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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48화 (48/162)

48화

집을 나올 때만 해도 PC방에서 밤을 지새울 작정이었지만, 막상 찬바람을 쐬고 있자니 공기가 텁텁한 PC방보다는 집에 가고 싶었다.

‘엄마 안 본 지도 꽤 됐고.’

거기에 궁핍한 지갑 사정도 한몫했다. 통행 자제 시간이 가까워지면 PC방 점주들은 밤새울 사람들을 제외하곤 다 귀가시킨다. 그런 뒤에 건물 방호벽을 내리고 영업을 계속하는데, 그 시간부터 통행 가능한 시간까지는 심야 할증료가 붙는다.

할증료는 선금을 내야 하고 안전을 이유로 중간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럴 바엔 뜨뜻한 집에 가서 뜨뜻한 집밥 먹는 게 낫지.’

연락하고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괜히 그게 어색할까 봐서 그냥 찾아갔다. 카드키가 없어 걱정했으나 다행히 집에 가족이 있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윤아,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말을 하고 오지. 그럼 엄마가 맛있는 거 해 놨을 건데.”

“찬물에 밥 말아서 김치만 줘도 잘 먹어.”

“너 혹시, 무경이가 너 굶기는 거 아니지?”

“에이, 엄마. 걔도 한국인이야. 한국인이 어떻게 친구 밥을 안 먹여? 그냥 뭘 먹어도 엄마 밥이 최고라는 소리지.”

“하여간, 뚫린 입이라고 잘 나불거려.”

인영은 하윤의 입술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자.”

“네.”

집 안으로 들어간 하윤은 거실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 저녁 준비를 돕겠다고 주방에서 얼쩡거릴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동생 기준이 들어왔다. 기준은 인사도 없이 비척비척 거실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푸푸 거친 숨을 내쉬는 게 척 봐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하윤과 인영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초저녁에 술을 저렇게 마셨대.”

“요새 기준이 군대 때문에 심란해. 지하는 당연히 가야 할 거라고 덤덤하고.”

쌍둥이다 보니 둘의 입대 시기가 비슷했다. 기준은 좀 더 미루려고 한 모양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고.

어찌 됐든 자식 둘을 군대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인영 또한 심란해하긴 마찬가진 듯했다.

그사이 기준은 소파에 얼굴을 박고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가끔 발장구를 치는 것을 보아하니 억울해 죽을 지경인 듯했다.

“엄마, 나 왔어! 어? 손님 왔어? 못 보던 신발이네.”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또 들리더니 이번엔 여동생 지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대 갈 준비를 한 건지 머리카락이 귀밑에서 달랑거렸다.

“어? 큰오빠 왔네?”

“오랜만이네. 너 입대 날짜 정해졌다며? 쪼꼬맣던 게 다 컸네, 다 컸어.”

“뭐래, 중학교 때 이후로 나 키 안 컸어.”

지하는 장난스레 하윤의 팔뚝을 툭 쳤다. 그때 웅얼거리던 기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인마, 손님은 무슨 손님. 내가 네 오빤데, 인마!”

술에 취한 사람답게 맥락은 없고 목소리는 컸다. 그 모습을 본 지하는 쯧쯧 혀를 찼다.

“아, 저 새끼 저녁부터 술 처마시고 들어왔네. 쯧쯧쯧, 어이구.”

“지하야! 예쁜 말.”

인영이 나무라자 지하는 자기 입술을 잡는 시늉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영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지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찌개가 끓는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윤 또한 인영을 도우려 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기준이 방으로 들어가려는 지하를 불렀다.

“인마, 오빠가 말하는데 말이야. 쌩까고 그냥 가는 게 어딨냐?”

“야, 네가 무슨 오빠야. 너 나랑 쌍둥이야. 그리고 내가 태어날 때 밖에 안전한지 안 안전한지 테스트해 보려고 먼저 내보낸 거야. 알어?”

“뭐 인마?”

“뭐긴 뭐야.”

“쓰읍. 이게 웃기네. 우리 집에서 아빠 돌아가시면 내가, 이 내가 우리 집 대들보 가장이야. 어디서 하늘 같은 오라버니한테 버릇없이. 어?”

