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때마침 무경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관측한 기관이 연락해 오기 시작했다. 기관에서는 자가 격리를 할 건지 아니면 기관 격리로 변경할지를 물었다. 무경은 상태 추이를 봐서 더 심각해지면 기관 격리로 변경하기로 했다.
‘여기서 더 심각해지면 다시 꼬리가 붙는다.’
이전처럼 출퇴근 시간에 모니터링 요원을 데리고 다녀야 할지 몰랐다. 여러모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므로 피하고 싶었다. 어떻게서든 진정해야 했으나 이 정도로 생생한 환각을 볼 정도면 상태가 심각하긴 했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나가자.’
무경은 안전한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가까스로 몇 걸음 움직였으나 소파를 본 순간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무경은 바닥에 다리를 꺾듯 무릎을 꿇리고서 소파 위로 엎드렸다.
“……흐.”
무경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이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망상인지 기억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꾀려는 환상인지. 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아닐 것이 지나치게 그를 뒤흔들었다.
무경은 바닥을 기다가, 가까스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거꾸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책장 구석에 있던 파일과 사진첩을 닥치는 대로 끄집어냈다.
공중으로 떠오른 파일과 사진첩은 이내 거꾸로 뒤집힌 채 펼쳐지더니 품고 있던 것들을 쏟아 냈다.
한 사람에 대한 수많은 사진과 세월의 흔적이 묻은 서류가 바닥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미 숱하게 보고 만진 탓에 군데군데 희게 헤진 사진을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뱉었다.
어떤 것을 봐도 한 가지로 귀결되던 결론. 하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확신. 무경의 십여 년을 지탱해 온 그 확신은 오늘도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
무경은 몸을 웅크린 채로 사진을 응시했다. 그 안에는 어린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김하윤이 있었다. 울거나, 웃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혹은 막 깨어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습. 어떤 사진을 봐도 어떤 형태로든 무경은 김하윤과 함께 있었다.
무경은 사진을 손안에 마구잡이로 욱여넣다가, 다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사진은 사방에 흩어졌으나, 단 한 장만이 무경의 손에 남았다. 우그러진 탓에 손끝에 걸린 탓이었다.
사진 속에는 케이크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자신과 어린 김하윤의 모습이 있었다. 무경은 어린 하윤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주름 선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헤진 종이 특유의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아니야.”
김하윤은……. 김하윤만은 그 애가 아니다.
무경은 자신을 달래며 이제는 사진 속 김하윤의 얼굴을 손끝으로 긁어 댔다. 정신이 불안정한 탓인지 자꾸만 어린애 웃음이 떠올랐다. 손뼉 소리와 특정 부분을 한껏 소리 높여 부른 생일 축하 노래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사진 속 하윤의 얼굴은 기어코 하얗게 긁히다 못해 뚫리고 말았다.
“……김하윤은 그 애가 될 수 없어.”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알아봤을 테니까.
자신이 그 애를 놓칠 리 없으니까.
‘맞아. 그랬을 테니까.’
그러니까 김하윤은 그 애가 될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됐고.
‘그리고 또…….’
김하윤은 김희원이 그 애라고 말했다. 그것 또한 도무지 믿기 어려우나, 김하윤 때만큼 강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물론 확신을 운운하기보단 막연한 거부감에 그 애와 김희원을 연관 짓지 못했다.
어쩌면 그 김희원이 진짜 김희원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
무경은 서류와 사진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때맞춰 약효가 들었는지 점점 몸이 나른해졌다. 비로소 이번에는 폭주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문득 무경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다독여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부모님일 수도 있었고 그 애 일 수도 있었다. 기억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움에 미쳐 스스로 만든 망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행복했던 시절엔 그랬을 수도 있지.
그때 문득 자신을 도닥이는 사람의 얼굴에 피곤해 보이는 김하윤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미친 새끼. 거기에 왜 김하윤을.’
무경은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기억에 김하윤을 떠올리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경은 다른 사진과 서류를 끌어안느라 팽개친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저 사진을 많이 본 탓일 것이다.
무경은 그가 떠올린 기억인지 망상일지 모르는 장면처럼 종이 뭉치를 도닥이며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자신도.
그리고 그 애도.
차가워진 손을 덥히듯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졌으나, 액체가 가진 알량한 온도로는 그에게 무엇도 되지 않았다.
문지기의 힘이 돌아온 게 확실하다면 김하윤은 현재 정부에서 파악할 수 있는 단둘뿐인 문지기가 되는 것이다.
