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 뒤에 팔찌가 어떻게 되었더라?’
십 년 전 있었던 서울 참사가 있었던 뒤 하윤은 다양한 소속의 정부요원들을 만났다. 정보원, 연구소, 입원해 있던 병원의 의사까지. 당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는데, 하윤은 당시 그들에게 팔찌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소지품에 관해 몇 번 물었으나, 관련한 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기밀 사항이라 자신이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팔찌가 있었다면 나한테 묻기라도 했었겠지. 하지만 그때 힘을 쓸 때와는 느낌이 달랐는데.’
하윤은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지금은 그때와 같이 팔찌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때 팔찌에 걸려 있던 곡옥들은 문을 닫느라 다 깨졌으니까.
‘그렇다면 실만 남은 걸까.’
그 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자기 손목 속에 있는 거라면?
‘아니, 그래서 그게 뭔데?’
하윤은 갑갑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서이주가 남긴 방에 관련 자료가 있을지도 몰랐다. 찾아봐야 하나 생각하던 하윤은 돌연 머리를 움켜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찾으면 지금같이 살지 못 하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들 그냥 이렇게 살라고 하는데. 살 수 있는데.’
무경이도, 다시금 위기가 닥치려는 것도. 죽으려던 때처럼 다른 사람이 할 거로 생각하면 되는데, 그냥 미루면 다 알아서 하기 마련인데. 꼭 자신만 할 수 있는 것처럼 괜한 영웅 심리에 취해서는. 그래서는.
‘이미 한번 버려 놓고서는.’
하윤은 자신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잠깐 멈췄던 코피가 다시금 흘러내렸다. 하윤은 코피를 닦지도 못한 채 눈꺼풀에만 힘을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드러누워 잠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 생각하고 일단 일어나자.’
지금 계속 생각해 봤자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윤이 해야 할 것이라곤 갓 태어난 기린 새끼가 된 제 몸을 그나마 안전한 곳에 눕혀 놓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경이 고개를 돌렸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알아챈 것만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동해야 해.’
그게 아니더라도 남의 건물에서 버티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하윤은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벽에 밀었다. 아직 힘이 조금 남은 다리를 이용해 바닥을 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까 했던 앓는 말처럼 정말 힘이 들었다.
‘집에 가야지.’
갓 태어난 기린같이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윤은 거의 거꾸러지듯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곱 개의 문을 지나 어찌어찌 무경의 집에 도착했으나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더는 제게 닥친 일을 해결할 힘이 남지 않았다. 하윤은 마지막 남은 이성 하나로 팬트리 룸 안으로 기듯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무경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깨길 바라며.
◇◇◇
지나치게 무거운 잠이었다. 무경이 돌아오기 전에 깨어 보려고 신경 쓴 탓에 드문드문 화들짝 놀라듯 잠에서 깨긴 했으나,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몸이라도 좀 뒤척여서 깨 보려고 했으나 이 또한 몸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할 수가 없었다.
가상한 노력만 쌓일 때쯤, 하윤은 불현듯 시선을 느꼈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데 오로지 정신만 옅게 깨어 있었다. 아마 말을 할 수 있었다면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을 것이다.
무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한 일이 있었던지, 아니면 자신이 갑갑했던지.
“김하윤.”
무경의 부름에 하윤은 신음 같은 대답을 남겼다. 다만 너무 작은 소리라 그랬을까. 무경은 재차 하윤을 불렀다.
“김하윤, 일어나.”
대답하려 했으나 목구멍이 달라붙은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경의 손이 코앞에 다가왔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무경은 곧장 하윤을 팬트리 룸에서 끌어냈다.
“…….”
무경은 짜증 섞인 숨을 내쉬며 빛 아래서 하윤의 상태를 확인했다. 고개를 상하좌우로 돌렸다가, 콧등을 살짝 짚어 보더니, 나중에는 눈꺼풀도 뒤집었다. 하윤은 눈을 감고 있다가 눈꺼풀을 까는 무경의 손길에 눈을 떴다.
빛을 등지고 있는 데다, 이제 막 눈을 뜬 탓에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잠깐 본 것을 끝으로 다시 눈이 감겼다. 무경은 계속 눈을 뜨고 있으라며 뺨을 톡톡 건드렸으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대강 알겠다는 양 입을 다문 채 소리를 내자 무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대체 뭘 했길래……!”
손이 위로 올라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생각한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무경은 겉옷을 뒤로 던진 채 하윤의 손을 확인했다. 손끝과 손등을 번갈아 보다가 아예 옷을 찢어 팔 전체를 확인했다.
별 이상을 확인하지 못했는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한숨을 쉬고는 잠시 사라졌다. 물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욕조에 물을 받는 것 같았다.
하윤은 이제 다시 쉴 수 있겠다 싶어 몸을 웅크렸다. 잠이 조금 깨기는 했는지 몸이 가눠지기는 했다. 다만 찢긴 상의를 찾아 입을 정도는 안 됐지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다시금 다가온 무경은 이번엔 하윤의 하의를 벗기려 했다. 깜짝 놀란 하윤이 눈을 부릅뜨며 그의 손을 막았으나 무경이 더 빨랐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하윤을 탈의시킨 다음 그를 안아 들었다.