“어휴, 미친 새끼. 큰오빠 있는데 네가 무슨 가장이야. 그리고 엄마랑 나도 다 알아서 살어. 너나 걱정해. 너나. 넌 네 손으로 할 줄 아는 거 쥐뿔도 없는 게. 오늘 큰오빠랑 엄마 있어서 적당히 말하는 줄 알아.”

“어허. 너 이 새끼.”

지하는 쯧쯧 혀를 차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기준이 뭐라 지껄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양 손을 씻었다.

“이리 오라니까! 오빠 말을 안 들어?!”

기준은 지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속상한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코를 훌쩍이며 눈가를 훔치는 모습을 보며 지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뭐, 뭐! 아휴씨, 진짜 골고루 한다. 김기준. 골고루 해.”

지하는 기준을 한심해했지만, 또 한심한 대로 상대해 줬다.

기준은 취해서 몸을 끄떡거리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내흐가 군대가면 부, 부모님 흐흑 잘 부탁, 부탁한다. 대신 갔다 오면, 내가. 크흐흐흡. 내가 가장 노릇 제대로 할게.”

“……내가 입대하는 날이 더 빠르거든.”

“너는 여자니까 조금 받고 오잖아. 대피소나 이런 데 파견될 뿐이고.”

“거 몇 개월 차이 난다고…….”

자신의 슬픔에 취한 기준은 숫제 오열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걱정돼서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큰오빠도 있잖아.”

“에이 시팔, 그 새끼는 왜 말하는데.”

“아, 진짜.”

“씨발, 말은 바로 해야지. 사내새끼한테 꽂혀 가지고 가족 다 버리고 집 나간 새끼를 뭘 믿고 맡겨?”

“…….”

인영과 지하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주방과 거실 경계에 서 있던 하윤을 바라보았다. 하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준을 바라보았다. 기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하윤의 시선을 알아차리곤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

“내가 틀린 말 했냐구우. 그 새끼랑 붙어먹은 게 어지간히 좋았……!”

“이 새끼가.”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기준이 앉아 있던 소파로 다가간 하윤은 기준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강한 힘으로 당기자 기준은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하윤은 즉시 기준의 어깨를 밀쳐 엎드리게 하고 오른팔을 뒤로 꺾었다. 허리와 굽히고 있던 왼쪽 다리를 체중을 실어 누르자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기준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거 놔, 놔! 엄마! 엄마아!”

“하윤아!”

“오빠! 왜 그래, 하지 마!”

“왜, 더 지껄여 봐.”

“씨발, 이거 놓으라니까!”

암만 하윤이 초능력을 잃었다고 하지만 열일곱까지 백진하 밑에서 무술을 훈련받았다. 백진하나 백무경의 입장에선 간단하게 호신술을 배운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방심한 일반인 하나 제압하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이! 이!”

기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씩씩거리며 몸을 비틀었지만, 하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이내 될 것 같지 않자 그간 속에 담아 뒀던 말을 쏟아 냈다.

“왜 내 말 틀려? 너 그 새끼한테 가려고 가족 버렸잖아.”

“내가 언제 가족을 버려.”

“그럼 그게 버리고 간 거 아니냐? 우리가 언제 가랬냐? 자기 혼자 세상 불행한 척 다 해서 주변 사람들 죄책감 들게 만들고. 부모님 가슴 다 찢어 놓고 네 말에 반대도 못 하게 했잖아. 그래 놓고 갔잖아!”

“…….”

“형은 우리 집에서 있느니만 못해. 그리고 말하는 김에 하는 건데.”

기준은 다시 몸을 꿈틀거렸다. 몸을 반쯤 돌렸으나 붙잡힌 팔이 아파서 다시 돌아갔다. 그는 바닥에 이마를 박고 숨을 쌕쌕 내쉬었다.

“적어도 인간답게는 살자.”

“…….”

“염치는 알고 살라고. 그 집도 형이 마음대로 들어가서 사는 거잖아? 걔 아직도 형 못 알아보지? 형은 아직도, 형이 백씨네 가족 같아? 정신 차려. 형 김씨야. 형 이름 김하윤이야.”

