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뒤에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하윤은 인근 중학교 운동장 관중석에 앉아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꼭 눈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났다.
“…….”
시간이 애매해서인지 운동하는 사람은 두엇밖에 없었다. 하윤은 그 사람들이 운동장을 도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울음을 골라냈다.
저녁이 무르익어 밤으로 넘어갈 때쯤 되자 추위가 밀려들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추운 날씨에 운동장 한가운데 앉아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리라.
덩달아 추위 때문에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진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젠 집에 갈 수 없으니 PC방에라도 가야 하는데 이 근처엔 아파트 단지가 주라 이십사 시간 영업하는 PC방이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PC방에 있을걸.’
오늘 하룻밤만 견디면 됐는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PC방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은 어느 집이든 집에 가고 싶었다.
‘손님이 돌아간 거면 집에 가도 되잖아.’
만약 돌아가지 않았으면 그때 PC방을 가도 되지 않겠는가. 무경의 집 근처에는 이십사 시간 영업을 하는 PC방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 애매하지만 가까우니 집을 확인한 뒤에 달려가면 될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마자 하윤은 무경의 집을 찾았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그래. 나쁜 하루라고 해서 안 좋은 일만 계속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나쁜 하루라고 정의할 만한 나쁜 일이 존재가 너무 커서 좋았던 일, 무탈하게 넘어갔던 일을 지우는 게 문제지. 하윤은 자신을 위로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현관문도 열려 있었다.
손님이 있다면 이렇게 현관문을 활짝 열고 있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 다른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 가고 정리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하윤은 조심스레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는지 무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 다 갔어?”
“내가 자고 오랬잖아.”
“아니, 그게. 그렇게 됐어. 혹시 나 아직 들어가면 안 돼?”
하윤은 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조금 나빠 보이긴 했는데, 저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사이 무경은 하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었다. 하윤은 신발을 벗으며 간간이 무경을 힐금거렸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습관이 다시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예전처럼 무경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다고. 기준이가 나보고 뭐라고 그랬는지 아느냐고. 그래도 걔가 또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라고. 그냥, 그냥 자신을 걱정했을 뿐이라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면 백무경 네 잘못이라고.
하지만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할 수가 없었다. 하윤은 목 끝을 간질이는 말들을 꼴깍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렸으나 아직 술 냄새가 났다. 하윤은 거실 한구석에 모아 놓은 술병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손님 많이 왔었어? 몇 명이 왔길래 이렇게 먹은 거야.”
“…….”
“무경아, 너 취했어?”
하윤은 느릿하게 눈만 끔뻑이는 무경을 보며 살짝 웃었다. 술에 취한 게 확실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냥 들어가서 자지. 이건 내일 치우고.”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거니까.”
하윤은 무경 몰래 입술을 삐죽이곤 돌아섰다. 도와줄까 싶었으나 심술도 나고 그럴 만한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괜히 무경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바깥 욕실이 아닌, 안방 욕실을 쓰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짐을 내리고 겉옷을 벗는데, 방 안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하윤은 손님이 집 구경을 했었나 보다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 양말 끝에 비닐이 붙었다.
“이건 뭐야?”
발끝으로 털어 내려 했으나 정전기 때문인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손으로 떼어 내 쓰레기통에 바로 버리려던 하윤은 술렁이는 마음에 비닐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
마음이 크게 술렁이다 못해 심장을 쓸어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방 욕실로 들어가는 짧은 복도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 몇 번을 멈춰서고 몇 번의 숨을 몰아쉬었는지 몰랐다.
가까스로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간 하윤은 천천히 세면대와 욕조를 눈으로 훑었다.
욕조에 남은 기다란 머리칼을 발견하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냥 손님이 안방 화장실을 썼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는 중에 화장실 쓰레기통 뚜껑에 걸려 있는 은색 비닐을 발견했다.
“…….”
하윤은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 뚜껑에 걸려 있던 비닐을 집어 들었다. 쓴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게 무슨 비닐인지는 하윤도 알고 있었다.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
없길 바랐던 쓰레기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대로 묶은 것도 있었고 중간에 찢어졌는지 그냥 버린 것도 있었다. 내내 참고 있던 숨을 참고 있었던 탓일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윤은 벽에 기대선 채 숨을 헐떡거렸다.
하윤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 생각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을 몇 번 깜빡이면 며칠이 훌쩍 지나갔길 바랐다.
‘이건 거짓말이야.’
하윤은 쥐고 있던 쓰레기를 다시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없었던 일처럼 뚜껑을 닫는데, 작은 비닐 조각이 이번엔 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좀!”
하윤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어냈다.
“……제발.”
뭐든, 제발.
제발 끝났으면 좋겠다.
하윤은 간절하게 빌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으니까, 모두 끝나서 아무 걱정 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윤은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왔지만, 그 뒤엔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 서 있었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오는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에, 운동장에서 다 쏟고 오느라 더는 날 것 같지 않았던 눈물이 다시금 눈가를 간질였다. 하윤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숨을 골랐다. 머릿속은 하얘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입이 저절로 열렸다.
“너, 잤어?”
말하고서 아차 싶었다. 말하지 말걸, 그러면 들을 필요도 없는데.
“…….”
하지만 후회보다 무경의 침묵을 참을 수 없었다.
