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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98화 (98/162)

98화

“말마따나 그렇게 운명이면 이렇든 저렇든 하든 흘러가도 다시 만나겠지. 힘들어하면서도 운명이라 헤어질 수 없다고 서로 상처만 주며 괴롭게 사는 것보다 늘그막에 만나서 서로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때쯤이면 나쁜 기억도 한때라고 다 미화됐을 텐데.”

하윤은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던 박건영의 말이 지나치게 잘 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윤 또한 생각했었던 것들이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김하윤 씨처럼 당장 아프게 지고 갈 필요 없다 이겁니다. 지금 김하윤 씨 모습을 보세요. 예전 백무경 씨가 지금 김하윤 씨를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안 그래요? 백무경 씨는 김하윤 씨가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자기 곁에 있는 모습을 좋아하겠습니까?”

좋아하진 않더라도 서운해하기는 할 것이다. 하윤은 자신이 힘들어도, 혹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해도 그 애 하나 서운하게 만드는 게 싫었다.

“너무 조각 그런 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이제 어차피 아니잖아요? 저기 강물 바닥에 붙은 이끼처럼 세월 흐르는 대로 흐르는 방향대로 순리 따라서 그냥 살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하, 나는 또 무슨 말을 하나 했네. 나는 그게 싫은 거예요.”

“예?”

“예. 맞아요. 박건영 씨 말이 다 맞더라고요. 에스퍼들이 능력을 잃더라도 능력 쓰는 방법 오지게 안 잊어먹는 거. 자기가 있던 위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던 거요.”

“갑자기 그건 왜.”

“에스퍼들이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건 그 자리가 특별하기 때문이에요. 능력이 날 특별하게 해 주니까. 나한텐 무경이가 그래요. 내 조각. 내가 특별한 존재였다는 증거. 내 마지막 자존심. 내가 잃고 싶지 않던 삶과 연결된 유일한 지지대 같은 거.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은 있잖아요.”

다른 건 다 깎아 내고 깎아 내도 그것 하나만은 안 되는 것. 반대로 그것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렇지 않은, 자신에게 가장 귀했던 것.

“진작 그렇게 살 수 있었어요. 그게 뭐 어렵다고. 내가 속으로 걔를 얼마나 버렸다가 주웠는데. 그런데도 않은 건 내가 진짜 할 수 있어서. 버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비겁하게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도덕, 정의, 긍지. 인간으로서 사는 데 필요로 하지만, 또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무경은 자신이 문지기 김하윤으로서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랬었다.

“하지만 이미 버렸잖아요?”

“…….”

“결과가 어떻든 간에 버리긴 버린 거 아닙니까. 제대로 도망치지 못해서 이대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유난 떨지 말고 그냥 그런 채로 살아요.”

“다들 그러는 것처럼?”

“예.”

“그럼 저는 그걸 받고 그쪽에 뭘 해 줘야 합니까? 말마따나 무경이 저대로 팽개쳐 놓고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거?”

박건영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옷깃과 머리칼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분명 그를 할퀴는 건 황사를 머금고 있는 강바람인데 그게 박건영의 말처럼 느껴졌다. 일부러 더 긁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참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하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박건영이 한 말을 곱씹으며 필요한 정보를 짚어 내기만 했다.

‘능력을 찾은 건 아직 감을 못 잡은 것 같은데. 아니면 딱히 이용할 생각이 없든가. 아니면 방심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

그랬다면 고작 이딴 미끼를 갖고 흔들 리 없었다. 그냥 가만히 살라니.

‘이 내가 누군지 알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한물가다 못해 서너 물은 간 듯한 사람이 소싯적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윤은 그런 스스로가 우스워 콧등을 찡그리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김하윤 씨는 김하윤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치가 높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 서이주의 제자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국내에 몇 없는 텔레포터이기도 하고. 하지만 또 이젠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현장에 활용하기는 어렵고.”

“계속하세요.”

“그러니 요구하는 건 이전이랑 크게 달라질 거 없어요. 자문해 달라고 하면 자문해 주시면 되고, 또 김희원 씨랑 만나 달라면 만나 주시면 되고. 아, 이거 하나 정도는 추가되겠네요. 아무래도 희귀능력자라 유전자 요청이 있을 순 있겠습니다. 정확한 건 내가 실무자가 아니라서 이렇다고 단정할 순 없고.”

“…….”

“아, 또. 이제부터 경호가 붙을 겁니다. 그 이유는 김하윤 씨가 더 잘 알 거고. 근데 뭐 일반인 목숨 관련한 경호라 빡빡하고 그러진 않을 거예요. 그냥 평소 사시듯이 사시면 고생은 우리 쪽 애들이 할 겁니다. 한번 엿 먹어 보라고 일부러 돌발행동 같은 건 하지 않으시겠죠? 지성인답게 행동합시다.”

