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미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괴수는 나타났다. 오늘만 해도 화곡동 공사현장에서 단발성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대피령이 내려졌다. 군인들은 일대의 교통을 통제했으며, 그사이 특수부대 소속 초능력자들이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는 거미형 괴수로 팔척농발거미라는 비교적 익숙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름 그대로 발이 굉장히 길었는데, 덕분에 층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가며 대원들을 애먹였다. 하지만 처치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 파견된 무경은 대원들이 팔척농발거미를 한곳으로 몰았을 때 괴수의 발 관절과 목을 꺾었다. 그 순간 마지막을 예견한 괴수가 급히 알을 까려 했고 함께 파견된 다른 대원이 거미를 알째 얼려 버렸다.
비교적 현장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게이트가 열린 고층에서는 작업자들의 피해가 컸다. 거미를 피해 달아나다가 낙사하거나 거미가 뿜은 거미실에 질식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부대장인 박 소령은 된통 깨지게 생겼다며 연신 투덜거리더니 이런 날엔 한잔해야 한다며 치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무경은 어울려 줄 마음이 없었다. 멋모르고 한번 마셨다가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과 푸념을 얼마나 들었는지 몰랐다.
무경은 작전에 투입될 때보다 더 은밀하고 신속하게 부대장을 피했다. 가까스로 무사히 퇴근했으나 방심한 찰나 결혼정보회사 직원에게 붙들렸다. 민간인이라 한 대 칠 수도 없는 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결혼정보회사 직원은 무경에게 파일 하나와 각종 명함을 쥐여 준 뒤에야 물러났다. 무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함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파일은 따로 갈아 버릴 생각으로 서재에 던져 뒀다.
김하윤이 버티고 있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집이라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더러워진 몸을 씻고 편히 쉴 생각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떨쳐 냈다고 생각한 박 소령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더군다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부대원들을 더 데리고 온다고 했다. 무경은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박 소령이 이상하리만치 억지를 부렸다.
열어 줄 때까지 버티고 있을 거라는 말에 짜증이 먼저 치밀었다. 정말 그러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는 수작에 걸려들어야 하는 일만큼 기분 더러운 일도 없었다. 무경은 들이박으려다가 김하윤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그들에게 김하윤의 존재를 들키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들이 오기 전에 김하윤을 내보냈다. 김하윤이 내려가기 무섭게 박 소령이 초인종을 눌렀다.
“이야, 백 중위. 수도승같이 살아서 집도 절간 같을 줄 알았는데 집에 사람 사는 냄새 좀 나는데?”
문을 열자마자 쑥 들어온 무경의 상사, 박정우 소령은 무경의 집을 구경하며 놀라워했다. 그가 아는 무경의 성격과 반대로 집이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위치도 좋고, 층수도 좋아서 일조량도 좋고. 집 정리도 잘해 놨고. 이야, 나보다 더 잘 사는데?”
“그야 박 소령님은 술 마시는 데 재산 다 털어 넣으니까 그렇죠. 한창 잘 버셨을 때 집부터 사셨으면 좋았잖아요?”
“아니, 그게 되나. 진짜. 아니,”
또 다른 상사 이경미 대위가 놀리자 박 소령은 눈을 껌뻑였다. 당황한 한국인답게 박 소령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니, 난 그때도 이런 집 못 샀을걸.”
“에이, 그땐 서울 땅값도 그렇게 안 비쌌잖아요.”
“다른 지방이랑 비교하면 비쌌지 뭐. 그래서 엄두도 못 냈고. 아니, 그리고 내가 집 살 정신이 어딨었겠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맞아요. 후회도 살아 있으니까 하는 거죠. 자알 하셨어요. 아닌 게 아니라 소령님 말씀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재산 싸 들고 저승 갈 순 없으니까.”
이 대위의 말이 거슬렸던지 박 소령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그뿐 이 대위에게 따지진 않았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군인치고는 다소 삐딱한 자세였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것은 이 대위가 박 소령 보다 전투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소위 병과나 라인을 잘 타야 하는 일반인들이 소속된 군대와 달리 초능력자들이 소속된 초인특수부대는 계급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초능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기관에서 중등과 고등과정을 이수한 뒤 입대하기만 해도 소위 계급이 붙었다.
대인, 대괴수 전투에 관한 전술 지식은 물론이고 현장 경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전공을 세우기 쉬워 소위 물진급이라고 할 만큼 진급도 빨랐다. 부하가 상사가 되는 경우가 잦고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사망 위험도 컸다.
괜히 능력도 되지 않는데 기강을 잡는다고 뻗대다가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장성급이 아닌 이상에야 계급보다는 힘을 우선시했다. 힘이 있으면 언제고 전공을 쌓고 계급을 얻을 수 있고, 현장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박 소령은 삼십 대 후반으로 백진하와 비슷하게 자기 몸을 단단하게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진하와 달리 다른 초능력자들 사이에선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근접전에 특화된 데다, 일대 다수를 상대할 만한 정도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이 대위는 빙결 능력자로 여러 특수 임무에 차출되는 등 윗선에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아마 내후년만 되어도 박 소령의 계급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집은 제 능력이랑 상관없어요. 유산으로 받은 거라서.”