혐오로 얼룩진 눈빛이 하윤을 아래위로 훑었다.

“김기준 그만둬! 그만두지 못해? 김하윤 너도 기준이한테서 내려오고!”

“그래, 그만해. 오빠들 그만해!”

인영과 지하가 말리며 하윤과 기준을 떼어 놓았으나, 둘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붙어 있으면 예전처럼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그래? 그래서 처맞으면서 견디는 거야?”

기준의 말에 하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이만 악물었다.

“나 같아도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시커먼 사내새끼가 와서 질질 짜고 들러붙으면 싫고 진절머리 나겠다. 형 네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하려고 해도 그거, 네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야. 집착이고 아집이지. 막말로 백무경 그 형은 기억 잃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잖아? 딱 형만 잊은 거니까.”

“…….”

“왜 내가 맞는 말 하니까 대꾸할 게 없어? 왜 아무 말도 안 해?”

“이 새끼가.”

“그 형은 형이 없어도 잘 산다고! 형 넌 네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남 신경 쓸 때가 아니라, 네 코가 석 자야!”

너나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내 숨기고 모른 척하고 싶었던 부분을 기준이 긁었기 때문일까.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눈앞이 컴컴하게 보였다.

하윤은 저도 모르게 기준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

거실 창문에 긴장한 여동생 지하와 모친 인영이 비쳤다. 그리고 그제야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린 기준이 보였다. 하윤은 화를 눌러 참듯 마른침을 꼴깍이다가 주먹을 내렸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진정하려 애썼다. 눈시울이고 뺨이고 다 화끈거렸다.

밀려드는 감정들을 자신이 분류하고 정의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황급히 하윤은 자신이 던져뒀던 가방을 다시 둘러멨다.

“하윤아, 하윤아!”

하윤은 자신을 붙잡는 인영의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침만 꼴깍였다. 뭐라도 삼키지 않으면 안 좋은 것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윤은 다시 몸을 돌려 신발에 발을 욱여넣었다.

“때리지도 못할 새끼가 폼만 더럽게 잡네.”

“기준아! 너 왜 그래! 대체!”

“내가 뭘. 내가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엄마 아빠도 저 새끼 사람 구실 못 한다고 한심해했잖아. 아니야? 내 말 틀려?”

“엄마 아빠가 언제 그랬어! 언제 그랬냐구! 그냥 걱정한 거지!”

“나도 똑같아. 나도 가족이니까 걱정한 거야. 내가 남이었으면 이런 말 왜 하냐? 가족이니까 빨리 정신 차리라고 하는 거지.”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쪽 신발을 다 신지도 못했지만, 하윤은 곧장 도어록 잠금을 풀었다. 하윤이 뛰쳐나가자 인영이 그 뒤를 따랐다.

“하윤아, 하윤아. 잠시만 기다려 봐. 엄마 아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말 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우리 집이 아니라 무경이 집에서 지내니까, 걱정해서 그런 거야. 방 한 칸 해 줘야겠다고 그런 말밖에 안 했어.”

“…….”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윤은 들썩이는 가슴을 멈추려 숨을 멈췄다. 이 층여 남은 엘리베이터가 오늘따라 더디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준이가 입대 앞두고 있어서 예민해서 그래. 기준이 너 좋아해. 지하보다 더 자주 네 안부 묻고 그래.”

겨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윤은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인 채 층수를 누르는데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한 인영의 발이 보였다.

“……밥이라도 먹고 가. 기준이 방에 넣어 둘게.”

간절한 인영의 말에 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자 미안함이 가득한 인영의 얼굴이 보였다.

더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미안.”

목소리가 발발 떨려서, 하윤은 제 목소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하윤은 인영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쓸모없는 물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

“다음에 또 올게요.”

하윤의 인사에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던 인영의 손이 떨어졌다.

“그래, 시간 나면 언제든지 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 놓을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하윤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한두 방울 흘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눈물방울이 후두두 떨어졌다.

크게 억울한 것도 서운한 것도 아닌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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