하윤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윗선에서 바라는 내 역할은 지금이 최선이라는 거군.’

방심을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일단은 지금의 역할 정도로만 이용할 모양인 듯 했다. 능력이 돌아온 것을 모른다면 괜히 건드려서 작금의 상태를 흩트리는 것보다 유지하는 편이 더 낫긴 나을 터였다.

‘비용이나 위험부담도 덜 할 테고.’

그러면 백무경을 지금처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던 하윤은 문득 셔츠 단추를 풀며 콧잔등의 땀을 훔치는 박건영을 발견했다.

“혹시 더우세요?”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조금 더 있으면 여름 소리가 나오겠습니다. 안 그래요?”

“그러게요. 볕이 너무 좋네요.”

햇살이 좋은 날이라 사람에 따라 덥다면 더울 수도 있겠으나, 하윤과 박건영이 있는 곳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늘에 서 있었다면 조금 서늘하게 느꼈을 수도 있었다. 하윤은 문득 자신을 몰아붙이던 박건영의 모습과 전 회사의 박 대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생존 본능이 뛰어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부리나케 도망가는 박 대리와 상대가 곤란할 정도로 핵심을 잘 짚어 내는 박건영의 모습이.

‘겁먹은 소형견이 짖는 것 같던 게 닮아 보인단 말이야.’

둘 다 소형견이라고 보기엔 덩치가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어찌 됐든 간에 둘 다 예민하게 반응하고 겁을 먹는데.

‘혹시 내 눈이랑 관련 있는 건가?’

둘 다 공교롭게도 예전 안경을 쓰지 않는 중에 반응이 있었다. 예전에 서이주가 이래저래 다른 사람 꾈까 봐 걱정되니 안경을 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을 꾀기보단 시비가 주로 걸렸지만.

“그럼 슬슬 이제 시원한 거 한잔 마시고 헤어지죠. 가면서 마저 이야기하고 음료 받으면 각자 갈 길 가기.”

“음료도 그쪽이 사시는 거죠?”

“……하윤씨는 혹시 좀 스스로가 뻔뻔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신가요?”

“어차피 제가 낸 세금에서 나가는 걸 텐데요. 좀 얻어먹어도 되죠.”

“으. 세금 진상 멘트.”

“…….”

하윤은 앞서 걸어가는 박건영의 등 뒤에서 조용히 중지를 들었다. 박건영은 같은 말이라도 좀 재수 없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쁜 새끼. 암만 그래도 꼭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해야 했냐고.’

하지만 또 맞는 말이라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요즘 세상에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다니. 하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다른 손의 중지도 함께 들었다. 오른쪽 왼쪽. 다시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먹여 준 다음 카페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시켰다.

‘왜 하필 박건영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서는.’

하윤은 후회가 막심하여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료는 왜 이렇게 늦게 나와.’

박건영은 간단한 음료를 시켜 이미 들고 제 갈 길 갔는데 자신은 아직도 음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도 손목시계도 없으면서 괜히 소매를 들치며 시간 확인하는 척을 하던 그때.

하윤은 누군가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건물이 있으리라 생각한 곳엔 그저 구름이 낀 하늘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하윤의 시선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이.’

하윤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세상은 일반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세계와 중첩되어 있다. 제각각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고 있으며 그 안의 문들이 우연히 겹치며 길이 생겨나는 것을 게이트라고 하는데, 세상과 유달리 비슷한 궤도를 도는 경우엔 일정 주기를 따라 문이 열리는 곳도 있었다.

하윤이 보는 문 또한 대한민국과 자주 겹치는 세상의 문이었다. 일정 주기와 출현 장소가 관측될 정도였는데, 지금은 열릴 주기도, 열리는 장소도 아니었다.

이 세상의 문과 아주 끄트머리도 닿지 않았으니 다른 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성가시지만, 위험한 괴수가 쏟아지는 곳도 아니었다. 그러나 닿으려는 저쪽 세상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손님, 음료 나왔습니다.”

하윤은 부름을 따라 자신을 보는 아르바이트생을 돌아보았다.

“손님?”

“가게 문 닫아요, 당장.”

“예?”

“대피소로 이동해요!”

하윤은 그 말을 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손님! 음료 받아 가세요!”

공중전화가 없어서 제보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굴리다가 망설이던 차에 길 건너편을 걸어가는 박건영이 보였다. 뭘 하느라 아직 저기에 있는진 몰랐으나 그의 전화가 필요했다.

