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 라스트-52화 (52/162)

52화

5. 거짓말쟁이의 운수 좋은 날

긴 모래 해변 위로 피서객들이 버글거렸다. 텐트와 파라솔이 곳곳에 들어섰고 아이스크림 장사와 돗자리 장사가 그 사이사이를 누볐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경은 그들의 얼굴이 어떻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쓸 신경은 좁쌀만큼도 없었다. 옆엔 제 가족과 □□이 있었다. 무경은 젊은 얼굴의 서이주와 백진하, 그리고 어린 □□를 번갈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왜 웃어? 갑자기.]

□□의 말에 무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가족들이 다 있잖아. 그렇게 말하기엔 쑥스러웠다. 무경이 말을 얼버무리자 □□은 금세 관심을 잃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파라솔 밑에 드러누운 백진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 조금만 더 놀아요. 예?]

[안 돼. 지금은 휴식 시간.]

[아, 더 놀고 싶은데!]

□□은 볼멘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였다. 백진하처럼 모래사장에 누우려는 모양이었으나 서이주가 말렸다. 서이주는 커다란 물통을 들고와 무경과 □□의 몸의 소금기를 대강 걷어 냈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대강 몸을 닦은 다음 등에 선크림을 듬뿍 짰다.

[자, 서로 선크림 발라 주기. 나중에 살갗 다 벗겨진다. 지금도 너희 까매.]

서이주의 말에 무경은 □□의 등에 짜 놓은 선크림을 고루 발라 주기 시작했다. 서이주는 둘 다 까맣다고 했지만, 실제로 까만 건 무경 혼자였다. □□는 피부가 흰 편이라 볕에 암만 타도 빨갛게 익기만 할 뿐 무경이나 백진하처럼 색이 짙어지진 않았다. 더군다나 이렇게 익으면 나중에 살갗이 벗겨질 때도 아프게 벗겨졌다.

무경은 서이주가 짜 놓은 것도 모자라다며 선크림을 추가로 더 짜서 □□를 꼼꼼하게 발라 주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서이주가 혀를 차며 한소리 했다.

[무경아, 너도 좀 발라라.]

[그래, 너도 이리 와.]

곁에 서이주가 있기 때문일까. □□는 평소와 달리 무경에게도 제법 펴 발라 주었다. 무경의 등에 다 펴 바르지 않아 흰 크림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른 데 의의를 다 했기 때문이었다.

□□과 무경이 크림을 펴 바르는 사이, 백진하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바닥을 팠다. 그 모습을 보며 서이주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혹평을 남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진하는 서이주의 혹평에도 말갛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백진하는 □□과 무경을 불렀다. 백진하의 능력으로 땅을 파는 것까진 가능했지만 덮는 건 어려웠다. 백진하는 두 명의 졸개에게 자신의 몸 위에 따듯한 모래를 덮을 것을 명령했다.

[이런 거 말고 다시 물로 나가요.]

[어허, 이것도 다 수련이야. 수련.]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 네에?]

[맞아요. 지금 누우면 한참 안 일어나실 거잖아요.]

무경은 □□의 의견에 동조하며 백진하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짓눌렀다. 백진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무경을 바라보았다. 제 편이 아닌 다른 놈 편을 드는 게 약이 오른 듯했다.

[□□가 놀자고 하니까 아버지 구박하는 것 좀 봐. □□이 너도 이리와. 수련할 땐 맨날 조금만 해도 쉬자고 하면서.]

백진하가 잡는 척 손을 뻗자 □□이 무경의 뒤로 몸을 감췄다. 무경은 □□을 대신해 백진하에게 잡힌 채 말갛게 웃었다. 아무 걱정도 괴로움도 없이.

[……어휴. 그래, 다 덮고 나면 둘이서 놀고 와도 돼. 대신 눈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무경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 무경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뭐라고 속삭였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뭘 바랐을지는 대강 짐작이 갔다. 무경이 능력을 써서 모래를 움직이자 백진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능력 말고 손으로 하기.]

땅은 초능력을 써서 파 놓고는 덮는 것은 왜 안 되는가. 무경은 잠시 입을 삐죽였으나 □□와 둘이서 놀기 위해 열심히 백진하의 다리부터 차곡차곡 모래를 덮었다. 땡볕이라 모래들이 죄다 바짝 말랐을 줄 알았지만 조금만 파다 보면 젖은 모래가 나왔다.

백진하가 젖은 모래는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무경과 □□는 부지런히 고운 모래를 퍼다 날랐다. 그러는 사이 백진하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서이주는 무경과 하윤이 골라낸 젖은 모래를 손으로 뭉쳤다.