“잤냐니까!”
“잤으면?”
“…….”
“잤으면 네가 어쩔 건데.”
무경은 긴 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사이 하윤은 무경의 말을 곱씹었다. 말의 허리를 잘랐다가, 잘게 잘게 부쉈다가, 다시 그러모으길 반복했다.
잤으면, 어쩔 건데.
그럼 네가 감히 뭘 할 수 있는데?
뒷목이 바짝 당기고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뇌 전체가 얻어맞은 듯이 욱신거렸다.
“너, 미쳤어?”
“…….”
“너,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거야?”
“…….”
“말 좀 해 봐! 내 말 다 듣고 있잖아!”
“아까도 말했잖아. 내가 남이랑 자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럼 김희원은.”
“…….”
“김희원은 어떻게 하냐고, 이 미친 새끼야!”
하윤은 무경을 밀치며 소리쳤다. 뱃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머리는 얼얼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배신감. 그래, 그런 말이 어울렸다.
무경의 무감한 얼굴을 훑던 하윤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너, 더러워. 알아? 어떻게 희원일 두고 다른 사람이랑 잘 수가 있어. 어?”
“그럼 수절이라도 해야 해?”
“해야지 그럼!”
“…….”
“너 아직 희원이 기다리잖아. 돌아오면, 걔가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랬어.”
“언제 돌아오는데?”
“…….”
“십 년? 이십 년? 너야말로 말해 봐. 얼마나 더 걸리면 희원이 찾을 수 있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으로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걸 물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저 아닌가. 하윤은 입을 다문 채 무경을 노려보았다.
“사람이 고픈 건 아니야. 위에서 바라는 대로 결혼도, 애 낳아 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정자 빼 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의무니까 십 년 내로는 한번 빼 주긴 하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고픈 게 아니면. 그럼 뭐? 그냥 욕정? 성욕?”
“틀린 말은 아니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욕정을 풀려고 다른 사람을 안방으로 데려 와서 잤다고? 그거 하나 못 참고?”
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하윤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는데. 내가 누구랑 자든 말든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이러다간 너 진짜 후회해.”
하윤의 말에 무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양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하겠지. 희원이 찾으면 후회하겠지. 근데 김하윤. 희원이한테는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용서를 받든 벌을 받든지 할 거야. 그러니까 아무 상관없는 넌 나한테 이렇게 지랄할 필요가 없어.”
“내가, 내가 왜 상관이 없어.”
“네가 김희원이 아니니까.”
“…….”
“넌 김하윤이지 김희원이 될 수 없어. 네가 어떻게 해도 그건 절대 바뀌지 않아.”
무경의 말이 꼭 동화 속 악당의 저주같이 들렸다. 하윤은 돌이 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바닥에 발을 디뎠는데도 발판 하나 없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원래 김희원이 아니라 김하윤인데. 내가 그 김하윤인데.
‘나는.’
하윤은 무경이 잊어버린 김희원이 될 수 없었다. 김하윤은 김하윤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김하윤 본인이었다.
그렇게 하지 말걸.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윤이 후회를 곱씹는 사이 무경은 몸을 돌렸다. 이대로 나가게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하윤은 무경의 손목을 잡아챘다.
“가지 마.”
“…….”
“또 누구랑 붙어먹으려구.”
“붙어먹어? 야.”
“차라리 필요하면 말해. 내가 해 줄 수 있어.”
“너 진짜 미쳤구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사람이 고픈 게 아니라며. 결혼할 생각도 없다며. 그럼 아무라도 상관없는 거잖아.”
“이거 아예 돌아 버렸네.”
“나는. 나는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
“다른 사람이랑 붙어먹다가 괜한 소문 내지 말고, 그냥 집 안에서 처리하면, 그러면 되잖아.”
스스로 뱉은 말이 제 살점을 뚝뚝 떼어 내는 것만 같았다. 하윤은 속이 뜨끔거려 드문드문 말을 띄웠다.
“희원이가 돌아오면……. 그땐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되는 거야.”
“네가 생각해도 말 안 되는 거 알지?”
“…….”
“내가 그걸 누구 좋으라고 해?”
“김희원.”
“뭐?”
“김희원 좋으라고. 친구니까.”
무경이 말한 대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말하고도 아차 싶었으나 무경이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더 싫었다.
무경의 시선이 따가워 하윤은 고개를 숙였다.
가치 없는 미움이 이제는 아프기만 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이 약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내가 해결해 줄게. 모르는 척하면, 그러면 없는 일이잖아.”
“…….”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할게.”
“…….”
“최대한 닿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을게. 얼굴도 보지 않을게. 끝나면 다 잊어버릴게. 나 머리 나빠서 그런 건 정말 잘하거든.”
“…….”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이랑 자지 말고 같이 희원이 기다리자. 희원이 찾을 수 있어.”
“너 진짜 끔찍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해? 너 희원이 친구 맞아?”
“…….”
“내가 만약 김희원이면 난 너 패 죽였을 거야.”
무경의 손이 하윤의 머리에 닿았다. 비아냥거리듯이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하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하윤의 몸이 휘청였다. 중심을 잃은 하윤의 무릎이 꺾였으나 무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건을 들어 올리듯 하윤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으로 하윤을 들어 침대에 처박았다.
“이건 네가 시작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