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자신이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고 간 탓에 집 안이 서늘했다. 무경은 문을 닫으며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은 당연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그저 혼자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흔적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
무경은 서둘러 떠오르려는 소파를 짚었다. 쿵!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경의 가슴 또한 철렁였다.
‘누가 수를 쓴 환상이 아니면 내가 하는 망상에 불과하다.’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무경은 서둘러 약을 꺼내 입안에 밀어 넣었다. 복용 용량을 초과했으나 그저 지금의 망상을 멈출 수 있다면 어떻게 돼도 좋았다.
그러나 달달 떨리는 손을 그러쥐다가 고개를 든 순간, 또다시 환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경은 지금의 거실이 아닌, 좀 더 큰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깨달은 순간에 이 집의 욕실이 아닌 다른 곳의 문이 발칵 열리더니 조금 전의 ‘그 애’가 걸어 나왔다.
무경은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 애는 무경이 팔을 벌린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려 했다. 무경이 소파 위로 몸을 세우자 그제야 힐긋 눈길을 줬다. 무경은 그를 향해 씩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 애는 그제야 그의 품 안에 들어오며 물었다.
[왜, 또.]
[머리 말려 주려고.]
[됐어, 내가 할게.]
[딴짓 안 하고 머리만 말릴게.]
[맨날 말만 그러고.]
남의 머리카락 말리는 게 무슨 좋고 대단한 일이라고. 무경은 그를 향해 애걸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 사람은 무경의 거듭된 애원에 마지못해 소파 앞으로 돌아와 소파 밑에 앉았다. 무경은 자세를 고치고는 그의 머리칼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까. 다시 떠오른 의문에 대답하듯 이유가 생각났다.
첫째로는 뽀송뽀송하게 말려 부푼 그 애의 머리칼이 좋았고, 두 번째로는 나른해져 제게 기대는 그 애의 모습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렇게 나른해지면 자신이 수작을 걸어도 여느 때보다 잘 받아 줬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냥 좋아서 그랬다.
그냥 좋아서. 뭐든 해 주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어서. 가끔 고개를 젖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아서. 좋아서. 그냥 마냥 좋아서.
때마침 그 애가 고개를 돌려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는 게 졸린 게 분명했다. 하기야 그럴 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재울 수는 없었다.
[조금만 참아. 조금 이따가 저녁 먹어야지.]
[저녁 먹을 때 깨워 주면 되잖아.]
[또 그냥 잔다고 안 먹을 거잖아.]
[아니야. 오늘은 진짜 졸려도 먹을게. 그냥 딱 삼십 분만. 눈만 이렇게 감고 있을게.]
눈을 감으며 자는 척하는 모습이 왜 또 그렇게 가슴에 들어왔는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무경이 동의하자마자 바닥에서 올라온 그 애는 소파에 누웠다. 무경이 다리를 베라고 대어 주었으나 높다는 이유로 밀려났다. 무경은 애꿎은 쿠션 모퉁이 장식만 괴롭히며 상한 속을 달랬다.
[딱 삼십 분만 자야 해. 더 자면 안 돼. 밤에 잠 못 자잖아.]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경은 그 애를 흘겨봤으나 또 그리 오랫동안 노려보지 못하고 눈매를 풀었다. 그러곤 담요를 갖고 와 그 애의 배를 덮어 주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중이라 해가 길어졌다. 몇 달 전이었으면 벌써 어둑했을 시간인데도 아직 밝았다. 저물기 전의 노란빛이 거실 안으로 눈부시게 들이쳤다. 햇빛이 비친 그 애의 머리칼이 조약돌같이 반질거렸다.
그 와중에 거실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시원했다. 흉흉한 뉴스가 연일 들려오는 중인데도 지금 이 순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무경은 커튼을 조절해 그 애의 얼굴에 빛이 들이치지 못하게 했다.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TV도 틀지 않고 그저 얌전히 옆을 지켰다. 그러다가 삼십 여분이 훌쩍 지난 뒤에야 그 애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삼십 분 지났는데.]
[……나 오 분만 더 잘래.]
