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차피 모르는 거.’
괜히 말해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보다 이대로 둬서 기억을 흐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돌려주지 않을 거야. 내가 계속 가지고 있을 거야.’
그래, 무경의 기억이 어떻든 사실 그것보다 자신의 욕심이 더 큰 이유였다. 그냥 무경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끝까지 갖고 싶었다. 하윤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 경계를 긁었다. 반지가 만져지지 않아 가슴이 철렁였으나 선반 안에 넣어 뒀던 것을 떠올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윤은 벽을 밀며 걸음을 뗐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지만, 현관문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눈 깜짝할 사이 타임캡슐이 있는 은신처에 도착한 하윤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을 켜자 이전에 남겼던 흔적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 외에 별도로 설치해 둔 장치에도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
확인을 마친 하윤은 선반을 뒤져 총을 꺼냈다. 일종의 은신처다 보니 비상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하윤은 총기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실탄을 장전했다.
무기를 오랫동안 다루지 않아 걱정한 것과 달리 다행스럽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쐈다.
타앙-!
사나운 총성이 은신처에서 울려 퍼졌다.
“…….”
총성과 반동, 열기와 특유의 냄새까지. 총이 발사된 건 분명한데 총알이 사라졌다. 하윤은 지금 이 상황이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났다. 그러나 우스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씨발, 진짜.”
재차 헛웃음을 터트린 하윤은 머리를 향해 연거푸 총을 쐈다. 요란한 총소리 뒤에 이명이 들렸다. 하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총을 내려다보았다. 총이 잘못됐나 싶어 벽을 쏘자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총알이 나갔다.
탄창을 확인하자 쏜 만큼 총알이 줄어 있었다.
“하…….”
그럼 쏜 총알은 어딜 갔단 말인가. 하윤은 미간을 문지르며 뒤를 돌았다.
총알은 본래 박혔어야 할 곳에 박혀 있었다. 다만 벽에 박히기 전에 하윤의 머리를 터트리고 갔었어야 했었지만.
“씨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윤은 총을 집어 던지며 바락 소리 질렀다. 돌아오는 소리가 있을 리 만무했으나 수많은 비난을 받은 듯이 하윤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며 소리 지른 것과 다르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전부 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네가 전부 망쳤잖아.
스스로가 퍼붓는 비난에 하윤은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변명을 쥐어짰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다 잘못했으니까 죽겠다는 거잖아. 제발! 제발 좀 이거로 끝내면 안 되겠냐고.”
하윤은 팽개쳤던 총을 다시 줍고선 문들을 향해 두 손을 비볐다.
“내가 몇 년째 이날만 보고 산 걸 알잖아.”
달래듯 말한 뒤 하윤은 한 번 더 총을 쐈지만, 이번에도 벽에 박힐 뿐 하윤의 머리를 터트리진 않았다. 혹시 싶어 다리를 쐈으나 이 또한 빗나갔다. 그러자 더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윤은 총을 든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어? 진짜 안 되겠냐고, 이 개새끼들아!”
얼굴이 삽시간에 터질 듯 달아오르고 목에는 핏대가 섰다. 화 때문인지 힘 때문인지 하윤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나 문들은 하윤을 삼켜 ‘그곳’으로 데려갈 때와는 달리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있었다.
진짜 그냥 문같이.
“하. 개같네, 진짜.”
하윤은 꺽꺽 웃음을 터트렸다. 연신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머리를 기대며 크게 숨을 들이켜자 꺽꺽거리던 웃음이 울음으로 변했다. 소리가 변하자마자 하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울음을 삼키려 했으나 기어코 눈물이 새어 나왔다. 더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윤은 힘없이 늘어져 있으면서도 총은 놓지 않은 자신의 손을 보다가 다시 총을 들었다.
“…….”
그러나 이제는 총성도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 탄창이 빈 소리만 났다. 하윤은 총을 발치로 던지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의 냉기에 더운 몸이 조금 식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 전등불을 끈 뒤 눈을 감았다.
눈꺼풀만 닫았을 뿐인데 깊고 무거운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하윤은 순간 겁나 눈을 잠시 떴으나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깊고 무거운 잠에 쓸려 가서 더는 내일로 떠오르지 않길 바라며.
그때 문득 희미하게 들려선 안 될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으나 하윤은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김하윤이 사라졌다.
세상에서 도려낸 것처럼.
‘그게 뭐, 어쨌다고.’
김하윤이 사라진 게 어쨌다고. 상상처럼 땅에 떨어져 죽은 것도 아닌데 뭐 어쨌다고.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단순히 내가 착각한 거야.’
자신이 모르는 샛길이 있었고 김하윤이 재빠르게 그곳을 통해 벗어났던 것일 뿐이다.
“하, 씨발.”
더는 김하윤에게 생각을 할애하지 않으려 해도 모든 감각이 빨려 들어가듯 소요되었다. 무경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깜빡였다.
낯선 상황이나 또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익숙한 불쾌감과 불안이 심장을 두들겼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온몸이 쿵쿵 울리다 못해 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무경은 자신의 가슴팍을 짓누르며 진정하려 애썼지만, 늘 그렇듯 잘 안 되었다.