“…….”
박 소령은 전혀 위로가 안 된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유산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그를 주눅 들게 하는 듯했다.
“뭐, 서 소장님 재테크는 유명했잖아? 다른 건 몰라도 토지나 건물 이런 건 진짜 기가 막힌 데 사 뒀다고.”
이 대위의 말에 무경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른다는 양 굴었으나 상속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무경은 가진 건물 임대료만으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일부러 위험이 도사리는 군대로 입대한 것은 그 편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수집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무경의 시선이 박 소령과 이 대위 뒤에 붙어 눈만 돌리고 있는 두 명의 부대원을 좇았다. 둘 다 여태 말 한 마디 붙여 본 적 없는 생신입이었다.
박 소령은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있고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 판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들이닥쳤다. 능력 특성상 그런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이박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무경이 거절했어도 어떻게든 건물 내부로 들어와 들여보내 줄 때까지 버텼을 것이다.
무난하게 잘 지내는 편이지만 어찌됐든 이렇게까지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평소 부대원들은 무경을 따로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초능력자의 수가 전체 인구에 비하면 고작 한 줌도 되지 않는 크기라지만, 그중에서도 이리저리 갈라 비교하자면 염동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그중 팔십 퍼센트가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종이학을 띄우거나 목이 긴 숟가락을 꼬는 데서 그쳤다.
그리고 남은 이십 퍼센트 중에서 일반인이 아닌 대괴수전을 치를 수 있는 이들은 또 손에 꼽았다. 그리고 무경은 그중 최상급에 속한 능력자였다.
일반적인 정신 세뇌가 통하지 않는 정신계 능력자였고 가족도 없었다. 수시로 폭주 전조를 띄우기도 하는 등 집중관리가 필요한 초능력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진 능력에 비해 얌전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온건한 방법으로 관리하려 했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이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겸사겸사 뛰어난 초능력자의 유전자를 한국에 남기고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어느 정도 교화될 거로 생각했든지.’
최근 외국, 그것도 아시아 쪽에서 꾸준히 접촉하려고 하니 더욱 안달이 났으리라. 하지만 무경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착실히 사는 것도 종마로서의 삶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김희원을 두고 다른 사람을 제 곁에 두는 것도 싫었고 성욕이 과한 편도 아니라 따로 해소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중에 성기를 쥐어짜 정자를 넘기는 일은 더더욱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이들이 찾아온 건 무경의 생활환경을 확인하고 다른 초능력자를 우연을 가장해 만나게 할 셈이었다. 물론 어딜 봐도 우연으로 가장하기 힘든 억지 만남이겠지만.
“그나저나 난 백 중위가 문 안 열어 줄 줄 알았어.”
“맞아, 맞아. 집에 없는 척할 줄 알았는데.”
박 소령이 키득거리면서 말하자 이 대위가 맞장구쳤다. 이 대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무경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도 남자다, 그치?”
“…….”
무경은 어색하게나마 웃는 대신,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무경은 일단 그들을 거절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경이 그러든 말든 이 대위는 그들과 함께 온 신입들을 무경에게 인사시켰다.
그러는 사이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나중에 온다던 일행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박 소령은 무경의 눈치를 살피다가 직접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어 주었다.
키 작은 남자, 군의관 최우철 중위가 씩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 집 좋네요.”
“그렇지? 층도 좋고, 위치도 좋고.”
최우철 중위는 제집처럼 자랑하는 박 소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경에게 다가왔다. 그는 넉살 좋게 무경의 어깨를 주무르며 화를 풀라고 말했다.
“기왕 온 거 좋게, 좋게 생각해. 나쁘게 생각하는 거 그게 만병의 근원이야.”
“성질 긁는데 참는 것도 병 생기는 거 아닙니까?”
“아니지, 아니지. 좋게 생각하면 괜찮지.”
최우철 중위는 씩 웃다가 무경의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거나 다용도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여기는 누가 써? 한가운데 책상이 있네.”
최 중위는 무경이 이야기해 주지 않을 줄 알았다는 양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는 이어 음식이 든 냄비도 열어 보기도 했다. 그는 뭔가를 ‘점검’하려 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사이 박 소령과 이 대위는 음식을 시키기 시작했고 두 신입은 어색하게 웃다가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복도 끝에 놓인 작은 선반에 있던 액자를 발견하곤 무경에게 말을 걸었다.
“이거 백 중위님 졸업식 사진이에요?”
순간 아차 싶었다. 무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부대원들이 액자가 있는 곳으로 몰려가 구경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어리다 생각했는데, 이때는 더 어렸네. 하, 참. 근데 옆에 있는 애는 누구야? 옷 보니까 우리 후배는 아닌데?”
이 대위의 말에 최 중위가 액자를 집어 들었다. 그는 김하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엄지손가락으로 김하윤의 얼굴을 살살 문지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
“……?”
“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더라니. 얘가 네 친구였구나.”
“아는 사이야?”
“예전에 백 중위님 관련해서 보고받을 때 자료를 본 적 있거든요. 초중은 우리 쪽 나오고 고등학교 일 학년 때 그날에 휘말려서 일반인 됐다던가? 텔레포턴가 이동 쪽 능력이었던 것 같은데.”
