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때 반갑지 않은 사람이 그의 곁에 다가왔다. 무경은 모른 척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먼저 무경을 알아보고 그에게 몸을 돌렸다.
“백 소령님 여기 계셨네요?”
‘박건영.’
무경은 마주 고개를 꾸뻑이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박건영이 알아서 변명을 덧붙였다.
“아침에 찾아뵈러 갔는데 자리에 없으시더라고요.”
“…….”
“요즘 많이 바쁘시죠?”
쏟아지는 수다가 버거웠다. 무경은 대충 대답하며 그의 말을 흘렸다. 층수를 표시하는 작은 화면만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뿔싸.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야 했다. 좁은 공간에 박건영과 함께 있게 되자 무경은 더 곤욕스러웠다.
그 와중에 박건영은 층수를 잘못 눌러 놓고도 취소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른 척하기 힘들었던 무경은 미간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던 겁니까?”
“아니, 뭐. 그냥. 김하윤 씨 일로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무경이 묻기 무섭게 박건영은 화색을 띠며 입을 열었다. 벌써 귀가 아픈 느낌이었지만 김하윤의 이름이 나온 이상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윤이 일이요?”
“김하윤 씨한테 들으셨죠? 저희 쪽에서 만남을 청했다고요.”
“그렇다고 괜히 떠보지 마시고요.”
“들었다 말았다 소리도 못 해 줍니까?”
“그게 떠보는 거 아닙니까?”
“에이.”
“…….”
“한 번만 봐주세요. 저도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하는 처지라. 안 할 수가 없다고요.”
무경이 대답해 주지 않자 박건영은 끙 신음을 뱉었다. 진짜 곤혹스러운 게 아니라 일부러 내는 소리라 무경은 무시했다. 그사이 박건영이 눌러 놓은 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그러나 박건영은 무경이 예상한 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김하윤 씨요. 아무래도 이번 판에 꽤 중요할 것 같은데 보호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미리 말씀드리려고요.”
“……이미 관리는 하고 있습니다.”
“에이, 그런 거 말고요. 좀 더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쪽에서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신 것 같기도 하고. 아, 오해하지 마세요. 워낙 공사다망하셔서 남는 손이 없겠다 싶은 거니까. 그러니까 이건 품앗이죠. 품앗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공동체 의식.”
시커먼 속을 가리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양새가 가증스러웠다.
“보호가 아니라 감시겠죠. 핸들링하려는 거 아닙니까?”
“겸사겸사. 그리고 핸들링이라뇨. 말이 심하십니다. 그냥 뭐 저희가 맡는 편이 저희 쪽에선 관리가 편하고 그쪽은 일 좀 덜고.”
“김하윤은 일반인입니다.”
“하지만 에스퍼들 일에 끼였죠. 특수상황인 만큼 거기에 맞게 대응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일반인이라는 말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정말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무경이 모른다고 생각해서 은폐하는 것일까?
“게다가…….”
“……?”
무경이 의심하는 사이, 박건영은 말을 고르듯 말끝을 늘렸다. 한 번 더 그가 버튼을 눌러 둔 층에 엘리베이터가 섰으나 이번에도 그는 내리지 않았다. 박건영은 더 위층의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가, 문이 닫힌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가 직업적 특성으로 사람 눈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그런 눈을 하는 사람들이 아차 하면 뭐, 그렇게 되더라고요.”
박건영은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무경은 곧장 부정했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럼 뭐, 좋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김하윤 씨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 같아서 죽어 버리면 곤란하거든요.”
무경은 말없이 박건영을 바라보았다. 박건영은 무경의 눈빛이 무섭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사이 무경이 내리려던 층에 도착했다. 박건영이 내리라는 듯이 턱짓했다. 당장 허튼소리를 뱉은 그를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이성이 주먹을 만류했다.
무경은 엘리베이터를 나간 뒤 박건영에게 쐐기 박듯 말했다.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럼 저야 좋죠. 일 하나를 더니까.”
약을 올릴 작정이었던지 박건영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쯤 무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경은 사무실로 돌아간 뒤 다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직 김하윤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괜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에서 계속 뭔가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움켜쥐어도 붙잡을 수 없어서 더 애가 탔다.
그때 때마침 무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름조차 저장되어 있지 않았으나, 무경은 화면에 뜬 번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내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김하윤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간 잘 지냈어?]
눈치를 보듯 묻는 목소리에 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어떻게 잘 지냈을 수 있었겠느냐는 원망이 목에 걸렸다. 무경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이 술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용건 없으면 끊을게.”
정말 끊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끊겠는가. 어떻게 겨우 닿은 연락인데. 무경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김하윤의 전화를 반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 오늘 생일이잖아. 까먹고 있었지?]
“…….”
이상하게도 목이 멨다. 꼭 서운한 사람처럼. 무경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자신이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일 축하할 겸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저녁, 같이 어때?]
저녁. 저녁에 무슨 일이 있던가? 무경은 빠르게 자신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러곤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일이 많아서 퇴근이 늦을 거야. 희원이도 만나기로 했고.”
[그래? 그럼……. 음.]
“이만 끊어. 헛소리하지 말고.”
[무경아, 무경아 잠시만. 그게 있잖아. 그러니까.]
