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머릿속에 눈이 내린 것 같았다. 희고, 시리고, 생각이란 걸 좀 해 볼라치면 발로 짓밟은 눈처럼 엉망이 되는 것도.
어디서부터 뭘 하면 좋을까. 하윤은 눈을 질끈 감고 소파에 몸을 기대다가, 문득 박건영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사진과 함께 쪽지를 건네던 모습이었다.
‘박건영.’
박건영에게 털어놓는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가 비교적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떠올린 것은 그가 했던 말 때문이리라.
‘그래, 지금 상황에서 내가 줄 골라서 잡을 처지는 아니지.’
썩은 줄 잡았다가 떨어지면 그만이다. 지금은 살고자 잡는 게 아니라 뭐라도 잡고 싶어서 잡는 것이니까.
‘그래, 아무리 그래도 머리 하나보다는 머리 두 개가 낫겠지.’
하윤은 그때의 기억을 계속해서 더듬었다. 놀랍게도 쪽지에 쓰여 있던 전화번호가 기억이 났다. 다만 그게 맞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 번호를 저장해 둔 휴대전화는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고 쪽지는 아예 태워서 버렸다.
‘쓸데없이 꼼꼼하네.’
다른 중요한 일은 어영부영 처리했으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은 깔끔하게 끝내 놨다. 하윤은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다가 떠오른 숫자를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런 다음 공중전화가 있는 지하철 역사로 문을 열고 이동했다.
공중전화로 걸었기 때문일까. 박건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저쪽 동네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유행하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박건영의 전화번호가 아니든가.
박건영으로 추정되던 사람은 세 번째 전화가 곧 음성사서함으로 바뀌겠다 싶을 때야 전화를 받았다. 번호가 의심스러웠는지 심지어 받고도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저, 여보세요?”
받은 건지, 만 건지. 하윤이 재차 소리 높여 부르다가 에이 씨, 하고 짜증 섞인 말을 뱉을 때였다.
[여보는 아니지만, 전화 받았습니다? 누구십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이 떠올린 번호가 박건영의 번호가 맞았다는 것을 확신하자 하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학벌이 바뀌었을 텐데!
“안녕하세요, 박건영 씨. 김하윤입니다. 지금 통화할 수 있으십니까?”
[뭐……. 안 된다면 받지 않았겠죠? 무슨 일입니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직접 만났으면 해서요. ”
[흠. 할 이야기라. 김하윤 씨가 나를 만나서 할 이야기라……. 긴 이야깁니까?]
“박건영 씨가 어떻게 하시느냐에 따라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짧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뉘앙스인데. 알겠습니다. 시간 한번 내 보죠. 언제가 좋을까요?]
“오늘 됩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결정을 하고 싶을 것 같아서요.”
[오늘이라. 오늘……. 좋죠. 할 일은 많지만 하기 싫으니까 보도록 하죠.]
하윤은 박건영과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뒤 전화를 끊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이 또라이 새끼.’
박건영을 헐뜯었으나 전 직장인으로서 동감할 만한 말이었다.
할 일은 많지만 하기 싫다.
‘그런데 나는 퇴사를 했는데도 일을 하기가 싫냐.’
◇◇◇
약속한 시각에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 박건영은 하윤을 한정식집으로 데려갔다. 입원했었다는 소식을 들었던지 그는 하윤에게 전복죽 소짜를 시켜 주고, 자신은 백반 정식에 반찬을 추가했다. 하윤은 죽만 덩그러니 있는 자신의 자리와 달리 푸짐한 반찬을 앞에 두고 있는 박건영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자주 가는 집이라 미리 시켜 뒀어요. 기다리는 거 싫잖아.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다른 반찬은 먹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김하윤 씨 거는 죽 시켰어요. 여기 죽 괜찮아요. 물론 먹어 보지는 않았지만, 가끔 나는 냄새가 괜찮더라고요.”
죄다 백반 정식 먹는 집에 죽 냄새가 나는 것이면 죽이 나름 괜찮아서 수요가 있다는 소리 아니겠냐는 말이었다. 하윤은 더 비싼 메뉴에서 애피타이저로 나눠 준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저 이제 일반식 먹어도 되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사실 박건영의 말이 맞았다. 그냥 약이 올라서 해 본 소리지 솔직히 식욕이 돋지 않아 뭘 시켜 줬더라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하윤은 전복죽 위만 살살 긁어 수저에 묻히듯 떴다. 분명 부드러운 음식이었지만 입에 넣고 한참을 씹어야 목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술 뜨고 나자 벌써 피로가 느껴졌다. 수저를 막 놓으려는 순간, 박건영이 하윤을 불렀다.
“설마 그게 다 드신 건 아니죠?”
“설마요, 너무 뜨거워서 좀 식히느라고.”
다 먹었다고 하면 따라올 말이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하윤은 다시 수저를 쥐고 죽을 뜨는 둥 마는 둥 시늉했다.
“팍팍 좀 드세요. 오늘 뵀을 때 김하윤 씨 아이돌 준비하는 줄 알았잖아요. 안경 끼고도 렌즈를 낀 데다 비쩍 말라서.”
“…….”
“아, 이거 좀 차별 발언 같았나?”
박건영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하고 얄밉게 대꾸했다. 힘과 권력이 있고 충동성을 제어할 수 없었다면 주먹으로 얼굴을 짓뭉개 줬을 텐데. 하윤은 속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일반화하고 싶은 건 아닌데, 정신계열 능력자들은 사람을 좀 잘 긁는 것 같아요. 아, 이거 까는 말 아닙니다. 직업적 기술 같은 거로 생각해서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니까. 이를테면 존경 같은 거죠. 제가 박건영 씨를 존경한다고.”
