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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94화 (94/162)

94화

봄이 완연한 계절이라 해가 제법 길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캄캄했을 시간인데 끄트머리긴 해도 해가 남아 있었다. 김하윤은 빌딩 사이에 걸린 불그스름한 노을 끝자락을 보며 무경이 생각과 비슷한 말을 했다.

“봄은 봄인가 보다. 해가 제법 길어졌네.”

“…….”

볕 좋은 양지에 있던 나무들만 드문드문 꽃이 피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탐스럽게 틔워내다 못해 꽃잎을 거의 털어 내고 초록 잎을 틔웠다.

“입원하기 전엔 그래도 꽃잎이 좀 달려 있었는데. 이젠 다 없네.”

봄은 며칠 차이가 크니까. 무경은 속으로 김하윤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든 말든 김하윤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예전에 퇴원할 때 생각난다. 그때도 여름에 입원했었는데 퇴원할 때는 가을이었거든. 아, 넌 좀 다른가? 그때 우리 퇴원 시기가 다르긴 했는데.”

김하윤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웃음인가 하면 한숨 같고, 한숨인가 하면 또 마냥 한숨을 아닌 것 같은. 김하윤은 자신의 앞에서 소리 내선 잘 웃지 않았으니 그냥 한숨일지도 몰랐다. 그 때문이었을까. 무경은 하윤의 말에 대꾸했다.

“언제?”

“예전에. 십 년쯤 전에. 그때도 여기가 이렇게 막혔었거든.”

“…….”

“그땐 복구공사 한다고 막힌다고 했었는데, 공사도 안 하면서 막히는 거 보면 그냥 막히는 구간인 것 같아. 그렇지?”

하윤의 말에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그러나 정체되는 구간인 만큼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

“차 움직여지면 나 저기 사거리서 내려 줘. 지하철 타고 갈게.”

“……?”

“나도 우리 집 가야지.”

“네 자취방?”

“어어.”

“너 거기 못 가.”

“뭐?”

“내가 설명 안 했나? 네가 에스퍼 전용 병원에 왜 입원했는지.”

“듣긴 했는데, 감시 인원이 있다며? 그럼 내가 가는 곳 따라붙을 것이고 내가 어디에 가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상관이 왜 없어?”

“……?”

내내 창밖을 바라보던 김하윤의 시선이 그제야 무경에게로 돌아왔다.

“거긴 경호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잖아. 장소를 옮길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경호 대상 몰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경호하기 그나마 적합한 장소인 곳으로 옮겨야지.”

사실 김하윤의 집이 아니기만 하면 됐다. 다른 곳 어디든 김하윤의 집만큼 끔찍하진 않을 테니까.

“거기가 어딘데?”

“우리 집.”

무경의 대답에 김하윤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미리 준비했던 변명만 늘어놓았다. 무경의 잦은 폭주로 인해 잦은 모니터링이 들어갔던 곳이고, 교통편도 편리했다. 근처에 작으나마 관련 시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무경이 곁에 있으니 대처하기도 수월했다.

이만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으리라.

“…….”

반박할 줄 알았는데 김하윤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낯으로 다시 창밖을 응시하기만 했다. 언뜻 쳐다봤을 때 무경이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또 금세 표정을 바꿨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그 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김하윤은 조용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 때쯤에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호에 걸렸을 때 깨워도 봤으나 깨운 품이 무색하게 다시 잠들었다.

‘잠을 못 잔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이미 며칠을 깨지도 않고 깊이 잤으면서. 남은 잠이 아직도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주차를 마친 무경은 다시 하윤을 깨웠다. 깨지 않으면 안아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도 눈을 반짝 떴다.

그 잠깐 사이 깊이 잤었던지 흰자가 빨갰다.

“올라가자.”

“……그래.”

대답은 잘해 놓고 하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쉬더니 문손잡이를 잡고는 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왜?”

“아니, 그냥. 옛날 버릇이 나올 뻔해서.”

“……?”