동그란 모래 덩어리를 백진하의 가슴팍에 대어 보고는 밑을 살짝 깎아 반구 형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완성된 모래 덩어리를 백진하의 가슴 위에 올렸다.

[흐흐흐.]

나지막한 서이주의 웃음에 무경은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서이주가 백진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트리려고 했다. 그러자 서이주가 다급히 조용히 하라며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과 무경은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주는 소리 없이 웃으며 모래 사이에 섞여 온 해초로 모래 덩어리 사이를 연결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안 □□과 무경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그냥 되는 대로 쌓기만 했던 모래 더미를 어떤 모양으로 바꾸려 했다. 열심히 모래를 도닥이고 있는 사이 손을 턴 서이주는 카메라를 꺼냈다. 작품을 만드는 데 열중해 찍는 줄도 몰랐다가, 찰칵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사진을 찍는 줄 알았다.

서이주가 사진을 더 찍게 고개를 들어보라고 했으나, 괜히 소리가 들리면 백진하가 깬다는 핑계로 사양했다.

□□과 무경은 백진하를 인어왕자로 만들어 준 다음 튜브를 들고 조심스레 일어났다. 괜히 지금 백진하가 깨면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도 조심해서 내쉬었다. 파라솔 밑에 앉아 있던 서이주는 백진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을 신호 삼아 무경은 □□의 손을 잡고 바다를 향해 달렸다.

조금 전에 놀 땐 백진하가 튜브를 끌어 주고 했지만, 그건 순전히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안전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본능적인 위험에 평소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는 초능력자의 특성에 안전상의 위험도 적었다. 여차하면 무경이 바닥 물을 밀어 버릴 거고, □□은 근처에 있는 문을 열고 튀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무경이나 □□은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무경은 □□이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무경이 워낙 옆에 붙어 있다 보니 □□도 무경을 뿌리치고 위험한 행동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백진하나 서이주, 그리고 무경까지 세 명의 잔소리를 견뎌야 했으니까.

하얀 포말이 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그 위에 다시 파도가 밀려들었다. 무경은 급히 들어가려는 □□을 말리고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축이게 했다. 보다 못한 파도가 둘을 휩쓸어 머리끝까지 적시고 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물속에 들어갔다.

물이 허리를 간질일 때쯤, 무경은 하윤을 등에 업었다. 맨 살갗의 감촉과 체온이 훅 느껴졌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가며 허튼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들킨다면 다시 암시에 조정받으러 가야 할지도 몰랐다.

무경은 제 상태를 숨기고자 얼른 물속으로 가고 싶었다. 한 손으로는 □□을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튜브를 잡은 채 성큼성큼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가슴께에서 술렁일 때, 무경은 튜브를 잡고 가볍게 위로 떠올랐다.

발끝이 바닥에서 뜨고 그 밑을 차가운 물살이 스치고 지나갔을 때, 몇 번이고 고만고만한 파도를 솜씨 좋게 타고 놀았다. 슬슬 더 큰 파도를 바랄 적에 마침 제법 높은 파도가 오는 게 보였다. 넘실거리는 때에 맞춰 몸을 위로 띄워 파도를 탔다. 파도는 무경의 몸을 술렁이고 지나간 다음에야 꺾여 뒤에 있던 사람들을 휩쓸었다.

환호와 비명이 뒤섞인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무경은 짭짤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조금 전의 두 배는 될 법한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마침 파도를 확인한 □□가 손끝으로 파도를 가리켰다. 파도를 탈까, 휩쓸릴까. 무경은 고민하다가 □□를 불렀다.

[하윤아.]

자신의 소리가 귀에 물이라도 들어간 양 둔하게 들렸다. 그러나 무경은 자신이 □윤을 부르던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내 인식하지 못했던 하□의 얼굴이 보였다. 검고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갈색 눈. 무경은 그 눈이 능력을 쓸 때마다 황금색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 맞아.’

하윤아, 하윤아. 무경은 속으로 하윤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내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한 듯 머리가 개운해지고 소름이 올랐다. 이젠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꿈을 깨서도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지. 무경은 속으로 한참 되뇌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하윤이 웃지 않았다. 분명 이렇게 노는 것을 좋아했는데.

[하윤아, 재미없어?]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컸다.

[……잖아.]

하윤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무경은 하윤이 뭐라고 했는지 곱씹다가 그를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파도를 타 보려고는 했으나 생각보다 일찍 꺾였다. 정점까지 솟아올랐던 파도가 끝에서부터 맹렬하게 부서지며 무경과 하윤을 휩쓸다 못해 집어삼켰다.