어느새 턱에 고여 있던 땀방울이 가슴께로 툭 떨어졌다.
“…….”
동 단위를 아우를 기운을 펼쳐서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김하윤을 찾을 수 없었다. 단순히 빠르게 떠났다고 할 수 없었다.
무경의 감각은 예민하고 정확했으며, 김하윤을 찾을 때는 더 날카로웠으니까.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는 것은 김하윤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이고, 그가 그렇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김하윤이 능력을 되찾았다.’
김하윤의 능력은 자신의 모친인 서이주와 같은 문지기. 문지기들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문]을 열 수 있다. 또 문을 통해 자신과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으며 이를 응용하여 방어 또는 공격도 할 수 있었다.
김희원과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문지기에 관한 지식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문지기인 모친과 문지기인 친구와 함께 자랐다면. 그래, 이 정도 지식은 당연했다.
설령 당연하지 않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힘을 어느 정도 되찾았을까? 본래는 얼마만큼이 가능했지? 적어도 동 단위는 넘을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언제 되찾았을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박건영은 이를 알고 김하윤에게 접근했을까? 또는 피노키오는? 지금 김하윤이 능력을 되찾아서 일어날 변수는 뭘까?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김하윤 하나가 능력을 되찾은들 무슨 큰 문제가 생기겠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고 스스로 다그쳤으나 불안이 잦아들지 않았다. 새하얗게만 느껴지던 머릿속이 이제는 붉게 느껴졌다.
‘위험하다.’
김하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기억나지 않음에도. 그저 그가 능력을 되찾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김희원이 갇혀 있던 번식 공장이 생각났다. 문지기 김희원과 다른 초능력자들의 정자를 통해 초능력자들을 만들었던 곳. 그 시도가 제대로 먹혔는지 아직 알지 못했으나…….
“담배.”
무경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꽁초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김하윤의 흡연 사실에 유난스레 반응하던 김희원의 모습이 생각났다.
‘흡연과 정자.’
무경은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생각이 지나치게 엉켜 머리가 얼얼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에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력이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듯 몸이 무거웠다. 이제는 주저앉은 게 아니라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까스로 머리를 찧는 것을 면한 채 무경은 거친 숨을 골랐다. 머릿속에 빨간 등이 켜졌다. 몸 상태가 심상찮았다. 느닷없이 찾아든 폭주의 전조에 무경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집으로 가자. 그곳에 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대로 군에 연락해 격리되는 게 나을 텐데도 무경은 고집스레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정신은 드문드문 끊겼으나 그런 중에도 무경은 집을 향해 움직였다. 어디에 처박혔는지 무릎과 손바닥이 더러워져 있었으나 그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무경은 현관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거꾸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엎어지기 전에 몸을 틀어 신발장에 몸을 기대어 신발을 벗었다. 급한 마음과 달리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자 부아가 치밀었다.
“……씨발.”
팽개치듯 신발을 벗은 무경은 오래된 습관에 따라 바닥을 살폈다. 순간 눈꺼풀이 덜덜 떨리더니 제 신발만 덩그러니 있을 뿐인데 문득 두 개의 신발이 엉망으로 엉키는 게 보였다.
‘……?’
급하게 벗어 팽개친 신발이 서로 엉겼다가 풀어졌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경은 손에 들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대충 던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 한 번만.]
[야, 뭔 맨날 한 번만이야. 한 번만이라고 해서 어제도 했잖아.]
[아니, 한 번만.]
[뭐가 아닌데. 저리 가. 집이잖아. 선생님이라도 계시면 어쩌려고.]
[지금 집에 우리밖에 없어. 내가 다 확인했다니까.]
[아, 백무경 진짜. 이제 더는 안 해 줘.]
[그래. 이제 내가 하지 뭐.]
[야!]
약이 오른 상대가 뭐라 하든 말든 무경은 그에게 입 맞췄다. 그저 입술만 닿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하늘을 나는 듯이.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숨이 막힌다는 타박에 잠시 입술을 뗐다가, 연거푸 쪼듯이 입 맞췄다. 상대는 골난 표정으로 무경을 노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는 핑계로 무경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더 깊이 입 맞추려 했으나, 상대는 순식간에 무경의 품을 빠져나갔다.
[뭐! 한 번만 한다며!]
상대는 무경을 남겨 둔 채 집 안으로 사라졌다. 무경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환각?’
누가 자신에게 정신계 능력을 쓴 것일까. 무경은 어제 만났던 박건영을 떠올렸다. 그가 하윤이 아니라 자신에게 능력을 쓴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하윤에게 능력이 들지 않았던 건 않았다면?
‘멍청한 생각이야.’
정신계 능력이 그렇게 쉽게 걸렸으면 자신의 상태도 금세 나아졌을 것이다. 자신이 왜 여태 기억을 찾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지 떠올린 무경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우리 집 현관도 아니었고.’
그럼 어디 현관이었을까. 어딘지 몰라도 익숙한 곳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무경은 자신이 벗어 둔 신발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