무경이 의아해하는 사이 하윤은 차에서 내렸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한번 휘청했으나 곧 중심을 잡았다. 무경은 철렁거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윤의 곁에 다가갔다.

“괜찮겠어?”

하윤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기는 했으나 달리 뭐라 할 수 없어 짐이나 꺼내 들었다.

“나도 좀 들게. 줘.”

“허튼소리 하지 말고 승강기나 잡아.”

짐은 부피만 클 뿐 무겁지도 않았다. 게다가 염동력으로 들면 그만이라 김하윤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무경의 대답에 김하윤은 머쓱해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무경은 하윤을 먼저 앞세워 안으로 들여보냈다. 김하윤이 벗어 둔 신발 반대편에 신발을 벗고는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발 한 켤레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가슴이 술렁이는지.

무경은 황급히 시선을 떼고 겉옷을 벗으며 복도를 걸어가는 김하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휘청거려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그래, 괜히 또 넘어져서 다칠까 봐.’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욕실에 들어가던 하윤은 벽을 잡고서 무경을 돌아보았다.

“……왜?”

“뭐가?”

“계속 보길래. 할 말이 있나 싶어서. 혹시 내가 거슬리게 했어?”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무경의 대답에 하윤은 이번에도 별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움직여야지. 뭘 이렇게 멍하니 서 있어.’

자신을 다그쳤지만 발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김하윤이 아니라 꼭 자신이 발을 다친 것만 같았다.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

무경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미간을 찡그리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때맞춰 김하윤이 욕실에서 나왔다. 세수를 어떻게 했는지 옷이 젖어 있었다.

“말을 하지. 손 젖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김하윤은 물 닿는 정도로 상처가 덧날 시기가 아니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김하윤같이 조심성 없이 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덧나고 말 것이다.

‘조심성이 있었으면 다치지도 않았겠지.’

무경은 하윤을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물기를 제대로 닦으라고 수건을 던져 주고는 하윤이 갈아입을 잠옷을 내어 왔다.

“그냥 안 입는 티셔츠랑 바지만 주면 되는데. 잠옷 새것 같은데 나 줘도 되겠어?”

“그냥 입어. 어차피 안 입으니까.”

하윤을 입히려고 샀으니 자신이 안 입는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경은 하윤에게 잠옷을 떠넘기며 말했다.

“냉장고 안에 죽 있어. 그거 데워 먹어. 나는 좀 씻고 나올 테니까.”

“아, 난 괜찮은데.”

“헛소리하지 말고 먹어. 분명 먹으라고 했어.”

하윤은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경은 하윤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욕실로 들어갔다.

무경이 몸을 간단히 씻는 사이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냉장고를 열고 빤히 바라보다가 무경이 미리 준비한 죽통을 꺼냈다. 양이 많았는지 그릇에 덜어 내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종이컵에 두 숟갈을 덜었다.

‘시발, 맛만 보는 것도 아니고. 식사해야지.’

말이 두 숟갈이지 두 번째는 이미 붙어 있던 죽 때문에 얼마 덜어지지도 않았다. 무경은 씻다 말고 주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이진 않았으나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이 김하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았다.

김하윤은 영 먹기 싫었던지 종이컵에 든 죽을 버리고 병원에서 가져온 짐에서 식사 대용 고단백 음료를 꺼내 마셨다. 무경은 부아가 치밀어서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단념했다.

‘그래, 그거라도 마셔라.’

그러나 무경이 단념한 것을 알았던지 음료를 반쯤 먹다가 내려놓았다. 무경은 짜증을 참을 수 없어 거칠게 얼굴을 쓸어 올렸다. 무경에게 쏟아지던 샤워기 물줄기가 그에게 닿기 전에 튕겨 나갔다.

‘조금만 더 먹지. 조금만 더.’

더 먹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의사는 하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그냥 그가 내킬 때 편하게 먹게 해 주라고 했지만 그건 또 김하윤을 모르는 소리였다.

‘집 나가자마자 비쩍 말라 버렸는데.’

