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김하윤이 절 보는 시선이 더럽고 역겨우며, 자신을 부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밀어내고 또 밀어내도 뻔뻔하게 들이미는 마음은 또 어떻고. 무경은 하윤의 귀에 주문같이 속삭였다. 미움과 혐오를 드러내자 그제야 길을 찾은 양 혼란이 잦아들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제일 싫은 건 네가 나를 끔찍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거야.”
암만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 한들 김하윤 이전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다. 본래 다른 사람들은 무경에게 있어 별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무경에게 가치를 가진 사람은 단 셋밖에 없었다.
부모님과 □□□.
하지만 거기에 김하윤은 없었다. 아무리 셋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들 김하윤은 결코 그 자리로 올라올 수 없었다. 아니, 올라와선 안 됐다.
오직 저 하나 홀로 남았다 한들 그래서는 안 됐다.
화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미워한 까닭은 어쩌면 김하윤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더는 미워할 수 없게 된 지금에도 계속 밉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김하윤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그들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잠깐 방심한 새를 무섭게 파고들었다.
“……넌 날 불행하게 해.”
계속 미워하는 중에도 불안하게 하고 겁먹게 만든다. 차라리 예전에 바랐던 대로 김하윤도 그날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면 예전에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을 때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럼 저도 마냥 편안한 불행 속에서 살아갔을 텐데.
“네가 다 망치고 있어. 네가. 김하윤 네가.”
엉망진창으로 쏟아 내고 나자 그제야 손이 움직였다. 가볍게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힘이 들어갔다. 축 늘어져 있던 김하윤이 뒤로 획 넘어졌다. 놀라 반사적으로 염동력을 썼으나 김하윤이 침대에 나동그라진 뒤였다.
“…….”
무경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아까 전 숨결이 흐트러진 여파가 아직 이어진 듯했다. 열기가 훅 밀려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김하윤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는데,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는지 핏자국이 동그랗게 남아 있었다. 그 외에 얼굴이고 손이고 쓸린 자국이 있었다. 입술도 짓씹다가 상처를 냈는지 잇자국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김하윤은 신음 대신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동그라지며 충격이 간 탓일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던 무경은 괜찮으냐 물으려다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내팽개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하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던지, 돌연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무경을 발견하고선 침음성을 흘렸다. 무엇을 상상한 건지 무경이 움직이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무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김하윤은 무경이 꽤 멀어진 뒤에야 움츠렸던 몸을 폈다.
“……언제 왔어? 오늘 못 들어올 줄 알았는데.”
“방금.”
“일 마무리는 잘 됐어?”
“얼추 되긴 됐으니까 왔겠지.”
“다친 곳은 없고?”
“…….”
“괜찮으니까 왔겠지. 괜한 걸 물었다, 그치?”
“…….”
“밥은? 밥은 먹었어? 바빠서 제대로 못 먹었지?”
잠이 제대로 깬 건 아닌지 김하윤은 연신 눈가를 비볐다. 무경은 김하윤의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눈 상한다고 그렇게 하지 말고 눈을 깜빡이거나 물로 씻으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귓등으로 흘려들은 게 틀림없었다.
한술 더 떠 김하윤은 눈을 비비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일어나다가, 발을 발 못 디디고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쿵! 하고 무릎인지 머리인지를 바닥에 찧고서는 민망한지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야!”
보다 못한 무경은 김하윤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다행히 머리를 찧은 게 아닌지 김하윤은 무릎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했지.”
“……자다 일어나서 그래. 자다 일어나서.”
“…….”
“왜 화가 났어?”
무경은 자신이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김하윤에게 댈 만한 이유가 딱히 없었다.
무경이 침묵하자 김하윤이 대신 그가 화난 이유를 추론했다.
“혹시 내가 자다가 널 끌어안았어? 그래서…….”
김하윤은 말끝을 흐렸다. 차마 무경의 심기를 거스를까 하지 못한 말이었으나, 당사자인 무경은 달랐다.
“그래. 그래서 그랬어.”
“아……. 왜 그랬지. 미안.”
김하윤의 후회에 무경은 드레스룸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순간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던 하윤이 재차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잠결에 다른 누구랑 착각했나 봐. 넌 줄 알았으면 당연히 안 그랬을 건데. 진짜 미안.”
“난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다?”
“당연하지.”
“그럼 누군 줄 알았는데?”
“……?”
김하윤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아무나? 잠결에 뭐가 뭔지 알아야지. 오늘 사건 사고도 많았고 그래서 뭐, 착각한 거겠지.”
“그래서 뭐랑 착각했는데?”
“아무튼, 넌 아니야.”
“…….”
“진짜 아니야. 내가 꿈에서든 어디서든 널 왜 끌어안냐.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네가 질색하는 거 뻔히 아는데.”
“꿈에서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지금은 생각 안 할지 몰라도 무의식중에는 그럴 수 있는 거고.”
“에이. 너면 왜 끌어안냐. 안을 바엔 차라리…….”