하□과 튜브를 잡은 채 무경은 눈을 감았다. 세찬 물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물속에 섞인 모래가 얼굴을 거칠게 쓸 때, 무경은 조금 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윤의 말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네가 웃지 말라고 했었잖아.]

어느새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무경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파도가 밀려들었다. 무경은 몸을 돌렸다. 조금 전과 비교하면 턱도 없이 낮은 파도였으나 밀고 당기는 힘이 컸다.

나동그라진 무경은 가까스로 일어나 젖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제 손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경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다랗게 펼쳐져 있던 황금빛 해변을 파도처럼 밀어닥친 어둠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피서객들은 저희가 삼켜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무경은 □□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수많은 얼굴 없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무경은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무경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서이주와 백진하를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장소에 서이주와 백진하가 없었다. 어느새 모래사장은 방 하나의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더는 바닷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냥 어리던 무경의 몸도 어느새 익숙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에 모래사장도 더는 남지 않았다. 오로지 그만 홀로 덜렁 서 있을 뿐이었다.

잃어버려선 안 되는데, 빼앗겨선 안 되는데.

무경은 절망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다가 꿈에서 깼다. 눈을 번쩍 뜬 순간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 줄도 모르면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몸을 일으켰다. 파도에 휩쓸리듯 몸을 비틀거리다가 겨우 무릎으로 서고서는, 오래된 습관에 따라 곤히 잠든 김하윤을 내려다보았다.

“…….”

안도가 밀려들었으나 왜 안도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무경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꿈을 떠올리려 했으나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분명 꿈에서 중요한 것을 떠올렸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모든 관절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절망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허물어진 무경은 침대를 짚은 채로 눈을 감았다.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리고 턱밑이 바르르 떨렸다.

분명히 생각났고 똑똑히 봤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이라곤 잊고 있던 걸 떠올리고, 얼굴도 봤다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그리고…….’

무경은 어둠이 집어삼키던 해변가를 기억해 냈다. 무경은 김하윤을 깨워 어릴 적에 자신이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곤히 잠든 모습을 보자 깨울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깰 하윤이 안쓰럽다기보단, 김하윤의 말을 믿을 자신이 없었다.

‘매번 의심하는 주제에.’

무경은 제게 밀려드는 감정을 삭이려 애썼다. 생각만 같아선 다시 그 꿈을 꾸고 싶었다. 그러면 이번엔 깰 때까지 알아낸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잠들기엔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무경은 다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서 곤히 자는 하윤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렇게 심란한데 홀로 잘 자는 하윤의 모습이 미웠다. 아니, 밉다기보단 그냥 깨우고 싶었다. 눈 감고 잠든 게 아니라 깨어 있길 바랐다.

무경은 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경의 손 그림자가 몸에 닿기도 전에 하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깨워 봤자 잠 덜 깨서 헛소리만 할 텐데.’

이대로 손이 닿기만 해도 하윤은 잠에서 깬다. 닿을 때마다 겪은 일 때문에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무경에게 닿을까 봐 침대 끝에 바짝 붙어 자고 있었다. 오른손의 반절은 침대 밖에 나가 있었다.

“…….”

손을 거둔 무경 또한 오랜 버릇같이 눈과 능력을 이용해 하윤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확히 거기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거나 혹은 생생한 꿈을 꾼 건 아닐까.

무경에게 하윤은 늘 이질적인 존재였다. 무경은 하윤이 수많은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눈으로 아는 것도 있지만 그 외의 감각으로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쩔 땐 무경은 하윤을 바퀴벌레와 같다고 생각했다.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직접 죽은 모습을 보지 않는 한 끊임없이 위치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존재. 달갑기 때문이 아니라 소름 돋게 싫고 징그럽기 때문이라는 이유까지 똑같지 않은가.

‘벌레.’

무경은 자신이 싫어하는 벌레들을 떠올렸다. 물론 벌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난리를 떨진 않지만 그렇다고 제게 기어오른 벌레를 가만둔 적은 없다.

아니, 벌레들은 무경에게 닿은 적이 없었다. 그 전에 다 죽이거나 쫓아 버렸으니까.

벌레가 제 몸에 닿은 적이 없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지만 터트려 죽였을 때의 느낌은 기억하고 있었다.

으깨진 내장과 진액이 뒤섞인 사체. 숨이 끊어졌음에도 까딱거리는 다리와 더듬이.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더럽고 역하다고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기억’났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무경의 안에서 벌레는 징그럽고 더러우며 역한 존재라고 정의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하윤과 벌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징그럽고, 더러우며, 역하니까.

