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막말로 백 소령은 누군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설쳐 대도 그냥 맡은 일이라서 저지하는 거지 정의감으로 나서지 않을걸요? 트롤리 딜레마 같은 것도 없을 거야. 그 사람. 그냥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어찌 보면 자신도 돌려 까는 거라 기분은 좀 나쁜데 맞는 말이긴 했다.
“이러니 윗분들이 백 소령이 기억을 되찾길 바랍니까?”
“…….”
“김하윤 씨는 백무경 씨가 기억을 되찾으면, 조각을 되찾는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계속 군에 있을 것 같습니까?”
하윤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경이 기억을 되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과의 관계는 둘째치더라도 확실히 군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폭주를 유도할 필요가 없으니 군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고 또 자신이 곁에 있으니 일부러 위험을 무릅쓰고 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돈이야 이미 받은 유산이 있었고 무경은 그것들을 착실하게 불리고 있었다. 사실 뭐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서울 바닥에 땅덩어리와 건물을 갖고 있으면 재산은 불어나기 마련이니까. 더욱이 괴수의 출현 빈도가 낮아 수선비가 적은 부동산이라면야.
“꼭 윗분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누구한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자기들 안전이 달렸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전력에 관한 문젠데. 안 그래요?”
“…….”
“이번엔 김하윤 씨에게 물어봅시다. 능력이 있었을 때로 가정해서 생각해 보자고요. 어땠겠습니까?”
“뭐가요.”
“본인은 능력이 있었을 때 사명감이나 뭐 그런 게 있었나요?”
“없었죠. 급식 먹던 시절에는 뭐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냥 그때는 다들 힘 주체 못 해서 과시하고 싶어 하잖아요. 강하면 약한 놈들 앞에서 약하면 아예 힘없는 사람들 앞에서.”
“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잘 모르겠네요. 전 비전투 계열이어서.”
하윤은 그 시절 텔레포터로 분류되어 있었다. 능력 측정이 어려운 점을 이용해 능력치를 숨기기도 하여서 일반적일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냥 다른 사람이랑 똑같았어요.”
그래도 그런 자신이 정의감을 드러낼 만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밖에 할 수 없었고 긴박한 상황이라 얼떨결에 한 거지.
‘그래도 나라를 한번 구하긴 했는데.’
아무 증거가 없고 밝혀서 좋은 일이 없기에 말하지 못하지만.
“위급상황이 오면 나나 제일 중요한 사람 챙기는 거. 그런 건 다른 사람도 다 그러지 않나?”
“전제를 좀 잘못한 것 같지만 확실히 말한 것만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네요.”
“하지만 정의감이나 뭐 그런 거에 앞서서 움직인 적은 없긴 한 것 같아요. 그게 내가 조각 있던 에스퍼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이기적인 새끼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
하윤은 걸음을 멈추고 박건영을 노려보았다. 박건영은 한걸음 떨어져서 장난이었노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는 박건영 씨는 정의감이나 에스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게 있습니까?”
“당연하죠. 그러니까 국가에 귀속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제 능력은 이런 공무보단 사심 채우기 딱 좋거든요.”
“국가에서 사심을 채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정치나 뭐 그런 쪽으로.”
“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하지만 이 정도 능력을 갖췄는데 야망도 없으면 어디 쓰겠습니까? 어쨌든 이 내가 국가에 소속된 것만으로 국익에 이바지하는 거 아닙니까?”
자신은 공익을 추구했다는 말에 하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번에는 박건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뭐, 사실은 이러나저러나 감시 대상일 거면 이쪽이 낫겠다 싶었던 거죠. 말하고 보니 저도 딱히 없는 건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죠? 비전투 쪽은 암만 훈련을 받아도 그런 마음은 잘 안 생기는 것 같아요.”
“어? 김하윤 씨는 그랬는지 몰라도 저는 아닌데요?”
“네, 그럼 계속 애국하세요.”
박건영은 하윤을 강가로 데려갔다. 인적이 아예 드문 으슥한 곳은 아니었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고 하면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내 차는 불편할 거고, 김하윤 씨는 차가 없고. 카페를 가자니 사람들이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들어서 곤란하고. 회사로 데려가자니 절차도 절차인데다 귀도 많고 입도 많은 곳이고. 그래서 여기가 적당하다 싶었어요. 트여 있고 사람은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이고. 게다가 도청하려면 잡음을 각오해야 하잖아요? 뭐 복원하면 그만이겠다 싶지만, 너무 자세한 건 넘어가죠.”
트집 잡을 거리가 몇 가지 있었지만, 박건영이 앞서 늘어놓은 선택지들보단 훨씬 나았다. 조금 갑갑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다. 눈과 목은 벌써 깔깔했지만.
“계속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제는 본론을 이야기해 봅시다. 전에는 뭐라도 잡아야 사니까 당장 손 내민 우리 손이라도 잡으라고 그런 건데. 이제는 이야기가 좀 달라졌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김하윤 씨는 지금 사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서.”
하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발뒤꿈치를 까딱이고만 있자 알아서 알아들은 박건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좀 이상하거든요.”
“……뭐가요?”
“안 죽으셨잖아요. 김하윤 씨.”
“질문이 좀 이상하네요?”
“이상하다고요. 그게. 김하윤 씨가 왜 안 죽었는지가.”
