아 내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밑도 끝도 없이 솟구치는 짜증과 불안을 느끼던 중에 꾸역꾸역 밀려 나오던 긴다리불가사리의 행렬이 그쳤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란이 그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무경은 허공을 잠시 노려보다가 하윤을 찾았다.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하윤이 있는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무경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느끼자 도무지 믿을 수 없게도…….

김하윤이 보고 싶었다.

그 간절함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아마 그가 또다시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정말 쫓아갔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은 주변의 만류도 있었거니와 하윤이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단어가 주는 강력한 힘에 무경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집으로 돌아간 김하윤은 더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단순히 잠들었을 뿐인지 이따금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보고 싶다는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말라붙은 것을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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