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하윤은 뒷말을 차 한 모금과 함께 삼켰다. 무경 또한 비슷한 질문을 몇 달 전에 했었다. 무경은 아직도 자주 폭주했고, 깨어나면 만성적인 탈력감에 시달렸다. 그 때문일까 폭주에서 깨어나면 짜증을 내거나 홀로 화를 삭이거나, 또는 굉장히 심란해했었다.
그리고 그날엔 이전보다 더 짧은 주기로, 더 짧은 시간 내에 깨어나고선 굉장히 심란해했었다.
땀을 흠뻑 흘린 채, 몸을 웅크리고서 눈동자를 가만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윤을 발견하고선 낮게 잠기다 못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처음엔 무경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무경에게 하는 행동 전부를 통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 그리고…….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을 일.’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겹고, 부끄럽고, 끔찍해. 그리고 이제 이렇게 사는 거 너무 지겨워. 제발, 이제 그만하면 안 돼? 넌 안 질려?]
무경은 자신이 지쳤노라 고백했다. 하윤은 나는 그러지 않았겠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접착제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하윤 한참을 숨만 겨우 내쉬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물었었다.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왜 허락해 줬어? 왜, 나랑 같이 산 거야?]
[여태 한번을 안 물어보더니.]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계속 안 듣는 게 나을 건데.]
무경은 그답지 않게 대답을 피했다. 그러나 하윤은 들어야겠다고 우겼다. 그걸 들어야 계속할지 말지를 결정할 것처럼 굴자 무경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가 불행했으면 해서. 네가 전부 잊고 행복해지면 안 되잖아.]
[…….]
[그래서 계속 기억하게 하려고 그랬어. 겸사겸사 딴짓 안 하는지도 감시하고. 그러려면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진짜 안 듣는 게 나았네.]
무슨 좋은 말을 듣겠다고 졸랐을까. 하윤의 후회에 무경은 원래도 말하려고 했노라고 털어놓았다. 더 듣지 않으려는 하윤을 붙잡고 무경은 마저 이야기했다.
[너한테도 나 미워할 기회를 주려고. 그리고 끝내려고.]
무경은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야 이전의 길 잃은 분노가 어느 정도 추슬러졌다고 말했다. 여전히 하윤이 좋지 않고 가끔은 거슬려 참을 수 없으나, 때때로 그 자신도 어렸듯 하윤도 어렸겠다 싶었노라고. 그래서 아주 조금이나마 후회한다고.
[그래서 미워할 기회를 주려고 했었어. 그러면 너도 상한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르지 않을까 생각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는 제안이었다. 무경의 말을 듣는 순간 하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좀 끝내자. 사는 건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나가든 좀 더 있다가 나가든 네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그래도 계속 산다면 기간을 정했으면 좋겠어.]
[……기간?]
[그래,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목표가 생기잖아. 목표가 생기면 의지도 생기고 의지가 생기면 인내도 되고.]
기간을 정하면 그동안은 참겠다는 말이었다.
[대신에 감정은 좀 정리해 줘. 너랑 나 친구하기로만 했잖아. 네 감정, 많이 불편해.]
무경이 쏘아붙이는 것도 주먹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경과의 대화가 낯선 것도 한몫했다. 그냥 어디로만 숨고 싶었다. 아니면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 이제 정말 정리할게. 그리고 조금만 더 곁에 있게 해 줘. 이제 막 취직해서 전세금도 못 모았고 아직 너 혼자 두기 그래.]
바들거리면서 뱉은 변명에 무경은 어처구니없어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힐긋 본 얼굴에 담긴 경멸에 온 내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하윤은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너도 참 너다. 그래서 기간이 얼마나 필요한데?]
이 짓을 언제까지 할까.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견디는 게 벅차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답은 빨리 나왔다.
여태 그를 잡아 주고 옭아맨 무경이 남긴 바람과 계획. 거기에 명시된 그 날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하윤은 무경에게 이 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물일곱이 되면 이 집에서 사라지겠노라고. 자꾸만 끓어오르는 마음을 삭이고 또 삭인 다음에, 반지를 몇 번이고 긁은 다음에 대답했었다.