[오 분 더 지났는데?]
[그럼 오 분만 더.]
[그 오 분도 지났는데?]
[거짓말하지 마.]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그 애는 무경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웅얼웅얼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이대로 더 자려는 게 분명했다. 무경은 조금 더 내버려 둘까 하다가 그 애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졸지에 옆으로 밀려난 그 애는 소파에서 떨어질까 봐 눈을 반짝 떴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경은 활짝 웃었다.
[네가 너 떨어지는 거 가만둘까 봐?]
입을 벙긋거리자 용케 알아들었는지 눈을 감고는 고개를 획 돌렸다. 무경은 그런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 그냥 안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건드리고 싶었다. 갑작스레 옷 속으로 손을 넣으며 놀라게 하자 그 애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구부렸다.
[너, 하지 마.]
[내가 뭘?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무경은 뻔뻔스레 대꾸하며 놀라게 한 것이 무색하게 그 애의 배를 문질렀다. 그러다가 기지개를 켜 주듯 허리를 쓱쓱 쓸어 올렸다. 긴장을 푼 그 애가 몸을 펴고 몸을 쭉 뻗었을 때, 무경은 장난을 더 치는 대신 그 애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그러다가 손으로 상체를 쓱 쓸어내리자 그 애는 지레 놀라 가슴팍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너 때문에 까져서 아파.]
[내가 뭐 했는데?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무경은 억울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그 애를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래로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아까워 자신이 핥아먹었던 것뿐. 그게 대체 어쨌길래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걸까.
[난 진짜 모르겠는데. 혹시 모기가 문 게 아닐까? 그래서 네가 잠결에 긁은 거지.]
[웃기지 마. 네가 그랬어.]
[내가 뭐 어쨌길래?]
[…….]
[응? 내가 어떻게 했어? 말해 봐 봐.]
무경은 속삭이듯 말하며 손끝으로 그 애가 아프다고 한 부위를 살살 긁었다. 그 애는 대답하는 대신 무경의 입을 막았다. 그만 말하라는 것이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고 획 돌린 고개가 무정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쑥스러워하는 것이니까.
무경은 그 애의 손을 붙잡아 얼굴에 바짝 붙였다.
손바닥을 깨물어 보려 했으나 워낙 살집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무경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로 그 애를 힐끔거렸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 아파?]
[그게 하루 만에 낫냐?]
[그럼 옷 좀 걷어 봐 봐. 많이 다쳤으면 약을 발라야지.]
[……됐어. 그냥 놔두면 나아.]
그 애는 무경을 나무라듯 눈을 부라렸지만,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애의 셔츠를 훌렁 위로 올렸다. 솔직히 까졌는지 안 까졌는지는 어제부터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본인이 아프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염동력으로 연고를 꺼내 와서 까졌다는 부위에 살살 펴 발랐다.
그 애는 무경의 손끝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발가락 꼼지락거렸다.
고개는 여전히 돌리고 있었고 입은 고집스레 다물려 있었다.
숨죽이고 있는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안타깝게도 그 또한 웃을 처지가 못 되었다.
무경은 그 애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다가 그 애에게 입 맞췄다. 갑작스레 숨이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그 애는 입을 맞춘 순간 무경의 팔을 움켜쥐었다. 무경은 조금 떨어져서 그 애가 숨을 고르길 기다렸다.
거친 숨을 뱉어 내고, 그를 응시하던 눈이 다시 감긴 순간 무경은 다시 그 애에게 입 맞췄다.
덥고 또 더웠다. 그러나 감내할 만한, 감내해야만 하는 열기였다. 다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어쩌지 못해 그 애를 칭칭 옭아매듯 안았다.
암시 때문에 허리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헤매는 손 때문이었을까.
그 애는 입을 맞춘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진짜.]
제대로 맺지 못한 말이나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무경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참아서 그나마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무경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원망하며 그 애의 귀에 속삭였다.
[……스무 살 되면 바로 둘이 나가 살자.]
[왜? 나는 싫어. 집 나가면 고생인데 이 좋은 집을 내가 왜 나가?]