정부에선 당연히 보호하고자 할 것이고, 김하윤은 평생 연구소에서 특수관리를 받으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모르긴 몰라도 김희원과 마찬가지로 보호라는 명목으로 그곳에 갇힐지도 몰랐다. 김희원의 열렬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김하윤인 만큼 상부에선 더더욱 흔쾌히 허락할지도 몰랐고.
김희원과 함께 사는 김하윤을 생각하자 몹시 목이 탔다.
“…….”
사내새끼들끼리 욕정이라도 할까 봐? 그래봤자 비슷한 얼굴끼리 마주하고 있을게 전부일 텐데. 무경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 스스로가 우스웠다. 속으로 신랄하게 자신을 비웃었으나 또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 사내새끼를 상대로 욕정 했었으니까.
또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그러모으면 그는 늘 항상 자신의 조각에게 욕정 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불의의 사고로 헤어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그 상대가 김하윤이 말하는 대로 정말 김희원이 맞는다면 자신이 욕정 했던 사내새끼 둘이 함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그 사내새끼들은 별생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니지. 김하윤은 남자를 좋아하잖아.’
김하윤은 무경을 좋아했다. 그래서 무경이 희원이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했다. 김희원과의 관계는 이미 인정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쨌든 김하윤은 날 좋아해.’
지긋지긋하게도 김하윤은 백무경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짓을 하든 떨어지지 않고 징글맞게도 곁을 지켰다.
심지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게 싫어 몸을 대 주기도 했다. 하지만 김하윤은 관계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무경은 김하윤이 즐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저 늘 잠잠하기만 했다. 쾌감을 감추는 것 같지도 않았고.
물론 봤다면 당장 욕조에 집어넣고 물을 끼얹었겠지만.
문득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자신의 아래에서 흔들리던 김하윤이 생각났다. 이불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느껴졌던’ 찡그린 얼굴이. 조심스레 내뱉던 숨소리가.
그리고 자신은 그게 싫어서 김하윤을 몸으로 짓누르거나 일부러 거칠게 움직이고는 했다. 그러면 그제야 억눌린 숨소리를 내던가, 숨결이 흐트러지곤 했으니까.
“…….”
순간 머리가 얼얼해진 무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이 갑갑했다.
‘김하윤이 능력을 되찾은 것은 리스크가 크다. 차라리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문지기는 일반적으론 측정하기 어려운 능력이라 은폐하기 좋았다. 김하윤이 작정하고 입을 다문다면 기관으로선 별도리가 없었다. 김하윤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능력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일반 시민일 테니까.
물론 일반 시민이라고 무조건 보호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금 에스퍼로 분류되는 것보단 낫다.
그리하여 무경은 하윤에 대한 대처를 유보하기로 했다.
물론 아예 손 놓고 있는 건 아니고 기본적인 관리는 할 요량이었다. 김희원의 존재가 등장함으로써 그가 언급하는 하윤의 존재가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이주의 제자 김하윤.
일반 시민인 김하윤은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나한테 숨기는 꼴을 보면 계속 능력을 감출 것 같은데.’
연락이 뜸해진 게 그 증거였다. 무경은 그것이 하윤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 지레 찔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무경은 하윤이 괘씸했지만, 한편으론 잘됐다고 생각했다.
김하윤은 늘 지나치게 무경의 신경을 잡아먹었다. 무경은 이 기회에 김하윤의 생각을 덜어 내기로 했다.
◇◇◇
하루 또 하루. 날은 별스럽지 않게 넘어갔다. 늘 그렇듯 바쁘고 피곤하고. 사람을 만났다가 괴수를 만났다가, 또는 이게 사람인지 괴수인지 헷갈리는 새끼들도 만나고.
여전한 일상이었으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이라면 김하윤의 연락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그쳤다 싶어 반가워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그게 이틀여가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연락이 올 것 같아 불안했다. 자신이 방심했을 때 기분을 잡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분명 했다. 아침 저녁, 혹은 때때로 휴대전화를 확인했으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날을 보내던 중에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생일.
김하윤과 무경은 생일이 같았다. 무경이 애써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하는 날.
이날만큼은 김하윤이 연락을 하겠구나. 이날만큼은 어쩔 수 없으니 연락을 받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확실히 쐐기를 박아야지.
그러면 이전같이 연락이 언제 또 올 줄 몰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생일로 넘어가던 밤, 그리고 눈을 뜬 새벽, 출근한 뒤, 그리고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김하윤은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이제야 철이 든 걸지도 모르지.’
이제껏 했던 행동이 얼마나 남을 곤란하고 짜증 나게 하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리라. 그랬으니 집을 나갔겠지. 아니, 어쩌면 다른 대상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으니까.
“……그럴 리가 없지.”
김하윤이 이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자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김하윤은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아니라면?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무경은 짜증 섞인 숨을 삼켰다.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