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54화 (54/162)

54화

“오셨습니까.”

“일은 잘 끝났어?”

“예에, 괜찮게 끝난 것 같습니다. 반응도 좋으셨고요.”

“내가 미리 양념 다 쳐 놔서 그런 거야. 고마운 줄 알아. 날 추우니까 얼른 차에 타고.”

“예.”

하윤은 애써 웃었다. 화가 안 난 건 아니나 낼 힘이 없었다. 날도 너무 추웠고.

박 대리는 하윤이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차를 움직였다. 박 대리는 좋은 말로 하면 운전 베테랑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제 마음대로 운전했기 때문에 하윤은 서둘러 안전띠를 맸다.

“사내새끼가 겁이 많아서. 천천히 해. 천천히. 천천히 해도 돼. 내가 다 알아서 운전 잘할 건데.”

“…….”

“어잇! 씨발, 오토바이 새끼 갑자기 튀어나오네. 저 개새!”

“…….”

“으으씨.”

박 대리의 과실이 분명했으나, 하윤은 무사히 회사에 복귀하기 위해 박 대리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어? 어어. 길이 좀 막혀서 문제였지. 너는?”

“예?”

“너는 왜 아까 서 있겠다고 한 곳이 아니라 부동산 앞에 서 있었어? 집 구하게? 지금 친구 집에 얹혀산댔나?”

“네. 아무래도 이번 연도엔 나가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왜, 친구가 뭐래?”

“뭐라고 한 지는 좀 됐죠. 제가 일방적으로 비비고 있는 거니까.”

“하기야 암만 친구라도 다 큰 사내새끼랑 같이 부대끼면서 사는 건 좀 그렇다. 넌 돈 벌어서 뭐 하냐? 하긴 뭐, 돈이 있으면 그 안경부터 바꿨겠지. 그럼 학자금 갚았어? 일이 년짜리? 아니면 사 년 다?”

“……사 년 다요. 작년에 다 갚았어요.”

“새끼, 공부 좀 열심히 해서 장학금 좀 받았던가,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좀 했던가. 뭐 한다고 사 년을 다 대출받았냐. 그럼 뭐 수중에 얼마 없겠네? 천은 있냐?”

“그것보다는 조금 더…….”

“그럼 돈 버는 재미없었겠네. 번 거 다 꼬박꼬박 은행에 밀어 넣고. 좀 천천히 갚지. 학자금 그건 금리도 낮잖아.”

“그냥 돈 버니까 그것부터 갚고 싶었어요.”

“그래, 돈 번다고 딴짓하는 것보단 낫다.”

왜 혼나는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윤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느 정도 맞는 구석이 있는 말이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 아닌가.

“그런데 집 구하는 거 어려워요?”

“시드머니가 얼마인지에 따라 다르지.”

“그럼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거예요?”

“어떤 집을 구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월세냐 전세냐. 아니면 매매냐. 잠만 자면 되는 집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갖춰야 하는 집인가. 외곽도 괜찮은가, 아니면 무조건 중심가여야 한다. 그런 거.”

“전 싼 집요. 회사 근처면 좋고요.”

“그럼 전세는 아니겠고, 매매는 언감생심이네. 근데 요새 중소기업 전세 대출은 잘 나오는 편인데 그쪽을 해 보지?”

“대출은 좀.”

“그래, 막 대출 다 갚았는데 내는 거 싫을 수 있지. 월세가 싼 집이라……. 사실 싼 집이 찾기 쉬워. 싼 집 중에서 살 만한 집을 찾는 게 어렵지. 그래도 넌 사내새끼니까, 이것저것 안 따진다고 하면 보증금 얼마 안 내고 월세도 싼 곳 찾을 수 있을 거야.”

박 대리는 ‘이래 보여도 사람들 살던 집이다.’라고만 생각하면 수월하게 예산 내의 집을 구할 수 있노라고 충고했다. 이래저래 많은 말을 들었지만, 하윤은 딱히 도움 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원체 박 대리를 믿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박 대리가 과한 수다로 안정을 찾은 덕분에 회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왔음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하윤은 자리에 앉으며 옆자리에 앉은 동료 직원에게 슬쩍 눈짓했다. 동료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마우스만 딸각거렸다.