[같이 나가자.]
[살 집도 없잖아. 나가긴 뭘 나가. 서울 땅에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살면 감사합니다, 하고 될 때까지 붙어살아야지.]
[넓은 집 구하면 되잖아.]
[너 모아 놓은 돈 있냐? 이 쪼끄만 게 철도 없이.]
저보다 더 조그만 주제에. 그 애는 무경의 코를 살짝 쥐었다가 놓으며 나무랐다.
[모아 놓은 게 있으면?]
[모아 봤자지 뭘.]
[나 네 생각보다 많이 모았는데. 들으면 너 놀랄걸.]
[그래 봤자 서울 집값이 얼만데. 선생님이 너한테 집이라도 주신다면 몰라도.]
무경은 대답 대신에 씩 웃었다.
[진짜로 주신대? 어디? 어디 거? 빨리 말해 봐.]
[있으면 같이 살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대답해.]
[……음.]
[같이 살자. 응?]
[으으음.]
[집안일은 내가 다 할게. 다른 것도 그냥 내가 다 할 테니까 같이 살자.]
[……하, 그래도.]
[왜?]
[같이 살자고 하는 속셈이 너무 빤해서 거짓말이라도 대답을 못 하겠다.]
[무슨 속셈?]
무경은 모른 척 되물었다. 그러자 그 애가 무경의 배를 건드렸다. 마찬가지로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에 부근까지 밖에 가지 못했다. 약이 오른 무경은 그 애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그러자 그 애가 무릎을 구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경은 그 애 뺨에 입술을 붙이고 함께 살게 될 때를 그리며 속살거렸다. 혹여 듣고 혹할 수도 있지 않은가?
[독립하면 거기 방이 몇 개건 간에 침실은 하나만 두자. 소파에서 자는 건 금지. 잠은 무조건, 싸워도 같은 침대에서 자야 해.]
[집을 나가서 다른 집 침대에서 자는 건?]
[절대 안 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서재로 꾸미고, 다른 방은 드레스 룸으로 꾸미자. 너랑 나랑 옷을 합치면 그래도 꽤 될 테니까. 운동 방도 만들고 싶긴 한데, 그건 정 공간이 안 되면 거실이나 베란다로 빼면 될 거고.]
[그럼 방이 최소 세 개는 되어야 할 텐데 가능하겠냐?]
[가능할걸?]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어렸을 적 암시에 동의한 까닭이 여기 있었으니까. 모친 서이주는 암시를 거는 조건으로 스물이 되는 해, 그러니까 암시가 풀리는 해에 무경의 독립을 돕기로 했다. 그게 아니어도 부모 둘 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했기에 상속이 일찍 진행되었겠지만.
어찌 됐든 스물이 되면 무경의 독립 지원이라는 명목하에 상속이 진행될 것이다. 처음에야 큰 금액은 아니더라도 그 애와 둘이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또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 정도의 자신은 있었다.
[빨리 스무 살이 됐으면 좋겠다.]
무경은 그 애와 가족이 되길 바랐다. 지금도 가족이었지만, 지금과는 다른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독립이 필수였다. 이는 그의 부모도 동의했다. 그 애의 부모에게는 아직 묻지 않았지만.
하지만 허락해 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에는 그 애의 방이 없었다. 그 애의 동생이 그 애의 방을 차지한 지 오래였으니까.
무경은 그 애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좀 더 나중에 그 애에게 줄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같이 사는 거 말이야. 진짜 좋을 것 같아.]
매일 행복으로 가득하리라. 괴로움이 있더라도 행복이 이를 뒤덮어 버릴 테니까.
“…….”
환각이 그치자 무경은 쫓겨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텅 빈 거실이 또다시 그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무경은 몸을 돌려 물을 마셨다. 손이 떨린 탓에 개수대에 컵을 내려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
평소라면 염동력으로 잡아챘겠으나 이번엔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에서 떨어지는 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깨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들썩였다.
귀퉁이가 날아간 컵을 보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약을 더 챙겨 먹으려다가 약통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