“무경아, 무경아 잠깐만. 내가,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네가 뭘 알아서 할 건데? 그냥 가만히 있어.”
무경은 하윤을 욕실로 데려갔다.
‘아, 큰일 났다.’
하윤은 다가올 충격을 대비해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무경은 하윤의 몸짓을 코웃음 치며 자기 옷이 젖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욕조 안에 들어갔다. 곧장 처박으리라는 생각과 달리 무경은 조심스레 하윤을 내려놓았다.
물은 생각과 달리 체온보다 조금 따듯한 정도였다. 하윤은 얼떨떨한 마음에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무경은 물을 적신 부드러운 수건으로 하윤의 얼굴과 목덜미를 닦았다.
“내가 할게.”
하윤이 수건을 빼앗으려 했으나 무경은 하윤의 손을 떨쳐 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윤을 응시했다.
“네 몸 하나 못 가누면서 뭘 하려고.”
하윤은 말 대신 손으로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으나 무경의 비웃음만 샀다. 아마도 세수 한번 하는 동작이 매우 굼떴기 때문이리라.
‘그래, 해라. 해. 내가 귀찮냐. 네가 귀찮지.’
하윤이 포기하자 무경은 고개를 옆으로 한번 까딱인 뒤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그는 얼굴뿐만 아니라 하윤의 몸 이곳저곳을 닦았다.
“……이제 진짜 내가 할게. 이러다 머리까지 다 감겨 주겠네.”
“알면 고개 숙이든가.”
“…….”
“왜?”
“너 무경이 아니지?”
하윤의 물음에 무경은 대꾸하기도 피곤하다는 양 눈썹만 까딱였다. 그러고는 했던 말 그대로 하윤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하윤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거품 물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피곤해하는 것과는 달리 고도의 염동력을 사용하고 있는 무경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아니, 지금의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싶어 눈을 마주하자 무경은 도리어 하윤을 수상하게 여겼다. 하윤은 곧장 시선을 내리깔며 숨을 골랐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이럴 리가 없어.’
평소보단 대단히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아직 우악스러운 면이 있었다. 하윤이 기억하는 무경은 이렇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 미화된 무경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하윤이 기억하는 무경은 이런 눈으로 하윤을 본 적이 없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눈 제대로 감아. 거품 들어가잖아.”
“…….”
하윤은 무경의 말을 따라 눈을 질끈 감았다. 무경은 욕조 물보다 조금 더 따듯한 물로 하윤의 머리를 헹궈 냈다.
“너 좀 이상해.”
“뭐가.”
“이러는 게.”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데 이래서?”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산에서 굴러서 입원시키고 간호한 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간병인?”
“…….”
“아, 그러고 보니 간호비를 줘야 하는데 혹시 얼만지 알려 줄 수 있어?”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무슨 말을 하냐고 했지만 최근 몇 년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하윤은 무경의 말에 동감한 척 고개를 끄덕이다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말을 한 덕분에 다시 잠들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깼다. 하윤은 발가락으로 욕조의 마개를 빼냈다. 마주한 둘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물 흘러가는 소리만 욕실을 가득 채웠다.
하윤은 무경의 얼굴을 힐긋 바라보았다. 무경은 생각에 잠긴 듯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침묵이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하윤은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대강 걷으며 무경을 불렀다.
무경은 대답하는 대신 욕조 마개를 다시 꽂고 따듯한 물을 받았다. 물이 하윤의 허리쯤까지 차오르자 무경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집에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오늘 어디 갔었어?”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박건영이랑 만났어. 이야기할 게 있어서. 그 김에 밥도 얻어먹고, 산책도 좀 했고.”
“박건영이랑?”
“어.”
“왜?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
“응.”
“왜?”
“전에 자기네 편에 붙으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달리 따로 불러 주는 곳도 없고.”
“……왜?”
“그냥. 회사도 관뒀고 앞날이 막막해서.”
“다시 취직하면 되잖아.”
“에이, 요즘 세상에 취직이 말처럼 어디 쉽냐.”
“그래서 뭐라고 해? 그쪽 말을 들으면 뭘 해 주겠다 제안했을 거 아냐.”
이쯤 되자 무경은 자신에게 뭔가를 캐묻기 위해서 씻겨 준 것 같았다.
“몇억 준다고 하면 그냥 받아. 취직도 어려운 판에 그거라도 받아야지.”
“그런 거 받았다가 뭘 해 달라고 요구할 줄 알고. 그리고 그런 말도 안 나왔어.”
“그럼?”
“그냥 뭐. 사람답게 살게 해 주겠다던데.”
무경은 코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답게 사는 게 대체 뭔데. 뜬구름 잡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의외로 이거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더라. 이게 거의 기본 조건이라고. 최저 조건이 아니라 많이 찾아서 기본 사항이 된 그런 거.”
어쩌면 최저 조건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윤은 기억을 더듬으며 미간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