“뭐, 할 말은 한다? 이런 느낌?”
“비슷하죠. 뭐.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면 한다. 이런 자신감? 자의식? 자존감? 뭐라고 해야 합니까? 셋 중 뭐가 됐든 다 높으신 것 같네요. 이건 에스퍼의 자질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박건영도 하윤도 비슷한 얼굴을 한 채 서로를 응시했다. 둘 다 낯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상대방을 욕하고 있었다.
“김하윤 씨는 보면 볼수록 재밌는 분이신 것 같아요. 그런 소리 자주 들으시죠?”
“글쎄요. 전 잘 모르겠네요.”
하윤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수저를 놓았다. 이젠 먹는 척하는 것도 지겨웠다.
“그리고. 아, 아니다.”
“뭡니까?”
“아이,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근데 뭐 약간 김하윤 씨가 불쾌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예, 그럼 마세요.”
하윤의 대답에 박건영은 아직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똑같이 의자에 몸을 기댄 박건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안경에 렌즈에. 혹시 겁이라도 드셨는지?”
웃음이 기침같이 터졌다. 하윤은 웃음을 그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겁을 먹었느냐 묻는 상대가 오히려 겁을 먹은 듯했다. 이런 적이 워낙 오랜만이라 긴가민가했는데,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윤은 어느새 눈 틈 사이로 번들거리는 박건영의 눈을 마주했다.
“설마요.”
“진짜?”
“그렇게 흔들고서도 못 뚫었는데 뭐가 겁나요. 안 그래요?”
박건영은 소리 없이 입꼬리만 활짝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윤은 그냥 자기 얼굴이 어색해서 그랬노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박건영의 말도 맞았다.
“아. 아니다. 박건영 씨 말이 맞아요. 제가 쫄았나 봐요. 그래서 여기 오는 데 애착 인형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건 망가져 버렸고, 되는 대로 이거라도 주워 썼죠.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박건영은 말없이 탁자에 올리고 있던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하윤의 말을 곱씹듯이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돌연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문질렀다.
“……이동하긴 한 건데 혹시 무슨 이유로 호출했는지 간단하게 물어도 되겠습니까? 긴장하셨다니까 덩달아 긴장이 돼서.”
좀 더 비꼬며 기 싸움을 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하윤은 짧은 한숨과 함께 용건을 말했다.
“그냥.”
“그냥?”
“그쪽 동아줄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브리핑이나 한번 들어 보려고요. 그러고 나서 잡을지 말지 생각해 보는 거죠. 지난번엔 좀 생각할 거리가 없었잖아요? 그쪽이 일방적으로 쑤시고만 갔지.”
“제가 전에 김하윤 씨가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렸었나요? 김하윤 씨는 지금 뭐 고를 처지가 아니거든요. 누가 잡으라고 하면 되는 대로, 그게 뭐라도 잡으셔야 해요. 그래야…….”
“…….”
“그래야……. 씨발, 사니까.”
박건영은 탄식을 쏟아 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아, 이래서 조각 있는 애들은 안 돼.”
쯧쯧쯧. 혀를 찬 박건영은 때마침 식당 종업원이 내려놓은 숭늉을 마셨다. 그는 태연하게 이 숭늉이야말로 이 집의 본체라며 하윤에게 마시라고 권했다.
“병원에 갔단 말에 대충 예상은 하기는 했거든요. 그래도 50대 50이니까. 습격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건 없었나 봐요?”
“예. 뭐. 생각보다 치안율이 높더라고요.”
박건영과 하윤은 동시에 웃었다. 서로의 헛소리가 우연하게도 서로의 웃는 점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웃음과는 반대로 하윤은 자신이 박건영과 지독하게도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박건영이 내 상사였으면 입사하자마자 바로 튀었다.’
박건영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적당한 장소로 이동하며 조각을 가진 에스퍼들을 성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조각을 가진 에스퍼들은 도덕이 없었다.
오로지 조각인 서로만 중요하여 다른 사람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어서 인류애도 없고 직업의식도 사명감도 없다고. 그래서 많은 능력이 있음에도 헛되이 쓰거나 혹은 쓰지 않는다고.
박건영은 그 예시로 무경을 들었다. 탁월한 보기 선택에 하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정신 조작계 능력자라 그런지 핵심을 잘 알아차렸다.
“백 소령도 비슷하죠. 이 판이 암만 에스퍼들끼린 물 진급이라고 해도 진급 욕심도 없고, 진급 욕심이 없으니 사내 정치도 관심이 없고. 능력이 대단한 것에 비해 야망이나 그런 거 없잖아요? 일이 아무리 많고 고되고, 사람들이 힘들게 해도 그 사람은 별로 힘들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조금 피곤하고 귀찮을 뿐이지.”
“…….”
“백 소령의 목표는 행방이 묘연한 자기 조각을 찾는 거였죠. 그러기 위해서 정보 접근이 비교적 쉬운 군에 들어왔고, 군에 들어왔으니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하고 있고요. 이를테면 백 소령에게 대한민국 국민은 덤인 거죠. 그냥.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조각을 구하는 김에 덩달아 다른 국민도 구해 주는 그런 거.”
“……그래도 무경이는.”
반사적으로 무경을 두둔하려 했으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