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어서.”
무경의 재촉에 김하윤의 숨이 떨렸다. 한 번 더 죽을 뜨던 무경은 하윤의 숨소리에 급히 김하윤의 안색을 살폈다. 김하윤은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어디 안 좋아? 뱉을래?”
놀란 무경이 입 밑에 손을 대 주려는 순간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경이 곧장 따라붙으려 했으나 그의 몸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잘못 휘두른 손에 맞은 죽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건 뭐야.’
몸을 잠시 뗐다가 다시 움직이자 그때는 무경을 가로막지 않았다. 무경은 급히 하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막는 사이 하윤은 거실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 냈다. 떨어진 죽을 밟아 발이 더러워지든 말든 무경은 하윤에게 다가갔다.
“왜, 왜 그러는 건데. 몸이 안 좋았었어?”
조금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고서도 하윤은 구역질을 멈추지 못했다. 눈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경은 하윤에게 손을 뻗으며 정신없이 사과하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해.”
괴로워하는 하윤을 보며 겁을 집어먹었다. 억지로 먹이면 안 됐는데. 의사 말대로 먹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 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대로 뒀으면 또 안 먹었을 텐데. 그러면……. 그렇게 되면…….
머릿속에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하윤이 구역질을 멈추길 바랐다. 그의 등을 두드리며 어찌 달래 보려 하는 순간, 하윤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병원에 가자.”
“됐어,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은데! 가자고!”
무경은 하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대로 잡아당겨 일으키려는 순간 하윤은 온몸의 힘을 다해 무경의 손을 뿌리쳤다.
“제발!”
“…….”
하윤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경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김하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경은 다시 손을 잡지 못한 채로 입술만 달싹였다. 하윤은 곧장 눈을 내리깔더니 무경을 밀어내며 애원했다.
“제발. 그냥 조금만 혼자 있게 해 줘.”
“…….”
“무경아,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하윤이 밀어내 봤자 가볍게 툭 미는 정도에 불과했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 그가 미는 대로 밀려났다. 무경이 욕실에서 나가자 하윤은 곧장 문을 닫았다. 고작 몇 센티 되지 않는 문밖에 있을 뿐인데 김하윤이 아주 먼 곳에 간 것만 같았다.
바로 문 너머에 존재하는 게 뻔히 느껴지는데도.
무경은 문 앞에서 떠나지 못한 채 가만 서서 문에 귀를 기울였다. 속을 게워 내는 소리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미안해, 내가 미안해.
사과하려는데 이게 뭐라고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가슴만 불안한 사람처럼 쿵쿵 뛰었다. 그때 내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윤이 벽을 짚고 일어났다. 입고 있던 상의를 훌렁 벗더니 세면대에서 씻기 시작했다.
“김하윤, 내가 할게. 내가 한다니까.”
하윤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묵묵히 옷을 빨았다.
“……상처에 물 다 들어가잖아.”
그렇게 오래 닿는 건 안 좋다고 했잖아. 무경의 애원에도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어코 옷을 다 빨고 나와서는 베란다에 널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양 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왜 그렇게 사람을 서럽게 하던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서럽게 하던지 따져 묻지도 못했다.
무경은 거실에서 홀로 감정을 삭이다가 주방을 정리했다. 쏟아진 죽과 깨진 그릇을 정리하고 바닥을 말끔히 닦았다. 발바닥이 따끔거려서 봤더니 살이 조금 베여 있었다. 무경은 이미 멀끔한 바닥을 한 번 더 샅샅이 닦았다. 저야 아무렇지 않지만 다른 누구한테는 아닐 테니까.
정리를 마친 뒤 방에 들어가자 김하윤은 이미 잠든 뒤였다. 침대 구석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잠든 모습을 보던 무경은 조심스레 이불을 들쳤다. 전등으로 발을 비춰 보고는 새로 베인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불을 본래대로 내려놓은 무경은 침대 위로 올라가 잠든 하윤의 얼굴을 살폈다. 속을 게운 탓인지 아직 낯빛이 좋지 않았다.
“……너 너무 아프지 마.”
무경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무경은 김하윤이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너무 많이 아프면 그에게 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무뎌지면 나는 또…….’
무뎌지면 안 된다. 그는 김하윤을 항상 미워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무경은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는 하윤의 손을 살피다가, 아직 젖어 있는 반창고를 마른 수건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어떻게든 물기를 빼 보려고 노력하다가 하윤이 손을 빼며 뒤척이자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하윤은 무경에게서 획 몸을 돌렸다. 무경은 하윤의 등을 노려보다가 자리에 누웠다. 몸을 잠시 뒤척이다가 하윤이 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끝에 하윤의 옷자락을 걸고 나자 비로소 준비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불과 어제만 해도 잠자리가 불편해 새벽 내내 뒤척인 것이 무색했다. 그제야 자신이 길바닥에서도, 땅속에서도 곧잘 잠들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가볍게 웃은 무경은 밀려드는 잠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숨소리가 바뀌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 내내 감겨 있던 하윤이 눈을 반짝 떴다.