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지 하윤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또 그가 전화를 끊겠다고 하면 그를 말리며 시간을 끌었다.
[……정 안되면 그냥 얼굴만 보자. 너희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엔 얼굴 한번 봐야지.]
“……너무 늦는다 싶으면 그냥 가. 차 끊기기 전에.”
모질게 거절해야 하는데 그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 무경은 이마를 짚었다. 대처가 미흡했던 자신을 탓하면서도 정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통화를 하느라 멈췄던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오늘 같은 날은 그래도 중요한 날이니까.’
무경은 비루한 핑계로 자신의 유약을 용서했다. 단지 오늘에 한해서일 뿐이라고 덧붙이면서.
◇◇◇
해가 질 무렵에 무경은 시간을 확인했다. 김하윤에겐 야근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제 얼추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복잡하다고 여겼던 일이 수월하게 풀렸고 시간이 들겠다던 일이 빠르게 처리됐다.
남은 일은 희원과 만나는 일밖에 없었다.
물론 희원과 만나는 일은 절차가 까다로워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그래도 처음 예상했던 시간보다는 빨리 돌아가리라.
이번 면회는 김희원의 요청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으나, 김하윤의 출석도 함께 요청하여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
오늘은 김하윤과 무경의 생일이었으니 김희원에게도 중요했던 날이었을 테니까. 물론 김하윤이 주장했던 바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복잡한 절차를 마치고 지하 시설로 내려갔을 때 무경은 자신을 기다리는 김희원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
김희원은 어쩐 일로 먼저 나와 무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탁자에는 케이크가 있었는데, 버터크림에 포같이 떠낸 화이트 초콜릿을 끼얹은 케이크였다.
요즘에도 저런 걸 파는 곳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사이 희원은 무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 하윤이는? 가, 가, 같이 안 왔어? 왜, 왜?”
“김하윤은 오늘 같이 안 왔어. 연락을 계속 피해서.”
“왜, 왜? 네가 싫어서?”
“…….”
무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희원이 ‘내가’ 아니라 ‘네가’라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웃는 표정 흉내를 냈다.
“생일, 생일인데. 하윤이. 오, 늘이 하윤이 새, 생일이거든.”
하윤이 생일 축하해 줘야 하는데. 무경은 희원이 한숨같이 뱉는 말을 듣다가, 불현듯 자신이 김희원의 모습에서 느낀 기시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진.’
무경은 자신이 김하윤 몰래 갖고 있던 사진을 떠올렸다. 케이크를 앞에 두고서 환하게 웃고 있던 어린 자신과 김하윤.
‘그래, 저런 케이크였었지.’
기시감이 아니라 기억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는 것일 텐데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만 싶었다.
그때 김희원이 흔치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네가 숨긴 거지?”
“…….”
“내, 내가 하윤이랑 마, 만나지 못하게. 예, 옛날처럼.”
“내가……. 그랬다고?”
희원은 대답 대신 무경을 노려보았다. 무경 또한 대꾸 없이 희원과 눈을 마주했다.
말만 들으면 김하윤이 했던 말이 맞아떨어지는데, 막상 눈을 마주하면 그런 기색을 느낄 수가 없었다.
희원은 오히려 자신이 아닌 김하윤을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희원은 김하윤의 부재에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그는 오늘이 자신과 하윤의 생일인 양 굴며 무경의 생일에 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경을 불편해하며 빨리 보내고 싶어 했다.
“하, 하윤이한테 이것 좀 전해 줄 수 이, 있을까? 여, 연락이 아, 아, 안 되는 건 아는데, 그, 그, 그래도 내가, 내가 보냈다고 하, 하면 들, 어 줄 거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무경이 속으로 대꾸하는 사이 희원은 미리 준비했다던 선물을 꺼냈다.
“필요한 도, 도구가 거, 거의 반입이 안 되어서 영 이, 이상하게 나왔지만 그래도 내, 내가 저, 정성껏 만들었거든. 뭐, 뭔지는 하, 하윤이가 보면 알 거야.”
무경은 희원이 내민 주먹만 한 상자를 건네받았다. 무게나 언뜻 들리는 소리가 나무토막 같았다.
‘목조각품인가.’
뭘 조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도구가 시원찮았다는 말처럼 단번에 알아보기 힘든 형체를 띄고 있었다.
“하, 하윤이한테 꼭 저, 전해 줘야 해. 그리고 보, 보고 싶다고도 전해 줘. 꼭. 어, 얼굴 보고 무, 물어봐야 할 게 있어서.”
“그게 뭔데? 내가 대신 물어봐 줄게.”
“아, 아니. 내, 내, 내가 직접 말할게. 너, 넌 들어도 모르니까.”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형용키는 어려우나 낯설지는 않고, 또 낯설지 않다기에 언제 또 이런 기분이었는지 짚어 내기 어려웠다.
“들어도 모르니까 그냥 전해 줄 수도 있지.”
“그, 그냥 하, 하윤이가 나한테서 비, 빌려 간 게 있거든. 그거 까, 까먹은 것 같아서.”
“그게 뭔데?”
무경의 말에 희원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고갯짓을 멈춘 뒤에는 아예 무경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또한 더는 대화 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면회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