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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93화 (93/162)

93화

무경은 하윤의 침대 옆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짧은 밤을 보냈다. 새벽 일찍 일어나 김하윤의 몸을 살뜰하게 살핀 뒤 집에 돌아가 간단하게 씻고 갈아입은 다음 다시 일과를 시작했다.

정신없이 일이 몰아친 하루였지만 뜻밖에도 정시 퇴근이 가능했다. 무경은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간다는 것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난스레 기분이 좋았다.

식사 때가 겹쳐 병원 안이 온통 음식 냄새로 진동했다. 평소라면 딱히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요즘은 음식 냄새가 사람 사는 냄새같이 느껴졌다. 이 냄새를 따라서 김하윤도 곧 깨어나리라고 무경은 그답지 않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하윤은 잠들어 있었지만 해가 남아 있을 때 봐서 그런지 상태가 좋게 느껴졌다. 의사 말대로 정말로 조만간 깨어날 것 같았다.

‘정말로 조만간.’

무경은 작게 웃으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막 손을 씻으려 비누칠을 할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랑 다른 소리에 무경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시야는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벽이 있든 말든 그는 김하윤을 훤히 느낄 수 있었다.

뒤척이던 김하윤은 끙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눈을 작게나마 뜨더니 주변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 씨발.”

난데없는 김하윤의 탄식 섞인 욕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경은 파랗게 질린 채 세면대를 응시했다. 틀어 놓은 물이 그저 수챗구멍으로 흘러갈 뿐이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어 어쩔 수가 없었다.

‘욕 좀 한 게 뭐라고. 고작 씨발밖에 안 했는데.’

더한 욕을 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종종 봐 왔다. 훈련받은 초능력자의 경우 이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니 욕 정도는 반응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경은 놀란 자신을 달래려 애썼다.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달래야 하는지도 몰랐으면서도.

‘진정해.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경은 어느새 달달 떨리기 시작한 손을 맞잡고 숨을 고르다가, 겨우 비눗물을 씻어 냈다. 숱하게 중얼거린 위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대신 김하윤의 침묵이 도움이 되었다. 무경은 희게 질린 얼굴을 들킬까 봐 계속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게 딱히 소용없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무경은 체념과 함께 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병실의 모습과 눈을 반쯤 뜬 김하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하윤은 고개를 돌려 무경을 보고는 놀랐다는 양 눈을 반짝 떴다. 하지만 아직 눈꺼풀이 무거운지 금세 눈을 끔뻑였다.

“……무경아.”

“…….”

오래 잠들었던 탓일까. 김하윤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하윤은 부름만 듣고 가만히 서 있는 무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경이 다가와 잡지 않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손을 떨궜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

“…….”

누가 목을 틀어쥔 것처럼 목이 멨다. 그냥 깨어났느냐고 묻기만 해도 될 텐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소같이 저를 바라보는 김하윤의 시선에 속이 꼬였다. 무경은 마른침만 꼴깍이다가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나 왜 여기 있어? 물어봐도 돼?”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으나, 끔뻑이는 눈꺼풀 사이로 비친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그 안에 든 원망을 읽자 이상하게 속이 뜨끔거렸다. 바늘이나 유리 조각을 삼킨 것처럼, 숨을 쉬고 목을 꼴깍이는 동안 내내 속을 아프게 했다.

무경이 말을 하지 않자 하윤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홀로 기억을 떠올리듯 미간을 찡그린 채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아, 또 삼킨 건가. 그러면 그때 들린 소리가.”

“대체 뭐가?”

“아…….”

무경이 묻자 하윤은 작게 신음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양 이마를 짚다가, 자신의 손을 보고는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

“김하윤!”

무경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려는 하윤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렀다. 하윤은 그제야 다시 무경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현관문 소리가 들렸었거든. 그게 너였구나.”

“…….”

“그런데 문은 어떻게 열고 왔어? 부순 거 아니지?”

“패드에 지문 남아 있는 거 아무 순서로 누르니까 열리던데.”

막 눌러서 어느 순서로 눌렀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하자 하윤은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목을 잡고선 물을 마셔도 되는지 물었다.

“곧 의사 올 거야. 확인받고 마셔.”

무경은 그제야 하윤의 침대로 다가가 호출을 눌렀다. 아직 더운 날씨도 아닌데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입술이나마 축여 줄까 물으니 그건 또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아, 맞다. 그런데 우리 집엔 왜 왔어?”

“네가 수상하게 전화를 끊어서. 회사에 연락하니까 너 그날 그만뒀다고 하고.”

“……그래?”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이 슬슬 다시 붙기 시작했다. 무경은 재차 하윤을 부른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 어떻게 된 거야? 이 상처는 다 뭐고. 어디서 구르기라도 했어?”

무경의 물음에 하윤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곤 무경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그가 듣고 싶어 했던 말들을 쏟아 냈다.

“……맞아. 그날 회사를 그만뒀어. 전날 시비 붙은 선배가 또 더럽게 물고 늘어지려고 해서 홧김에 회사를 그만뒀거든.”

“…….”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니까 시원은 한데 싱숭생숭한 거야. 요즘 같은 불경기에 또 어디에 취업해서 먹고사나 싶어서. 그래서…… 생각 좀 정리하려고 아무 버스나 잡아탔지. 큼, 그러다가 내렸는데 모르는 동네더라고. 그런데 거기 동네 산 등산길 안내 표지판이 눈에 보이지 뭐야. 왜……, 생각 정리할 때 산이나 바다 많이 가잖아. 그래서 나도 그럴 작정으로 산에 올라갔어.”