◇◇◇
“…….”
몸과 눈꺼풀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하윤은 반짝 눈을 뜬 것과 달리 다시 게슴츠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잠을 깨긴 했는데 시야를 잡기 어려웠다. 하윤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 침대가 아니라 푹신하고 익숙한 침대였으나 여기만 누우면 몸이 긴장돼 썩 달갑지 않았다. 하윤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
옷이 어디 걸린 것처럼 당기더니 무경의 손가락에 옷자락이 걸려 있었다. 옷을 빼자 무경이 곧장 뒤척였다. 지레 놀란 하윤은 이불을 그의 손끝에 걸었다. 그러곤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 무경아, 괜찮아. 더 자.”
알아들었던지, 아니면 이불로 만족했던지 무경은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가 달라지지 않았는지 귀 기울이다가 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을 따라 식은땀이 목을 타고 흘렀다.
하윤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문대신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마음 편히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후우우.”
몸속에 있는 공기를 다 빼내듯 긴 숨을 내쉬어도 갑갑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윤은 차가운 베란다 타일 위에 앉아 무릎을 세웠다. 옷을 널 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베란다 창이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 창 앞엔 철창이 서 있었다. 손은 들어가지만, 몸은 넣지 못할 정도였다. 언뜻 보면 허술하게 설치된 것 같지만 양 끝에 센서가 부착되어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철창 자체의 소리도 소리거니와 어딘가로 정보가 전송될 것이다.
무경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설치한 걸까. 하윤은 한숨과 함께 입술과 이를 떼지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망한 것 같은데.”
무경은 염동력이 발휘되기 전 단계의 힘으로 주변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구순술에 적용하여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차리곤 했다. 반대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게 움직이지 않거나 입술을 살로 뭉개면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망한 것 같다는 중얼거림을 들어 봤자 뭐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경과 마주하기 싫을 때 나오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하윤은 재차 한숨을 내쉬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벽의 냉기가 머리를 차갑게 했으나 두뇌 활동엔 이렇다 할 도움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설프게 다치고 정신을 잃은 탓에 죽기로 했던 날짜를 훌쩍 넘겨 버렸다.
거기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던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영향을 받은 건지 무경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경이 상태는 이미 슬슬 안 좋아진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그래서 올해 생일을 마지노선으로 잡지 않았던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달아나고만 싶었고 아무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다. 여태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하윤은 베란다 창 너머에서 덜그럭거리고 있는 [문]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넘어갔다. 주방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식칼을 들고는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
칼을 하윤의 복부를 찌르지 못했다. 칼을 찔러 넣은 곳에 문이 열려서 칼날이 그리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하윤은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이고 자신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작금의 꼴이 우스워 코웃음을 터트렸다.
“씨발,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글러 먹은 인생의 표본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윤은 칼을 던져 놓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날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어떻게 하나만 고민했는데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피하듯 잠을 자고, 일어나면 잠으로 보낸 시간이 아까워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낚싯줄이나 철사 같은 거로 목을 잘라 내면?’
그렇게 얇고 긴 것을 [문]이 대응해 낼 수 있을까?
‘이건 전에도 생각했던 것 같기는 한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자 생각은 했었지만, 시도는 해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틈이 없었다. 하윤은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생각하다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밖에 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경이 잠에서 깰 것 같았다.
‘좀 깨면 어때.’
삐죽 올라온 심술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몸은 또 침실로 향했다. 다시 자리에 누워 자는 척 눈을 감자 무경이 때마침 하윤이 손에 걸어 뒀던 이불을 그러쥐었다. 감촉이 이상했던지 곧장 이불을 팽개치고 곁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윤은 손을 피하려 아예 몸을 돌려 침대 끝에 붙었다. 그러자 무경은 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아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엉금 기어와 하윤을 끌어안았다.
“왜 그렇게 침대 끝에 붙어 있어. 떨어지면 어쩌려고. 안으로 가자.”
무경은 하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다가 익숙하게 목과 뺨을 지분거렸다. 점차 입술로 다가오는 바람에 하윤이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자, 그 위를 입술로 짓누르며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푸스스 웃었다.
“……밖에 나갔다가 왔어? 몸이 차가운데. 어제처럼 나쁜 꿈을 꿨어?”