그리고 오늘, 기준이 비슷한 물음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 비정상적인 생활을 계속 할 건가. 하윤은 이전보다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스물일곱. 딱 그때까지. 그때까지 하려고.”
“뭐?”
“스물일곱까지만 하려고.”
기한을 묻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준은 하윤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또 금방 가. 네가 군대 갔다 온 것처럼. 원래 남이 군대 갔을 땐 금방 나오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너도 나 군대 보냈다고 생각해. 그럼 얼마 안 있어서 정신 차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걸.”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아씨. 또 답답하게 하네.”
하윤은 남은 이 년은 더 버틸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도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든.
“그리고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알겠거든.”
“알면 왜 그렇게 하는데!”
기준은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으나 흥분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윤은 기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무 섭섭할까 봐. 그게 도무지 견뎌지지 않더라고.”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불행에 골몰하여 자신을 고립시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늘 쫓기듯 초조하고 불안해서 어느 게 옳은지 그른지 가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렇게 급하게 선택하고 나면 언제나 무거운 후회가 가슴을 짓눌렀다.
관계가 계속될 때마다 하윤은 스스로가 좀먹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주변이나 무경의 말처럼 거리를 두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윤은 자신이 고름으로 가득 찬 풍선 같다고 생각했다. 고름이 없으면 쪼그라들고, 고름 때문에 더럽고 쓸모도 없고. 날카로운 것으로 푹 찌르면 사방에 고름을 뿌린 채 거꾸러질 그런.
고름을 에워싸고 있는 고무 껍질은 무경을 향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연약해 보이지만, 제법 질겨서 그래도 아직 까지는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무경이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무경이 하윤을 사랑하고, 하윤이 무경을 사랑하는 것은 저희에게 종속된 운명이었다.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운명으로 묶인 사이이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 당연했다.
예전에 무경이 절 사랑해서 제 모든 것을 받았듯 하윤 또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경이 제게 어떤 짓을 하든지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왔어.”
집에 돌아오며 인사를 건넸지만 늘 그렇듯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윤은 아랑곳없이 신발을 벗다가 문득 무경의 신발이 아주 조금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에 들어오자 예상대로 거의 모든 물건이 지상에서 삼 센티 정도씩 떠 있었다. 하윤은 거실에 서서 집 안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겉옷과 가방을 벗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열고 갔던 안방 문이 닫혀 있었다.
하윤은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머리칼을 대강 털어 말린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주방에 가서 잔에 물을 그득 담아 천천히 들이켰다. 무표정한 얼굴로 물만 계속해서 꼴깍꼴깍 마시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씻으러 갈 때와 달리 이제는 안방 문이 열려 있고 공중에 떴던 모든 물건이 바닥에 자리했다. 하윤은 지친 표정과 발걸음으로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엔 파자마로 갈아입은 무경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하고, 얼굴은 고통스레 일그러져 있었다. 하윤은 무경의 옆에 앉으며 그의 이마를 쓸었다.
“오늘내일쯤에 이럴 것 같았는데, 회사 근처로 기준이가 왔어.”
“…….”
“이야기 좀 하다가,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걷다 보니까 좀 늦었네.”
“…….”
“형 꼴이 이래서 속상한가 봐. 난 요새도 뭐 딱히 잘하는 게 없어. 상사한테 깨지구, 고객한테 깨지구. 오늘은 동생한테도 조금 털렸네. 그리고 뭐 너한테는 매일 깨지구.”
“…….”
“근데 기준이 알아? 내 동생 기준이. 쌍둥이 중에 남자애. 여자애는 지하고.”
“…….”
“무경아.”
하윤은 나직한 목소리로 무경을 불렀다. 무경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으나 늘 그랬듯이 눈을 뜨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지? 다 까먹어서 하나도 모르지?”
하윤은 무경의 이마를 쓸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마자 무경의 손이 불쑥 올라와 하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경은 하윤의 손을 끌어당기며 뜻 모를 소리를 웅얼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양 남은 한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지만, 여태까지 견뎌 온 건 사랑 외에도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전적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예전엔 무경을 곧잘 이겼으므로, 이제 곧 자신이 무경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무경이 얼마 전에 후회를 입에 담았을 때 하윤은 속으로 웃었다. 무경은 미워할 기회를 제게 준다고 했었지만, 사실 기회를 주기 전에 하윤은 이미 그를 미워했다.
