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스물셋>, 겨울에 가까운 가을 즈음이 되자 무경에게 맞선자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스물셋이 무슨 선을 보느냐 했겠지만, 무경은 백진하와 서이주의 아들이었다. 백진하와 서이주의 지인들은 일찍이 부모를 여읜 무경의 외로움을 걱정했다. 당장 결혼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만나길 바랐고, 국가에서는 강력한 초능력자의 유전자가 결혼으로 한국 사회에 결속되길 바랐다.
그들 딴에는 스물셋도 많이 배려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전부터 작업하고 있었고 하윤이 이제야 안 것일 수도 있었다.
“…….”
하윤은 무경이 귀가하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린 결혼정보회사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본 적 있는 명함이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담당자 이름과 직급이 달라졌다.
‘직급이 높아졌네.’
주워듣기론 결혼정보회사에선 초능력자들의 결혼 주선이 꽤 이점이 큰 모양이었다. 정부 쪽에서 해 주는 지원도 지원이지만 한 커플을 성사하면서 다른 초능력자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큰 강점일 테니까.
하윤은 주먹을 그러쥐는 척 엄지로 반지를 긁듯이 만졌다.
이럴 때만큼은 무경이 제게 야멸차게 구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무경은 자신이 김희원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더 미워하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수치심이 들 정도로 하윤의 존재를 짓뭉개는 말을 했다.
무경의 말대로 김희원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 무경은 계속해서 하윤을 미워할 것이다.
‘김희원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내가 밉고 싫겠지.’
반면 김희원의 존재 가치가 희석되면 희석될수록 하윤에 대한 미움도 스러지리라. 그래서 하윤은 아이러니하게도 무경이 자신을 미워할 때 안심하곤 했다. 아직은 그가 절 잊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만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관계도 버틸 만해졌다.
하윤이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닫혔던 욕실 문이 열렸다. 하윤은 서둘러 휴지통에서 몸을 돌렸다. 하윤이 딴청을 부리고 있을 때, 무경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밖에 좀 나가 있어.”
무경의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윤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왜?”
“선배들이 오기로 했어. 하룻밤 자고 갈 것 같은데, 피차 불편하잖아.”
“나 갈 데 없는데 그냥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없는 것처럼 있을게.”
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그게 되겠느냐는 뜻이었다.
무경의 선배라면 같은 전투계열 이능력자일 것이고, 하윤이 숨는다 한들 손쉽게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숨어 있는 하윤을 수상하게 여기리라.
“알겠어. 나갈게. PC방이나 집에 가면 되니까.”
하윤의 말에 무경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언제쯤 오시는데? 혹시 내가 사는 거 아예 몰라야 해? 짐 좀 치우다 갈까?”
미리 좀 말해 주지. 그랬으면 미리 치워 놨을 텐데. 하윤이 군소리를 덧붙이자 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갑자기 결정된 거야. 짐은…….”
무경은 말끝을 흐리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약속을 잡은 선배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이내 하윤에게 그냥 나가라고 말했다.
“시간 얼마 없어. 그냥 빨리 나가.”
계속 말을 섞는 게 불편했던지 무경은 짜증을 내비쳤다. 하윤은 무경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서둘러 겉옷과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잡는데 일 층에서 오랫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왠지 일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이 무경이 말한 선배들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윤은 이내 비상계단으로 한 층을 내려가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잡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에 내리자 키 작은 남자가 출입문 앞에 서서 세대를 호출하는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하윤이 나가며 문을 열자 고맙다며 고개를 꾸뻑였다. 하윤은 마주 고개를 꾸뻑인 다음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하윤이 출입문을 완전히 지나갈 때, 키 작은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
“……?”
그 소리에 하윤 또한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몸을 돌렸을 땐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하윤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하얀 커튼이 둥그렇게 부풀었다. 눈 부신 햇살과 열기가 집 안을 그득 채우고 있었다. 빛에 바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미처 기억나지 않아 그런 것인지 익숙한 집 안이 드문드문 보였다. 소파가 있었다가 없었다가, 탁자가 있었다가 없었다가, 부엌에 자리한 냉장고 모델이 바뀌었다가.
무경은 거실에 서 있었다. 무엇을 하는 중이었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익숙한 곳을 낯설게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미약하게 들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다급히 계단을 올랐다. 그러다가 계단을 잘못 밟아 소리를 내고 말았다.
‘…….’
삐걱거리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바쁜 걸음 소리가 났다. 무경은 그제야 자신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맞아. 내가 술래야.’
자신이 술래라는 것을 떠올린 순간, 무경은 누구를 잡아야 할지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 소리가 들렸던 방을 벌컥 열었으나 방 안은 희기만 할 뿐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경은 곧장 몸을 돌려 다른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만 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희기만 했다. 불안과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온실처럼 쓰던 이 층 베란다로 가자 막 창문을 넘어가는 다리가 보였다.
무경은 곧장 뒤로 빼 베란다 창문을 닫고 그가 들어가던 방문을 열었다. 문 여는 소리에 상대가 다시 창을 넘어가려 했다. 아마 무경이 다시 베란다 쪽에서 따라잡으려고 하면 다시 방 창문을 넘어갈 것이다.
무경은 상대를 구석으로 몰기로 했다. 상대가 ‘능력’만 쓰지 않는다면 신체 능력 자체는 자신이 더 나았으니까.