“차라리 뭐?”
“차라리 잠결인 줄 알고 한 대 쳤겠지. 지금도 봐 봐. 실수 한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 물고 늘어지잖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쪽이어도 끌어안고 말았겠어? 그리고 무경아.”
“…….”
“내가 널 좋아하긴 해도 나 너 가지고 음험한 생각 한 적 없어. 이건 진짜야.”
김하윤은 웃으며 능청맞게 대꾸했다. 어떻게든 대강 넘어가자는 말투와 달리 얼굴에 미처 지우지 못한 피곤과 짜증이 배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 때문에 김하윤의 말은 사실같이 느껴졌다.
무경으로선 달가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듣자마자 뱃속에서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불안은 잦아들고 불쾌함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네. 네 구멍 쓸 때마다 걱정했는데.”
무경은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바닥으로 던졌다.
“진짜 그냥 빌려주는 거면 더 편하게 쓸걸. 안 그래? 아, 이건 너한텐 좀 그런가?”
김하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누워. 하고 자게.”
“지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오늘은 안 하면 안 될까? 나 오늘 너무 피곤한데.”
“……뭘 했는데 그렇게 피곤한데?”
“그냥 빨아 주기만 하면 안 될까?”
김하윤은 졸음이 그득한 눈을 끔뻑였다. 평소와 달리 눈 밑이 붉고 어두웠다. 무경은 그만두자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실로 나가자. 침대에 계속 있다간 잘 것 같아.”
침대에 있다간 다른 걸 하자고 할까 봐 거실로 가자고 하는 것이다. 무경은 하윤의 속셈을 알면서도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무경은 거실 불을 켜지 않고 소파 한가운데 앉았다. TV를 켜고 소리를 줄인 뒤 채널을 돌리자 그사이 화장실에 다녀온 하윤은 자연스레 모포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앉았다. 익숙하게 바지를 벗기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경은 모포를 뒤집어쓴 하윤의 머리를 힐끔거리다가 TV로 시선을 돌렸다. 연예인들이 나와 깔깔거리고 있었지만 웃음에 동감할 수가 없었다.
애꿎은 채널만 돌려가며 시간만 죽였다. 오늘 몸이 안 좋긴 안 좋은지 김하윤은 오늘따라 중간중간 자주 멈췄다. 구역질을 참으려 느릿하게 꼴깍이는 느낌이 들었다. 들끓던 불쾌감이 어중간하게 식을 무렵에 무경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깊이 삼키고 있던 것이 단번에 뽑히자 김하윤이 목을 켁켁 거렸다. 평소와 달리 소리를 줄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무경은 하윤의 머리를 잡아 소파 테이블로 밀쳤다.
바닥에 앉아 있던 중이라 아까 전처럼 머리를 처박진 않았다. 대신 상체와 고개만 뒤로 바짝 젖혀졌을 뿐이었다. 반쯤 드러난 하윤의 얼굴을 내려 보다가 그의 목을 잡고 다시 아래를 들이밀었다.
숨이 막혔던지 하윤은 무경의 다리를 짚고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소파 테이블 밀리는 소리만 요란히 났을 뿐이었다.
무경은 하윤의 목을 놓지 않은 채 거칠게 움직였다. TV 불빛에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오른 하윤의 얼굴이 보였다.
“차라리 그때, 죽어 버리지.”
“…….”
“가끔 그렇게 바라. 오늘도 그렇고.”
이어진 자극에 반응하면서도 기분은 이렇게 끔찍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빠졌다. 김하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를 끔찍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무경은 하반신을 뗀 뒤, 모포로 뒤덮인 하윤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기울어진 모포 때문에 젖고 붉어진 하윤의 입가가 보였다. 그는 입을 벌린 채 숨을 헐떡이다가, 돌연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경은 올라가 있던 모포 자락을 내려 하윤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하윤은 잠시 거칠게 숨을 들이켜다가,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그때 반지 찾겠다고 뛰어내렸을 때 말리지 말지.”
“그러게. 그럴걸.”
이제는 편하게 소파 테이블에 몸을 기댄 하윤은, 소리 없이 웃었다. 눈을 감고 눈썹을 늘어트린 채라 진짜 표정을 알기 어려웠다. 무경은 모포 속 하윤의 모습을 능력으로 더듬다가 입을 열었다.
“왜, 지금이라도 뛰어내리게?”
“아니,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너무 힘들었거든.”
“그럼?”
언제냐는 물음에 하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그때 약속한 것을 기억하느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목이 잠겼는지 하윤의 목소리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무슨 약속?”
“예전에, 아주 예전에 어떻게 하면 나 덜 미워하겠냐고 물었을 때. 그때 네가 말했었잖아.”
“……?”
김하윤이 말하는 그때가 언젠지 또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김하윤이 다른 말을 꺼냈다.
“나 오늘 희원이 본 것 같아.”
“……?”
“김희원. 무경아, 희원이 살아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