“너는 내가 사랑만 한 줄 알지? 아니야. 나, 사실 너 미워해.”
이렇게 미워서 사랑이 아닌가 싶다가도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그를 너무 사랑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미워하다가 사랑마저 부정하는 모습을, 아니. 어렸을 적 무경이라면 하윤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전에는 네가 이렇게 될 때면 그나마 숨통이 트였는데.”
지옥에서 천국에 온 것처럼, 내내 허전하던 마음이 채워져 비로소 안정을 찾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지옥에서 다른 지옥을 오가는 것만 같았다.
“…….”
무경의 손이 하윤의 뺨을 더듬었다. 얼굴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윤곽을 쫓듯 손끝으로 조심스레 더듬기 시작했다. 눈가와 눈썹 뼈, 미간 사이, 그리고 콧대와 입술.
하윤은 무경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금 전과 달리 찡그린 얼굴이 아니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을 뜨려고 그러는지 눈꺼풀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떨렸다. 그러나 늘 그랬듯 눈을 뜨지 못했다.
“……너 요새 일찍 깨는 거. 혹시 눈 떠 보려고 그러는 거야?”
무경의 폭주 주기와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보면 무경의 의도가 섞여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야 저를 알아차리니 이 상태에서 눈을 떠 보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윤은 무경이 제 얼굴을 더듬듯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속삭였다.
“깨서 뭐 하게.”
“…….”
“깨 봤자 이 집에 너랑 나밖에 없는데.”
도대체 뭘 보려고, 뭘 느끼려고 이러는지 몰랐다. 예전엔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화낸 적도 있지만, 하윤은 이제는 무경이 눈을 뜰까 봐 겁났다.
깨 봤자 저밖에 볼 게 없잖은가.
김희원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떴는데 자신이 보인다면 무경이 어떻게 될까. 아마 곧잘 하던 말처럼 자신을 죽이고 싶을지도 몰랐다.
하윤은 무경의 얼굴을 더듬던 손으로 무경의 눈을 가렸다. 지그시 누른 손바닥에 무경의 속눈썹이 팔랑였다.
“무경아, 이제는 그냥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말고 기억도 하지 마.”
하윤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냥 이대로 살아. 좋을 거 하나 없어.”
무경의 손이 하윤의 손을 붙잡았다. 손목을 잡았다가 그대로 타고 올라 자신의 눈을 가린 하윤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평소랑 다른 다정한 손길에 하윤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다가 숨을 쉬듯 웃고는 남은 말을 마저 꺼냈다.
“내가 다 망쳐 버렸거든.”
이제는 무경이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너무나 많이 바뀌고 말았다. 그러니 무경은 기억을 떠올려선 안 됐다.
“그래도 하나는 다행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불행해 줄 수는 있잖아. 안 그래?”
늘 그렇듯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 또한 끔찍하게도 다행이었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네.”
서이주나 하윤이나 무경이 행복하려면 곁에 김하윤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서이주는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윤이 서이주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무경아, 이제는 나 그냥 잊어도 돼. 대신에 조금만 더 옆에 있어 줄게.”
혹여 먼 미래에 어쩌다 자신을 떠올리더라도 섭섭하지 않게. 하지만 떠올리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으리라.
하윤의 말에 무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윤은 짧게 숨을 들이켜며 무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스물일곱까지만. 그때까지만 있을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내가 사랑한 열일곱 백무경이랑 같이 사라지려고.”
“…….”
“그러니까 그때까지 날 완전히 잊고, 새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알겠지?”
하윤은 무경의 손을 잡아채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러고는 약속하라고 고개를 끄덕이라고 소리 질렀다.
“알겠지!”
무경은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끄덕이지 않았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던 하윤은 오랜만에 무경을 다그쳤다.
“기억해! 이건 똑바로 들어.”
이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하윤은 얼굴을 흠뻑 적셨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 없는 무경의 모습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젖혔다. 눈을 감고 쏟아진 감정들을 갈무리했다.
“…….”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무렵에야 하윤은 무경과 걸고 있던 손가락을 풀었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
하윤은 스물을 기다리던 무경처럼 간절히 속삭였다.
“전부 끝내 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