어째 최 중위의 말이 거슬렸다. 뱃속이 차가워지며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경의 불편한 심기를 알았던지 최 중위가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아니, 뭘 그렇게 살벌하게 쳐다봐. 내가 군의관이니까 볼 수밖에 없지. 백 중위는 요주의 인물이니까.”
“관심병사지 뭘.”
박 소령이 낄낄거리자 나머지도 웃기 시작했다. 무경은 이 촌극이 기가 막혀 웃었다. 최 중위는 찔끔한 표정을 짓다가 액자를 내밀며 물었다.
“이 친구 텔레포터였었지?”
“그건 왜 궁금하세요?”
“맞아, 혹시 백 중위 친구한테 관심 있어요?”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쪽은 아니고. 미궁연구소 때문에요.”
“그게 왜요?”
“왜, 옛날에. 서울에서 미궁 열렸을 때 피노키오 애들이 어린애들 잡아가서 심장 뽑고 그랬잖아요.”
“아, 기억난다. 그때 학교 휴교하고 그랬었어요.”
“그때 죽은 사람들 통계를 냈는데, 특정 능력자들 위주로 잡았더라고. 그게 주로 텔레포터들이더라고.”
“근데 그거랑 미궁연구소랑 무슨 관련 있는데요?”
“미궁 연구소에 텔레포터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날 이후로 피노키오한테 잡혀가지 않았던 사람들도 돌연사하고 그래서 이쪽 계열이 수가 엄청 적어졌어요.”
“원래도 텔레포터들이 그렇게 많진 않잖아?”
“예. 그래서 미궁연구소 쪽에서 텔레포터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더라고요. 기존 등록된 텔레포터들도 관리하고, 새로 태어나는 애들 없나 보기도 하고.”
최 중위는 계속해서 나불거렸지만, 그가 한 말들로는 김하윤에게 관심 갖는 이유를 확정하기 어려웠다. 가만 듣고 있던 이 대위가 그 점을 지적하려 하자 최 중위는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근데 신기하게, 그 뒤로 새로 태어나는 텔레포터가 없어요.”
“아직 안 태어난 거 아냐? 아니면 각성을 덜 했다든지.”
“어쨌든 그쪽에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뭐, 초능력자가 많이 태어나면 좋긴 좋잖아요? 초능력자가 많으면 국력이 강해진다고도 하고.”
최 중위는 여전히 액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무경은 직접 손을 내밀어 액자를 받아 냈다.
“초능력자가 초능력자를 낳을 확률이 높잖아요? 그래서 이 친구 씨를 좀 받으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거죠. 비록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일반인이 되고 말았지만, 유전자는 그대로일 거 아녜요?”
“하나라도 제대로 붙여 놓고 생각하지?”
이 대위는 얄밉다며 최 중위의 팔을 툭 쳤다. 최 중위는 팔을 움켜잡으며 엄살을 떨었다. 무경은 최 중위가 돌아선 사이 소매로 사진을 닦았다.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부대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뭘 먹고 마셨는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건 그들이 돌아간 뒤 집을 정리하면서였다.
안방을 치우던 무경은 콘돔 상자와 쓰지 않은 콘돔 다발을 발견했다. 상자에 표기된 숫자와 남은 콘돔 수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얼얼해질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남의 집에서 대체 뭘 한 거야.’
무경은 즉시 온 집 안의 창문과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사 장소로 의심되는 안방 화장실을 열었다. 휴지통을 보자 예상에서 어긋나지 않은 증거품들이 남아 있었다.
“……개새낀가?”
무경의 상식으론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정신 차린 척 쳐들어온 것도 미안한데 잠까지 자고 갈 수 없다고 일행을 데리고 나간 이유가 있었다.
홀로 분노해 바들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관으로 나가자 김하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손님 다 갔어?”
“내가 자고 오랬잖아.”
“아니, 그게. 그렇게 됐어. 혹시 나 아직 들어가면 안 돼?”
무경은 대꾸 대신 김하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었다. 손님이 다 갔으니 하윤이 들어와도 상관없기는 했다.
“와, 술 엄청 마셨나 보네.”
집 안에 들어온 김하윤은 무경이 모아 둔 술병들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그러곤 손님이 많이 왔었냐는 둥 떠들기 시작했다. 대답하기 귀찮은 건 평소랑 다름없는데 머리를 쪼던 짜증이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다시 술기운이 훅 피어올랐다.
무경은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뭔가가 마음에 걸렸는데 걸린 게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아직 어지러운 거실이 보였다. 무경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실을 마저 치웠다. 분류를 마쳤으니 나중에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안방에 들어가자 김하윤이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김하윤의 뒤통수를 본 순간, 무경은 자신이 잊은 것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막 변명하려는 순간, 김하윤이 먼저 말했다.
“너, 잤어?”
짧은 말이었으나 물기가 흠씬 베여 있었다.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문득 떠오른 생각이 무경의 입을 막았다.
어쩌면 이게 둔해진 마음을 다시 날카롭게 할 기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