김하윤은 여전히 느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슬슬 버거운지 드문드문 말이 끊어졌으나 무경의 재촉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이었냐고? 아무 생각이 없었어.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정장에 구두 신고 산에 올라갔지. 그러다가 이렇게 미끄러질 줄도 모르고.”

“그럼 왜 전화는 왜 껐어?”

“미끄러질 때 어디로 날아가서 부서졌나 봐.”

“……일부러 끈 건 아니고?”

무경의 추궁에 하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혹시 너 우리 가족한테 연락 온 거 있었어? 네 번호를 모르시기는 하는데.”

“없었어. 따로 연락 안 하기로 했고. 이 병원 기준으로 상태가 심각하진 않았으니까.”

무경의 말에 하윤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말을 이해하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환자복에 프린트된 병원 이름을 보고서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계속 자는 바람에 안 그래도 가족한테 연락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거짓말이었다. 김하윤의 상태가 특별히 더 나빠지지 않았다면 무경은 하윤의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하윤을 뺏어 가는 게 싫었으니까. 숨 쉬듯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라 무경은 이번엔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행이다. 괜히 알렸으면 많이 걱정하셨을 거야.”

“그런데 너, 사흘 넘게 잤어.”

“……뭐?”

마침 의료진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염동력으로 문을 여는 사이 당황했는지 하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무경은 돌아서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고는 하윤이 뱉은 말을 곱씹었다. 김하윤은 홧김에 사직하고 답답한 마음에 등산했다가, 미끄러져 상처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휴대전화도 잃어버려 연락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을 되찾은 덕에 집에는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김하윤은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방에 널브러져 있던 꼴을 생각하면 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무경이 능력으로 감지한 바도 그렇지 않았던가.

난데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난데없이 나타났다.

“…….”

김하윤의 말은 늘 다른 모양의 블록을 억지로 틀에 끼워 놓은 것 같았다. 일단 넣기는 넣었는데 넣어선 안 되는 것을 넣어 엉망진창인.

무경은 의료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김하윤을 돌아보았다.

김하윤은 난데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난데없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는지, 돌아오면 돌아온 것으로 그쳐야지 대체 왜 그랬는지 물어야 했다. 그러나 차마 그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왜 물어볼 수 없는가. 무경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물은 뒤에야 뒤늦은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걸 물으려면 내가 김하윤이 능력을 되찾았다는 걸 안다는 걸 밝혀야 하고, 또 괜히 말했다가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기껏 숨긴 게…….’

어찌어찌 변명을 찾아냈지만, 썩 쓸모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어느새 진료를 마친 의사가 무경에게 다가왔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무경은 의사의 말을 들었다. 에스퍼 대상으로 하는 병원의 기준상 하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일반인으로 기준을 낮추면 다소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런 문제는 일반 병원에 다니며 치료해야 하지만, 이곳에서도 기본적인 검사는 할 수 있었다. 일반 병원과 달리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만큼 퇴원 전에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게 하고 싶었다.

김하윤의 신체정보 기록이 기관에 남겠지마는 그런다 한들 김하윤이 능력을 되찾은 것은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다행스럽게도 묘하게 고분고분해진 김하윤은 무경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많은 나쁜 일 중에서 그것 하나만은 좋았다.

◇◇◇

김하윤이 깨어나자 무경은 그와 함께 잠들 수 없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병실을 나서야 했다. 집에 가는 내내 머리가 잘못된 놈처럼 자신이 왜 집에 가야 하는가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잠은 같이 자야 하는데.’

조금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던 병원 간이침대에서도 잘만 쏟아지던 잠이 푹신하고 넓은 침대에선 도통 오지 않았다. 고작 침대 한쪽이 빈 게 신경 쓰인 탓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는 데 시간을 쓰는 바람에 겨우 눈만 붙였다가 뗀 게 고작이었다.

김하윤이 깨어나지 못해 곁을 지키느라 병원을 드나들던 때보다 김하윤이 깨어난 뒤가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김하윤의 퇴원이 일찍 정해지지 않았다면 꽤 큰 곤란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퇴원이 결정된 날 무경은 김하윤에게 자신이 데리러 갈 테니 혼자 가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김하윤은 의아해했지만, 무경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신 한 번 더 당부할 뿐이었다. 숫제 협박에 가까워진 당부를 남긴 뒤, 무경은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퇴근 후 곧장 병원으로 향하자 미리 퇴원 절차를 다 마친 김하윤이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노을빛이 스민 병실에서 발을 달랑거리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든 순간에 무경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십 년 전 김하윤이 자신의 이름을 바락 부르면서 다가오던 모습을.

‘어.’

그때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경은 숨을 헉 들이켰다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사이 김하윤이 입을 열었다.

“일찍 왔네.”

“…….”

“입을 게 없어서 네가 놓고 간 거로 입었는데 혹시 네가 갈아입을 옷이었으면…….”

“네 옷 맞아. 입고 있던 게 다 찢어져 있어서.”

“집에 옷 있는데.”

“비밀번호 모른다고 했잖아. 그냥 막 눌렀던 거라고. 게다가 너희 집 거리도 멀고 가고 싶지도 않아.”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무경은 김하윤의 자취방이 끔찍하게 싫었다. 두 번 다시 발을 디디고 싶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 가도 입을 만한 건 없으면서.’

오랜만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신이 고르고 산 것들로 걸친 김하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스스로 김하윤에게 좋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없는 시간을 쪼개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무경은 자신의 노고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준비 다 끝났으면 이제 집에 가자.”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분명 어젯밤도 집에 들어가 잤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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