메신저 창엔 눈을 감은 곰이 코에 손가락을 얹고 쉿이라고 하는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나중에 알려 줄 테니 지금은 일단 입 닫고 있으란 소리였다. 입사 삼 년 차. 회사생활에 큰 뜻이 없을 지라도 눈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대충 자신의 일은 아니고, 제 주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하윤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키며 일거리를 꺼내 들었다. 박 대리가 은근슬쩍 시간을 끌며 회사에 복귀했기 때문에 하윤은 조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퇴근 시간까지는 이제 한 시간 남짓. 오늘 성사된 계약과 기타 관련 사항을 정리해 보고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반면 직접 계약에 개입하지 않은 박 대리는 하윤이 보고서를 작성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물론 가끔씩 아직 안 됐냐고 한숨을 쉬며 재촉하는 일도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박 대리는 정말로 퇴근 시간 내에 다 끝내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보고서가 끝나면 그때부턴 그가 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퇴근 삼십 분 전에 완성해서 토스한다.’

하윤은 어떻게든 박 대리가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에 전투적으로 손을 놀렸다. 간간이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퇴근 시간을 이십 분쯤 남겼을 때, 보고서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틀린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훑어본 다음, 박 대리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냈다는 것을 메신저로 알렸으나, 박 대리는 보지 않았다.

슬쩍 일어나 돌아보자 자료화면 틈새로 인터넷방송을 보고 있었다. 참 배울 점이 많은 선배였다.

그때 과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처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는 이유였다. 뒤이어 내내 심기 불편하던 부장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일어나기만 했을 뿐, 따로 움직이지 않았다.

메일을 확인하는지 마우스만 달깍거렸다. 사무실 모두가 그의 마우스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만하고 집에 가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어느새 여섯 시를 삼 분여 남겨두고 있었다. 이미 겉옷까지 챙겨 입고 나갈 준비 만만한 직원들이 더러 보였다. 하윤도 거기 동참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부장과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물티슈로 책상과 키보드를 닦으며 시간을 죽일 때였다. 이상하게 오늘은 쓰지도 않은 왼쪽 손목이 살짝 시큰거렸다. 스트레칭 겸 살살 돌리자 손목이 아닌 몸통 쪽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묘한 불안감.

하윤은 이 감각이 어떨 때 느껴지던 것이었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순간,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사무실에 있던 모든 휴대전화가 울렸다.

[긴급재난 문자] 구로구 거리공원 입구 사거리 단발성 게이트 발생, 경급 괴수 개체 한 마리 출현. 일대 통제 중, 안전 수칙을 준수하시어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십시오.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모두가 오 분 알람을 맞췄다. 하던 작업을 멈추고 저장한 다음 백업 데이터를 남겼다. 퇴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하던 작업을 마무리한 상태라 진행이 빨랐다.

이 분여가 지났을 때 창밖에선 사이렌 소리가, 건물 안에선 구역별로 설치된 소화전에서 녹음된 대피 안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본 건물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칠 분 후 완전 폐쇄 및 방호막을 발동시킬 예정입니다. 본 폐쇄는 정부의 승인 절차 없이는 해제될 수 없습니다. 칠 분 후까지 대피 요령과 안전요원의 지시에 따라 안전하게 대피를 진행하여 주시고 노약자와 임산부를 먼저 배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정된 대피 장소로 이동해 주시고 이동 후, 부득이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층간 이동을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본 건물은…….]

부장과 자료 백업 담당자는 초조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처리는 빨랐으나 진행되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뎠다. 예상되었던 작업 시간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부장은 임산부 직원과 신입 직원을 먼저 대피시키는 한편, 남은 직원들에겐 건물 내 체류가 길어질 것을 예상하여 비상 물품을 챙기도록 했다.

서버 내 백업과 외부장치 저장이 끝나자마자 부장과 백업 담당자는 비상시 대처 매뉴얼에 따라 외부장치를 잠금장치가 달린 가방에 넣었다. 가방 접합부 위에 서명을 남긴 스티커를 단단히 바른 다음, 직원들을 통솔하여 대피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오 분이었다.

하윤의 회사가 자리한 건물은 오 층까지 지하 대피소로 피신, 육 층에서 십 층까지는 팔 층의 중앙 로비, 십일 층에서 십팔 층은 각 층 대피 장소에서 피신해야 했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분기마다 위급상황을 대비하여 진행하는 소방 훈련 및 각종 훈련이 무색했다. 상층으로 올라가는 용도의 비상구에서 인간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이 있는지 비명이 튀어나왔다.