무경은 잠긴 목소리로 느릿하게 속살거렸다. 하윤은 무경이 하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사이 무경은 하윤의 대답을 듣는 대신 그의 뺨에 소리 나게 입 맞췄다. 그러곤 하윤을 안아 침대 한가운데 눕혔다. 더듬더듬 자리를 살펴 준 다음 저 또한 하윤의 곁에 바짝 붙었다.
“잠이 안 오면 나도 깨우지. ……내가 업어 주면 너 잘 자잖아.”
“…….”
하윤의 당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경은 하윤의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달래듯 복부를 살살 문지르다가 하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질린다, 진짜.’
이젠 백무경이 이럴 때마다 진절머리가 났다. 돌아오는가 싶다가도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는가 단념하면 돌아올 것처럼, 옛날처럼 굴었다. 그럼 저는 때때마다 설렜다가 다시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것도 무경이 돌아오길 기다릴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무경이 돌아올 것 같이 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 못해 바닥에 떨어진 제 심장을 누군가 발로 짓이기는 것 같았다. 무섭고 싫었다가 또 좋았던 기억 때문에 떨쳐 내지도 못했다.
‘어쩌려고 이래, 대체 어쩌려고.’
지금 무경은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유리잔 더미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하윤은 무경을 무너트리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니길 바랐다.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고 겁쟁이라고 조롱해도 좋았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피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뭐든. 그것이 설령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물론 그건 실패했지만.
하윤은 자신의 처지를 조소하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잠든 무경의 머리끝만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이내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끔찍해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
눈만 감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언제 잠들었던 걸까. 하윤은 몸을 퍽 걷어차이는 충격에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 전에 몸은 이미 침대를 벗어나 떨어졌고 하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반사적으로 연 문을 다시 닫는 것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이렇다 할 낙법을 시도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나동그라져 벽에 얼굴을 박았다.
하윤은 찧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골이 울려 눈을 떠도 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그사이 부딪혀 얼얼한 코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하윤은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픔이 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 된 것인지 대강 예상이 갔다.
‘깨어 있었어야 했는데.’
무경이 닿으면 잘 깨면서 이번엔 왜 잠을 잤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무경이 다시 깊이 잠든 후에 빠져나왔어야지.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윤은 자신을 욕하며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
잘못 떨어진 탓인지 허리가 뜨끔했다. 하윤은 그대로 멈추고선 미간을 찡그렸다.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신음을 삼키자 어느새 다가온 무경이 손을 내밀었다.
“허리 다쳤어? 어디 봐.”
“아니. 손대지 마.”
“…….”
“……내가 알아서 할게.”
“구급차 부를까?”
“아니야, 됐어.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냥 둬.”
“하지만.”
“무경아.”
하윤은 무경의 무릎을 밀어냈다. 힘을 주지 않았으나 무경은 하윤이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났다. 저 또한 자신이 걷어차 하윤이 이렇게 나동그라질 줄 몰랐기 때문이리라.
‘그냥 날 보고 잠결에 놀란 거거나.’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아팠던 것이 어느새 덜해졌다. 하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조금 움직였다. 머리를 바로 들 순 없었지만,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 더 나았다. 하윤은 그제야 코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
하도 아파서 코뼈가 부러져 살이 찢어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무경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휴지를 내밀었다. 무경은 그답지 않게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그가 뱉는 말들은 허리가 동강 잘려져 있었다.
너무 놀라서. 당황한 나머지. 잡으려고 했는데.
맺지 못한 말들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사이 하윤은 눈을 깜빡였다. 통증이 참을 만큼 잦아들고 시야도 확보되었다. 그래서 하윤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했다.
“내가 혼자 자는 거에 너무 익숙해졌나 봐. 혼자 쓰듯이 움직이다 보니까 네가 있는 곳까지 넘어가 버렸나 봐. 너 나랑 닿는 거 싫어하는데. 그러면 안 됐는데. 미안.”
“…….”
“너도 나 찼으니까 이건 그냥 없었던 일로 치자. 나도 오늘부턴 그냥 소파에서 잘게.”
“…….”
“무경아. 그렇게 하자, 응?”
무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하윤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얼핏 예전에 서운해하던 표정과 닮았다. 하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려다가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보고는 뒤로 물렸다.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가만히 굳어 있는 무경을 지나칠 때, 무경이 유독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날 비겁하게 만들더라.”
“…….”
하윤은 대답하는 대신 욕실 문을 닫았다. 더러워진 옷을 벗고 곧장 더러운 몸을 씻기 시작했다. 분명 비누칠해서 지워 냈는데도 오래 묵은 오물처럼 계속 냄새가 났다.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