“박건영! 야!”

조용하던 중에 바락 소리를 높이자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아이 씨!”

마음 같아선 당장 문을 열고 따라잡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았다. 끙 앓는 소리만 내던 차에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다. 하윤은 박건영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박건, 영! 박! 씨발, 야! 박건영!”

좀 멈춰 있을 것이지. 박건영은 어느새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았다. 차에 탄 걸까? 고개를 돌리던 하윤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세상의 문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억지로 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누가.’

자세히 보기 위해 하윤은 안경을 벗었다. 눈을 부릅떴을 때, 처음 문을 돌아보게 했던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

문득 왼쪽 손목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쥐고 있던 안경이 멀리 나가떨어졌으나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가 밀 듯이 움직인 저쪽 세상의 문이 기어코 이쪽 세상의 문 끄트머리를 따라잡았다. 그 순간 겹친 아주 작은 틈을 괴수들이 비집고 나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씨이팔.”

머릿속이 백짓장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정확히는 축적된 무력함이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를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하윤은 갑갑한 마음에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제는 전화를 빌려 제보나 할 때가 아니었다.

하윤은 급히 근처에 있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이 없고 카메라가 없는 곳을 찾아 몸을 숨긴 다음 문을 보기에 가장 가까운 장소로 이동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이제는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다고.’

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괴수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괴수의 종류를 특정할 수 있었다.

‘붉은 긴다리불가사리.’

철을 먹는다는 점에서 설화 속 불가살이의 이름을 따왔지만, 실상은 게나 거미를 닮았다. 크기는 다리 길이를 모함하여 측정하므로 일견 커 보이지만 30센티미터가 넘는 개체도 몸통은 테니스공 하나만 했다.

다리가 많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는 있었으나 뛰어오르지는 못했다. 뛰어오른다면 가늘고 긴 다리가 철을 먹은 몸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몸체가 바닥에 먼저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 긴다리불가사리는 일반인도 곧잘 잡을 수 있었다.

‘불가사리가 도망가기 전에 머리만 짓밟아 누르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상쇄하듯 불가사리는 여러 마리가 무리 지어 움직였다. 그리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 번식을 마친 수컷이었다. 문제는 암컷 불가사리는 수컷 불가사리에게 알을 낳고, 알은 수컷의 몸통을 양분으로 하여 태어난다는 점이었다.

수컷 불가사리는 새끼들을 위해, 혹은 새끼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새끼들이 먹을 등껍질을 키우려 철을 먹었다. 철을 편하게 뜯어먹기 위해 산성 물질이 주성분인 게거품을 뿜어냈다.

잡긴 쉽지만, 몽땅 다 잡지 않으면 심각한 피해가 속출했다. 게다가 껍질이 철과 비슷한 성분이라 어디 끼어 있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쇳덩이가 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씨발. 암만 무리를 짓더라고 수가 너무 많잖아.’

하윤은 이렇게 많은 수의 긴다리불가사리들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문 사이로 빠져나오는 긴다리불가사리들은 꼭 재난을 피해서 달아나는 곤충 떼 같았다.

‘저 너머에 대체 뭐가 있길래.’

한 마리씩 떨어졌다면 단번에 동강 나서 처리할 거리가 없었을 테지만 이번엔 워낙 많은 수가 한꺼번에 나오는 바람에 긴다리불가사리들은 서로 얽히며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는 점점 더 길어져 얼마 있지 않으면 도로에 닿을 것 같았다.

‘뭘 어떻게 해야.’

다리를 끊어내자니 거대한 철 기둥을 그대로 떨어트리는 것과 같고, 또 그대로 두자니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의 긴다리불가사리를 도로에 푸는 것과 다름없었다.

와중에 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긴다리불가사리 일부가 도로에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쇳덩어리에 도로는 금세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곳곳에서 사고가 속출했다. 메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차 사고로 인한 굉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차와 함께 찌그러지지 않은 사람들은 비명과 함께 바쁘게 대피하기 시작했고 이제야 재난 문자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헬기 소리가 들렸다. 착지 없이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사람이 몸을 내밀었다.

‘무경이.’

됐다. 무경이 있으면 어떻게든 정리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건.’

하윤은 하늘로 고개를 들어 긴다리불가사리가 기어 나오다 못해 누군가 욱여넣듯 튀어나오고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문끼리 더 겹치는 것만은 막아야 해.’

이번엔 닫을 문은 없으나 문을 움직여야 했다. 이전에도 지금도 할 줄 모르는 일이었으나, 자신이 해야 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컬러 렌즈 아래 하윤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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