무경은 자기 생각과 부합하는 김하윤의 모습을 찾아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고른 이마와 아미, 굳게 닫힌 눈꺼풀과 속눈썹, 살짝 상기된 뺨과 부푼 입술. 턱선을 따라 다시 귀로 시선을 돌렸다가 검은 머리칼이 덮고 있는 흰 목덜미를 보았다.

무경은 살결을 만지듯 손끝을 까딱였다.

어느새 예민하게 섰던 신경이 완전히 누그러졌다. 머리끝에 남았던 얼얼함도, 초조함으로 들썩이던 가슴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무경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김하윤의 가장 징그럽고 더러운, 역한 부분을 찾아 시선을 내릴 뿐이었다.

마침내 무경은 하윤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이불자락에 반쯤 파묻혀 있었으나 네 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가리진 못했다.

‘또 여기 끼고 있네.’

무경은 반지의 출처는 몰랐지만, 김하윤이 무슨 마음으로 끼고 있는 줄은 알았다. 아마 김하윤의 지인들에게 무경은 하윤의 애인으로 소개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김하윤은 평소엔 중지에 반지를 끼다가 소개가 많이 들어오거나 치근거리는 사람이 있을 때 네 번째 손가락에 낀다고 했다. 실제 그럴 것 같지 않고 단순히 망상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데다, 그렇다고 한들 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꽤 오래 낀 반지임에도 여전히 헐거웠다. 누가 샀는진 몰라도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어린애 교복 사듯 손가락이 클 걸 대비해서 한참 큰 반지를 산단 말인가. 직접 샀다고 해도 말이 안 되고, 누가 사 줬다고 해도 말이 안 됐다.

어떻게 봐도 잘못 산 반지 아닌가?

큰 걸 알았으면 바꾸든 줄어든 지 해야지. 저대로 계속 끼는 것도 이상했다. 잃어버리기에 딱 좋았다.

무경은 염동력을 이용해 하윤의 반지를 살살 돌렸다. 워낙 헐거워 살에 닿지 않게 돌릴 수도 있었다.

‘촌스러운 반지.’

한때는 바꾸거나 줄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의 유품이라거나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김하윤이 쓰는 용도로 보아선 또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용도도 그렇고 중지와 약지를 번갈아 끼는 행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꼬운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무경은 하윤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 창밖으로 던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김하윤은 울부짖으며 창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당황한 나머지 무경은 창밖으로 몸을 던진 김하윤을 붙잡고야 말았다. 얼떨결에 쓴 능력이 통하지 않자 당황한 나머지 손을 쓰고야 말았다.

김하윤이 끔찍하게 싫을 땐 그때 잡지 말 걸 싶었다. 하지만 또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죽어선 가치 없으니 말리는 게 맞았노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러나저러나 반지나 김하윤이 제게 갖는 감정은 쓸데없었다.

‘인제 그만 좀 하지.’

무경은 김하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쓸데없고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그것도 남에게 피해만 주는 짓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일까.

김하윤에겐 사랑일지언정 제게는 그저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아니, 어쩌면 김하윤 스스로에게도 사랑이 아닌 집착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역겹게.”

무경은 손을 뻗어 하윤의 손을 살짝 쳤다. 그야말로 잠깐 닿았을 뿐이나 김하윤은 바로 손을 움츠렸다. 무경은 깼나 싶어 김하윤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그러나 아직 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무경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레니 역겹니 뭐니 생각하긴 했지만, 예전보다는 그렇게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미움이 무뎌진 탓이리라. 예전부터 괜한 화풀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김하윤에게 인간적인 연민이 들 때도 있었다.

‘대체 언제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할는지.’

스물일곱에는 지금 이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었는데, 정말로 나갈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자꾸만 김하윤을 바퀴벌레에 대입하게 되지 않는가.

“차라리 어디서 객사라도 했으면.”

이렇게 구차하게 살 바엔 이제라도 죽었으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김하윤 저도 편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 소모적인 미움을 쏟아 내거나 받을 일도 없이 끝을 낸다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이 사라진 뒤 김하윤에게 저열하게 굴었는데, 이젠 흉내 낸 저열함이 아니라 자신의 본모습 같았다. 한참 늦은 자괴감이 무경을 괴롭혔다.

그러나 자괴감과는 반대로 무경은 베개를 집어 하윤의 얼굴 위에 툭 내려놓았다. 이딴 거로는 김하윤의 질긴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그저 잠이나 괴롭히겠지. 무경은 짜증을 삭히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막 울리려는 휴대전화 알람을 끄고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무경이 올려 둔 베개가 흔들렸으나, 금세 다시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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