“실패했으니까.”
하윤의 대답에 박건영은 하윤과 나란히 있던 자리에서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하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죽을 용기로 살라는 말 혹시 알아요? 못 죽었으면 살아야 한다는 거.”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검은 눈을 반질거리며 말하는 박건영을 보며 들으면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김하윤 씨는 못 죽어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예요.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게.”
“…….”
“대체 왜 못 죽었습니까? 한두 번 시도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도 시도해 볼 법도 했고. 일반인도 아니었는데.”
확실히 박건영은 아는 게 많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을 잘 짚어 냈다. 까딱 잘못 흘렸다간 죄다 털릴 가능성이 컸다. 하윤은 하도 갑갑해서 머리 하나 빌리러 온 것이지 정보를 일방적으로 털리러 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핵심을 찾아 살살 건드리는 탓에 감이 예민해졌다.
‘내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알리면 안 된다.’
그가 직접 찾아낸다면야 어쩔 수 없겠으나, 자신의 입으론 말해선 안 된다. 별 이유는 없었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게요. 잘 안되더라고요. 무경이 얼굴이 눈에 밟혀서 그랬는지. 죽고 싶지 않았는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잘 안 됐어요.”
“…….”
“박건영 씨 말이 맞아요. 결국 못 죽어서 살아야만 하거든요. 과정이 뭐가 중요합니까. 결과가 중요하지. 안 그래요?”
“요즘 추세에 맞는 말은 아니네요. 공직자는 과정도 중요하거든요.”
“저는 아니라서.”
“아, 예.”
영 믿기지 않는지 박건영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갑갑한지 품을 뒤졌으나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손을 늘어트렸다. 하윤도 덩달아 품을 뒤졌으나 안타깝게도 담배를 찾지 못했다.
“말이 좀 안 맞는 거 김하윤 씨도 아시죠? 자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는데 뭐 또 시도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죽는 건 안 무섭고. 또 그런데 도움 될 만한 세력에게 접선해서 생각 좀 해 보게 조건 읊어 보라고 하고.”
자기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박건영의 입으로 들으니 훨씬 더 이상했다.
“사람이 좀 모순적이야. 뭐, 사람들이 다 이치에 맞게 사는 건 아니긴 하지만.”
“…….”
“그래서 내가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
“구미에 당기는 걸 줘야 할 텐데 그냥 읊어 보라고 하는 걸 보면 뭘 원하는지 자기도 모르는 것 같고.”
정신계라 그런지 족집게 같았다. 하윤에게 박건영은 어딜 가든 굶어 죽진 않을 것 같은 인간의 표본 같았다. 물론, 그러려면 입이 붙어 있어야겠지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일 기본적인 걸로 맞추는 건 어떻습니까?”
“기본요?”
“그래요. 기본요. 전에도 한번 말했었는데 클래식이 왜 클래식이겠어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많이 찾는 거라서 그런 거지.”
“……?”
“김하윤 씨에게 보통의 삶을 제공하겠습니다.”
보통의 삶. 하윤은 박건영의 말을 따라 입술을 달싹였다.
“김하윤 씨가 원래 영위하던 엘리트로 사는 삶은 사실 국가기관에서 들어주기 힘들어요. 능력을 잃은 건데 찾게 해 줄 수도 없고. 그리고 뭐 고등학생 때 능력 잃은 거라 뭘 회복해 줘야 할지도 애매하고. 그 나이에 고등교육기관 다시 돌아가서 애들이랑 훈련받고 싶은 거 아니잖아요? 찾을 명예도 없고. 돈은 또……. 제약 많고 금액 적은 거 알죠?”
박건영은 사실 자기는 돈으로 주는 게 제일 편하다며 능청을 떨었다.
“그럼 그쪽이 말하는 보통은 뭡니까?”
“그냥 뭐 사는데 필요한 소소한 것들. 그런데 김하윤 씨가 하긴 어려운 그런 거. 이를테면 핑계 같은 것도 될 수 있고.”
“핑계요?”
“네. 핑계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김하윤 씨에겐 그게 제일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박건영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윤은 바람을 피한다는 핑계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발끝으로 애먼 흙바닥만 차는데 박혀 있던 작은 돌이 튕겨 나가 강으로 날아갔다. 박건영은 퐁당 빠지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잠시 돌렸다.
재밌어 보였던지 바닥의 다른 작은 돌을 콱 걷어차 강물에 빠트렸다.
“김하윤 씨가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걸 도와줄게요. 회사에 취직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연애도 좋고 결혼도 좋고. 혹은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거나. 법에 저촉되지 않는 만남이면 뭐든 좋지 않겠습니까.”
“……전 무경이 조각인데요.”
“어차피 그분은 기억 못 하잖아요?”
“…….”
“나는 사실 조각이니 뭐니,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거 좀 그래요. 자기네들 사랑이 뭐라고. 자기들한테만 허락된 감정인 척 심취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요? 남들은 사랑 안 하고 사는 줄? 그거 따지고 보면 지독한 자기연민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고 못 사네 해도 그냥 다 살아요. 다 흘러가는 겁니다.”
박건영은 턱짓으로 강을 가리켰다. 날이 가물어 수심이 낮아졌지만 그래도 강이라고 잘 흘러가고 있었다. 쉼 없이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