비쩍 마른 탓이 무엇이겠는가. 끼니때 제대로 안 챙기고 저 먹고 싶을 때만 먹어서 그런 것 아닌가. 게다가 김하윤은 세끼 때맞춰서 챙겨 줘도 여름이면 살이 곧잘 빠졌다. 이제 여름이 코앞이었다. 부지런히 먹여서 살을 찌워 놓아야 여름 나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래, 그래야 여름을 나지.’

무경은 몸을 닦아 줄 때 봤던 김하윤의 몸을 떠올렸다. 무경은 샤워기를 끄고 얼굴에 흘러내린 물기를 대강 훑어 냈다. 아무래도 곁에 가서 참견해야 할 것 같았다.

문득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김하윤 먹는 걸 신경 쓰고 있지.’

김하윤이 더 먹나 안 먹나 신경을 곤두세워 살피고 있는 자기 모습이 더없이 낯설다가 또 어느 순간엔 익숙하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생각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김하윤이 움직이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병원에 가야 했던 건 김하윤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지.’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급하다고 생각한 일을 하려 움직였다.

주방으로 향한 무경은 멍하니 앉아 있는 하윤에게 다가가 그가 먹다 남겨 놓은 음료 캔을 집어 들었다. 캔을 여러 번 기울인 게 무색할 정도로 먹은 티가 나지 않았다.

“아, 이리 줘. 내가 치울게.”

“…….”

김하윤은 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경은 음료를 개수대에 쏟아 버리고 냉장고에서 죽과 반찬, 그리고 자신이 먹을 도시락을 꺼냈다. 죽을 데우는 동안 슬그머니 일어나려는 김하윤을 잡아 다시 앉혔다.

알림음에 맞춰 죽그릇을 꺼내고 위아래가 고루 섞이도록 수저로 휘저었다. 윗면이 펄펄 끓은 것과 대조적으로 아래는 미지근했다. 위아래를 고루 섞자 바로 먹기 딱 좋을 온도가 됐다. 무경은 그것을 김하윤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나 방금 다 먹었는데.”

무경은 대답 대신 죽그릇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나 김하윤은 수저를 드는 대신 식탁을 짚은 채 망설였다. 다그쳐서 그러는 걸까? 무경은 잘 먹던 반찬을 앞에 밀고 신경 쓰지 않는 척 자신의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도시락을 절반 가까이 비우는 동안 김하윤은 식사하지 않았다. 무경이 바라보자 황급히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 끝에 죽을 조금 묻혀 먹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그저 머금고 있기만 할 뿐 삼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무경은 하윤에게서 숟가락을 빼앗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일어나려는 김하윤의 어깨를 내리누른 다음 죽을 떠서 입에 갖다 댔다.

“입 벌려.”

“…….”

죽을 머금고 있는 탓에 김하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눈만 치켜뜬 채로 무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경은 아랑곳없이 김하윤의 턱을 잡았다. 힘을 주지 않고 살짝 흔들기만 하자 김하윤이 한숨과 함께 입을 벌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죽이 든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반이라도 먹어. 너 약 먹어야 하니까 그 정도는 먹어야 해.”

숟가락으로 그릇에 담긴 죽을 반으로 나누자 김하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씹을 것도 없는 죽을 한참 씹은 뒤에야 삼키고선 무경의 손에서 숟가락을 받아 내려 했다.

“줘, 내가 먹을게.”

“그러게 진작 먹지 그랬어?”

무경은 다시 죽을 떠서 김하윤의 입에 갖다 댔다. 고개를 빼려 할 때 손아귀에 힘을 주자 없는 볼살이나마 불룩 올라왔다.

“자.”

무경이 다시 숟가락을 들이밀자 김하윤은 작게 입을 벌렸다. 죽을 그득 올렸던 만큼 입술에 깎인 죽이 옆으로 밀려났다. 무경은 숟가락으로 재빠르게 양옆을 긁어 다시 죽을 김하윤의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입에 머금고 있지만 말고 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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