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벌써 출근해?”
김하윤이 잠에서 깬 건 무경이 출근 준비를 마친 뒤였다. 비척비척 방에서 기어 나온 김하윤은 잠이 덜 깼는지 눈도 채 못 뜬 상태로 무경에게 말을 걸었다.
“…….”
무경은 대답 대신 턱 끝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김하윤이 벌써라고 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윤은 무경의 침묵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 이른 시간이 아니었다. 하윤도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하윤의 직장은 일반 직장보다 출근이 삼십 분 정도 늦었으나, 서울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윤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저럴 시간에 아침이나 먹지.’
무경은 주방을 힐긋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달리 말을 걸진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김하윤은 그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으로 따라왔다. 무경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무경이 암만 하지 말라고 해도 김하윤은 늘 인사를 건넸다.
“잘 갔다 와.”
“…….”
“오늘 일찍 들어와?”
“…….”
“난 별일 없으면 정시퇴근할 것 같은데. 물론 부장님이 지랄하면 늦게 오는 거고.”
부장의 심기가 불편하면 일하는 척을 해야 해서 때문에 야근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경으로선 별로 궁금한 내용도 아니었거니와 아침 바쁜 시간에 치근거리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일까.
조금 전에 침대에서 생각했던 일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어?”
“어? 무슨 준비?”
“너 스물일곱 되면 나간다며. 이제 해도 바뀌었는데.”
“…….”
“집 찾아봐야지. 아직 안 찾아봤어?”
“아니, 그……. 찾아보고는 있는데. 맞는 매물이 없네.”
“이것저것 따지고 들지 말고, 적당히 타협해서 나가. 여태 재보고 이것저것 따졌는데도 못 찾으면 그건 네가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이 년이나 준비 기간을 주지 않았던가. 구하는 거처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질 게 아니라 일단 나가야 할 것 아닌가. 무경은 검지로 하윤의 어깨를 밀었다. 미는 대로 툭툭 밀리다가 이내 벽에 다다라서야 휘청거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오늘부터 찾아봐. 알겠어?”
“……어어.”
“간다. 나오지 마.”
무경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작게 열렸던 문이 닫히고 잠금장치 잠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경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다가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층을 내려갈수록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자신이 돌아보자마자 아차 한 표정으로 문을 닫던 김하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잠시 곱씹다가 무경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진짜 바퀴벌레같이.’
무경은 습관처럼 건물 전체를 기운으로 훑었다. 그중 이질적인 김하윤의 기운을 쫓아 위치를 확인했다. 밥 먹기엔 늦었는지 곧장 욕실에 처박혀 그가 차에 올라타는 동안에도 나오지 않았다.
‘꾸물댈 시간이 있으면 밥이나 먹지. 사내새끼가 비쩍 말라서는.’
그러니까 어린애 교복 맞춘 것같이 헐거운 반지가 도통 맞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무경은 신호 앞에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기운에 집중하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흩어 냈다.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일과가 이어졌다. 계급이 올라간 뒤로 현장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지고 대신 행정업무만 하는 날이 수두룩했다. 덕분에 팔자에 없겠다 싶은 책상 생활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몇 가지 메일을 확인하거나 밑에서 올린 보고서를 확인했다. 추가사항을 덧붙여 위에 보고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등. 얼마 일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 퇴근 시간을 삼십여 분 남겨 두고서 얼추 오늘 해야 하는 일을 마무리했다.
퇴근 준비를 하려다가 문득 별일 없으면 정시에 퇴근한다던 김하윤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김하윤이 정시에 퇴근해 봤자 저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경은 시계를 힐긋거리다가 보고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젠 폐쇄되고 없는 미궁 관측연구소의 극비자료로, 무경의 모친인 서이주가 반출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미궁 관측연구소에서 작성한 정식 문건이 아니며,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이것을 노리는 국내외 세력들이 있었다.
‘우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자료를 어디서 뭘 듣고 와서 난장을 부리는지.’
예전에 서울 미궁과 관련된 세력에서 정보를 흘린 것 같다는 내용을 확인하며 무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갑갑하진 않았을 것이다. 저도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할 수 있었을 테니까.
무경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시간은 어느새 퇴근 시간을 오 분여 지나고 있었다. 이만 퇴근해도 될 일이지만 이상하게 퇴근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김하윤이 정시 퇴근 운운한 탓이었다.
그때 긴급 호출이 들어왔다. 지원을 요청하는 통신을 들으며 무경은 코드를 확인했다.
등급과 계열, 괴수가 나타난 위치와 통제 범위를 확인하던 무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십일월과 십이월 즈음의 겨울과 일월 이월 즈음의 겨울은 사뭇 다르나, 춥다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윤은 하윤에게 고객 상담을 맡기고 차와 함께 사라졌던 선배를 기다리며 옷깃을 여몄다.
‘개새끼.’