상대는 무경을 피해 다시 창문을 넘었고, 무경 또한 그를 따라 창문을 넘었다. 무경이 거실 창문을 미리 닫고 갔기 때문에 상대는 문을 열다가 무경에게 따라 잡혔다. 무경은 상대의 허리를 감아 챘다.
무경의 힘을 버티지 못한 상대의 발이 달랑 들렸다. 그는 무경의 어깨를 짚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야! 반칙, 반칙! 너 능력 썼지.]
상대의 불만에 무경은 씩 웃었다. 툭툭 얻어맞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놔 봐. 나 옷, 옷.]
[옷이 왜.]
무경이 내려주자마자 상대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어디 걸렸던 모양인지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저 때문에 아프다고 하니 미안해진 무경은 그의 옆구리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디 좀 봐. 많이 아파?]
상대는 무경의 말에 상의를 살짝 들어 올렸다. 드러난 살갗에 붉은 기가 보였다.
[바보야, 네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그렇잖아.]
[미안, 약 바를래?]
[됐어. 이 정도로 무슨 약이야.]
상대는 무경의 손을 떼어 냈다. 마저 옷매무새를 다듬던 그는 돌연 몸을 돌려 무경의 손을 빠져나갔다.
[□□□!]
[그걸 속냐, 바보야!]
□□□의 웃음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햇살이 번진 □□□의 얼굴이 하얗게만 보였다. 보이는 것이라곤 입술이 고작이었다. 무경이 손을 뻗었지만,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손이 튕겼다. 그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아차린 무경은 이를 악물었다.
암만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제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또다시 [문]이 □□□을 삼켰다.
능력을 쓰면 반칙인데, 그래선 안 되는데.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미처 뱉어 내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
무경은 눈을 뜨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몰렸던 피가 발끝으로 쭉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경은 습관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불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을 헉 들이마시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는 사이, 이불 밖으로 하얀 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게 갑갑했던지 얼굴과 목을 훑어 내더니 몸을 뒤척였다.
김하윤의 움직임을 따라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김하윤은 무경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이내 아차 싶었는지 다시 몸을 바로 했다.
무경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꿈 때문에 예민해진 모양이었노라고, 자신을 다독였으나 다시 자리에 누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다시 잠들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또 괜히 누웠다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꿈.’
무경은 눈을 감고 꿈을 곱씹었다.
‘둘이서 술래잡기했었는데.’
능력을 쓰지 않기로 했었던 것 같았다. 무경은 꿈에서 봤던 집 구조를 떠올렸다. 꿈에서와 달리 어느 정도 생각이 났다. 김하윤이 갖고 온 사진이나 직접 그린 집 구조도 덕분이었다. 무경은 손끝으로 이불 위를 톡톡 건드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김희원.’
상대의 이름을 불렀어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희원, 김희원.’
잊어버렸기 때문일까. 꿈속에선 그 이름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꿈을 꿀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부르기는 부르는데, 그 말만 묵음 처리된 것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증상이 일반적인 기억상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갑갑함을 지울 수 없었다.
“…….”
무경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김하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는지 새벽 어스름이 사라져 어느 정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김하윤은 퉁퉁 부은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양손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꿈을 꾸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임은 분명했다.
무경은 하윤의 왼손 중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 년 전 연락도 없이 집을 나갔다가 오더니 그때부터 끼고 있던 반지였다.
‘어디서 주워 온 것일지도 모르지.’
무경은 언젠가 김하윤에게 반지를 끼는 이유를 물었다. 김하윤은 자꾸만 고백하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대답했지만, 무경은 믿지 않았다. 머리가 제대로 달렸다면 겉만 보고 가볍게 말이나 건 것이면 몰라도 사귀려는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김하윤은 남자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백무경 그를.
김하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상기하자마자 거부감에 속이 메스꺼웠다.
하지만 김하윤의 연심은 무경으로선 다행이었다.
무경은 김하윤이 예전보다 밉지 않았다. 시답잖게 그를 동정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전보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경계했던 대로 미움이 익숙해져서 무뎌진 것이다. 물론 무뎌진 미움으로도 김하윤을 상처 입힐 순 있었다.
김하윤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하윤은 무경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무경이 아무리 김하윤이 잠결에 아래를 세울 때마다 욕실에 처박고 물을 뿌리거나 베란다로 던져 놓고 밤새 문을 잠가도, 소리 내서 웃을 때마다 쿠션으로 입을 막고 짓누르고 김하윤이 만든 음식이나 물건은 뒤엎고 망가트려도 김하윤은 그때만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발발 떨 뿐이었다.
결코 무경을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처럼 그저 감내하며 무경에게 거슬리는 것들을 고쳤다.
김하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조르려 했으나, 목에 닿기 전에 손을 거뒀다. 눈치챘는지, 아니면 그냥 불편해서인지 김하윤이 몸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김하윤은 이제 집 안에서 소리 내 웃지 않고, 잘 때도 무경과 닿거나 무경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으며, 밴드나 기타 물품으로 아래를 묶었다.
항상 그렇게 하고 다니기 때문일까. 김하윤은 밴드를 잘 못 묶던 초기 몇 번을 제외하곤 더는 세우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남자구실을 제대로 못 할 수도 있었다.
요 몇 년간의 미움이 어찌 보면 결실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무경은 하윤이 행복하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리고 그 마음만은 여전했다.
‘어쩌면 새로운 방법을 찾지 못해서 무뎌진 것일 수도.’
새로운 방법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김하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꿈 때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는 얄팍한 변명 하나를 간절히 붙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