상층 대피소보다 지하 대피소를 선호하는 의식과 아예 건물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건물이 폐쇄되면 정부 지침 없이는 해제할 수 없었다. 더욱이 건물이 폐쇄될 정도면 상황이 심각한 편이었고, 건물만이 아니라 이 일대가 폐쇄될지도 몰랐다.

위험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되는 것보다 다소 힘들더라도 아예 위험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실제론 위험을 벗어날지 모르는데도 저는 괜찮겠지, 생각하면서.

더 내려갈 수 없도록 오 층과 육 층 사이의 층계참에 차단벽이 내려가자 소란은 더욱 거세졌다. 아예 위층이면 내려올 생각을 안 하지만, 애매하게 높은 층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벗지 못했다. 더욱이 이미 내려간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아슬아슬하게 몇 사람이 더 넘어간 뒤 차단벽이 완전히 내려갔다.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람들은 차단벽을 두드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가까운 대피소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인원이 다 올라간다면 팔 층 중앙 로비에도 사람 다 차겠는데.”

누가 한 말인지 몰랐으나, 그 말이 맞았다.

오 층 층계참에 차단벽이 내려간 것과 같이, 각 구획 별 차단벽이 다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오려다가 갇힌 인원이 가까운 지정 구역으로 이동하면서 총 수용 인원이 다 차고 말았다. 부장은 대피소와 가까운 칠 층에 자리하려 했으나, 일이 층 차이라 결국 본래 사무실에서 머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기존 층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주는 눈치가 매섭다는 이유였다.

이동하는 사이, 건물이 폐쇄되었다. 장기전이 될 수 있으므로 전력을 비축하기 위해 비상등을 제외하고 일제히 소등되었다.

“그래도 우리가 쓰던 층이라 눈치 볼 거 없어서 좋네요. 물건을 써도 다 우리 거니까.”

동료 직원의 말에 하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쁜 생각을 하자면 끝이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편안히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그 외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사이 부장은 직접 남은 직원들을 헤아렸다. 그러던 중 하윤은 박 대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언제든지 있고, 또 언제든지 없는 게 직원다웠다. 언제 나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임산부와 신입을 내려 보낼 때, 그때 같이 내려간 것 같았다.

‘……뭣 모르고 대응하기 힘든 사람 먼저 내려 보내서 걱정됐는데, 약삭빠른 사람이 같이 갔다니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마 그 불안은 약삭빠른 그가 임산부와 신입의 대피를 돕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저 핑계로 사용하고 저 혼자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그럴싸해.’

박 대리의 부재를 알아챈 부장은 그를 걱정했지만, 그를 아는 다른 직원들은 괜찮을 거라며 딴청을 피웠다. 그를 걱정하느니 자신을 걱정하는 게 나았고 또 할 일도 많았다.

하윤은 방호벽이 내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가를 힐끔거렸다.

아직 분류명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대처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려 주지 않는 것을 보아 기록이 없거나 해외에서나 한두 번 발견된 희귀 개체일 것이다.

개체의 등급은 경급. 해외 분류상 A급 괴수였다. 일대일 전투에 특화된 타입은 등급을 받기 쉽지 않았다. 전투력 측정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대를 통제하고 다인원이 머무는 건물들이 재난 문자와 동시에 폐쇄되었다. 범위가 넓고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광역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커.’

더군다나 단 한 마리였다. 겨우 한 마리가 끼친 영향에 분류명을 거론하지도 않은 채, 바로 등급을 결정했다. 그만큼 등장하자마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거리공원 사거리랑 우리 건물은 그렇게 멀지 않아. 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독이나 정신계 공격을 쓸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럼 지금 자신이 하는 건 대피일까, 아니면 수용당하는 것일까.

“……뭘 그렇게 중얼거려? 불안해?”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에휴, 너무 걱정하지 마. 나라에서 다 잘해 주겠지.”

그렇게 말하는 동료 직원이야말로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금방 끝날 거야.”

“……그렇겠죠.”

하윤은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저는 불안해하거나 궁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긴 했으나,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올해 그가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목적에 가까워질 뿐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재난을 반기지 않을 뿐이었다.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바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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