개 같은 사수가 주임으로 승진하여 자신과 멀어져 환호성을 질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차라리 사수가 나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 선배인 박범병 대리는 바람같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사무실이나 외근 중일 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윗사람에게 그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자리에 있거나, 복도에서 나타나 눈도장을 찍곤 했다. 덕분에 윗사람들한텐 현장을 뛰며 덕분에 바쁘게 일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하윤은 그가 정신계 초능력자가 아닐지 늘 의심하고 있었다. 정신계야 잘 들키지도 않고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면 실전에 도입되기 어려워 민간 기업 쪽으로 많이 빠지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세뇌하진 않지만 좋은 인상을 주기 쉬워 특히 영업 쪽에서 환영받았다.
‘실적을 올리는 걸 보면 분명히 영업하고 있긴 한 건데.’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박 대리는 오늘 자기야, 아파? 등등을 말하다가 하윤에게 일을 떠넘기고 갔다. 적당히 추리하자면 여자 친구가 아파서 조퇴하려는 중이라 그가 데리러 간 것이리라.
‘아, 안 좋은데.’
하윤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암만 외근처가 회사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건 분명 출장이 아닌 외근이었다. 이렇게 늦어지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같이 외근 나간 하윤에게도 불똥이 떨어졌다.
‘왜 하필 나랑. 차라리 막내를 데려가지.’
막내면 뭘 몰라서 넘어갈 수나 있지, 삼 년 차인 하윤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추운지 몰랐다. 괜스레 설움이 밀려왔다. 하윤은 발뒤꿈치를 올렸다가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차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갈까 고민할 때, 건너편에 있는 부동산의 유리 벽이 보였다.
유리 벽면 가득 매물이 프린트된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맨 위에는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큰 글씨를 붙여 놓았다.
◆전세, 월세 다량 보유. 상담 환영◆
하윤은 홀린 듯 길을 건너갔다. 제 예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금액의 매물들을 지나, 원룸 전, 월세를 훑어보았다. 가격은 다른 곳이랑 비슷했지만, 집이 어떤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햇살 좋은 집, 역세권, 넓은 방 등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고 실제 도움 될 만한 정보는 쓰여 있지 않았다.
하윤은 이 정보지들이 앱이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허위 매물이랑 비슷한 용도가 아닐까 의심했다.
‘들어가면 이 집은 빠진 지 오래라고, 대신에 좋은 게 나왔다면서 이상한 방이나 보여 주는 거지.’
자세히 보니 꽤 오래 걸려 있었는지 종이 귀퉁이가 조금 울어 있었다. 적어도 한 계절 이상 붙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집을 구하긴 구해야 하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무경이 퇴근 후에 꼭 집을 알아보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무경에게 미안하지만, 하윤은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집을 따로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와 이 년 전에 스물일곱이 되면 집을 나가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집을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전부 끝내는 날이지.’
그럴 속셈인데 집을 구해 봤자 사후처리만 복잡해질 뿐이지 않은가.
‘게다가 새해 첫날이나 생일날에 죽을 수도 없고.’
특히나 하윤과 무경은 생일이 같았다. 무경은 하윤의 생일을 알았지만, 자신의 생일과 같은 날이라고 체감하지 못했다. 함께 생일을 축하한 적도 없었고, 축하라고 해 봐야 하윤만 무경의 생일을 축하했기 때문이었다.
백무경으로선 그저 하윤의 뒷조사하다가 알게 된 신상정보일 뿐이었다.
‘그냥 관심이 없겠지.’
그러다 보니 아마 그날 죽으면 그의 생일날에 맞춰 죽은 줄 알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날은 그 ‘백무경’과는 선을 긋는 날이었다. 남의 생일날 기억에 남으려 자살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야 죽고 나면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피하는 게 맞는데, 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치면 죽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하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암만 생각한다 한들 더 살 자신이 없었다.
바야흐로 스물일곱,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날이 왔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김하윤이 집을 나가길 바랐던 백무경의 바람보다 족히 백배는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날을 미뤄 가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드는지 김하윤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죽을힘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생일을 피하자면 앞뒤로 한 달쯤 띄우는 게 나을 거고. 생일 앞보단 후가 낫겠고.’
하윤은 자신과 무경의 생일 후에, 이미 없다시피 한 관심에서 더 멀어진 뒤에 조용히 죽길 바랐다. 원래는 주변을 정리하고 한적한 곳을 여행하다가 하려고 했지만, 오늘 무경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가는 척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예 생일 한 달 전쯤에 나가서…….’
이것도 스물일곱까지 있어 주겠다고 했지, 정확하게 날을 정한 건 아니지 않은가.
‘집을 나간다고 해도 간간이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볼 거고.’
백무경이 안다면 기함하리라. 하윤은 피식 웃었을 때였다. 클랙슨 소리가 건너편 도로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차가 보였다. 신호 없는 건널목 앞이라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 길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