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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38화 (38/162)

38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가 있었다. 하윤은 곧장 담장을 내려갔으나 최성한이 성큼 다가왔다. 그 또한 담장을 타고 오르더니 하윤을 내려다보며 담뱃재를 털었다.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티끌이 공중에 흩날렸다. 하윤이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자 성한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게 얼마만이야.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왜, 누군데?”

같이 있던 친구들이 성한의 인사에 호기심을 가졌다.

“왜, 걔 있잖아. 그, 그, 백무경한테.”

말을 하다 말았지만 어떤 말을 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뉘앙스도 뉘앙스거니와 성적인 의미를 담은 손가락질을 봤다.

“암튼 이 년 전인가, 일 학년 때 능력 없어져서 일반고로 갔었댔잖아.”

“아아아, 기억난다. 난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럼 오늘 왜 왔는데?”

성한은 하윤을 향해 의문을 표했다. 자신 또한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 왜에. 알면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키득거리는 꼴이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을 비웃는 게 역력한 모습에 하윤은 이를 악물었다. 모른 척 돌아서려고 할 때 성한이 꽃다발을 발견했다.

“어? 꽃다발이네. 누구 축하해 주려고? 백무경?”

“…….”

하윤은 황급히 꽃다발을 챙겼다. 화염계 능력자인 최성한이 괜히 장난친답시고 꽃다발을 불태울 것만 같았다.

“아휴, 새끼. 야, 줘 봐. 내가 전해 줄게.”

“아냐,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줘 보라니까.”

“아!”

염동계 능력자가 있었던지 꽃다발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낚아채려 했으나 성한이 더 빨랐다. 다만 잡는 데 치중했기 때문일까. 꽃다발의 윗부분을 잡느라 꽃이 찌그러졌다. 화를 내려는데 성한이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선수 쳤다.

“하, 참. 아 근데 너도 참 뻔뻔하다.”

“…….”

“그러게 주인님한테 딱 붙어 있지. 의리 없이 혼자 도망쳐 가지곤. 하기야 너도 살려고 그랬겠지마는. 이제 와서 또 콩고물 얻어먹으려고 이렇게 매달리고 그러는 거, 사내새끼가 모양새가 영 안 좋다. 난 그렇게 생각해!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

순간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하윤은 입을 다물고 침을 꼴깍였다. 예전처럼 아니꼬워서 시비를 거는 것일 뿐이라고, 그때처럼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싫은 상대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철의 조잡한 악의가 하윤의 연약한 살갗을 베고 속을 헤집었다.

“조잡하다고 해야 하나? 추잡하다고 해야 하나?”

상철은 하윤의 꽃다발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평을 내렸다. 말만 듣자면 꽃다발에 관한 이야긴데, 하는 꼴을 보면 하윤과 꽃다발 둘 다인 듯했다.

“야, 이거 잠깐.”

그때 무리 중 하나가 휴대전화를 확인하더니 성한의 옆구리를 찔렀다.

성한은 휴대전화 화면을 힐긋 거리다가 이내 하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건 금방 전해 줄게. 식 시작하기 전까진 시간 있으니까 얼굴 보고 가라고 하면 되지? 여기서 기다려.”

“오, 최성한. 오늘 착한 일 하는데?”

자기들끼리 어깨동무 하고 낄낄거리며 멀어지는 모습이 꼴같잖았다. 당장 꽃다발을 뺏고 욕과 주먹질을 쏟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먼저 생각했다.

“……꼭! 꼭 전해 줘야 해. 꼭!”

하윤의 말이 의외였던 걸까. 최성한과 친구들은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어, 그렇게 할게.”

성한은 꽃다발을 흔들며 하윤에게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비속어와 웃음을 함께 쏟아 냈다. 뒤이어 플라스틱 통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꽃다발을 쓰레기통 속에 처박은 건 아닐까? 하윤은 담장에 손을 올리고 당장 올라갈 기세로 몸을 움직였으나, 결국 넘어가지 못하고 담장을 내려갔다. 담장에 쓸린 손과 무릎이 돌가루에 하얘졌다.

하윤은 그것이 돌가루나 먼지가 아닌 오물같이 느껴졌다.

‘그냥 갖고 있을걸.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진짜 전해 줄지도 모르잖아. 무경인 어차피 안 내려왔을 거고.’

“…….”

무경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마주치는 아무에게나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아무나가 조금 재수 없게 최성한이었을 뿐이다.

‘깊이 생각하지 말자. 오늘은 그냥 무경이 축하해 주러 온 거야.’

조금만 더 생각했다간 눈물이 찔금 나올 것 같았다. 하윤은 고개를 젓고는 주변을 서성였다. 그래도 혹시나 최성한의 말처럼 무경이 내려올까 봐.

그러나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무경은 머리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최성한이 이상한거지. 바빠서 올 겨를이 없을지도 모르잖아.’

휴대전화를 확인할 새도 없이 바쁜 게 틀림없다.

하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주변을 서성였을까. 졸업식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하윤은 황급히 정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곤 망설이다가 남은 돈을 털어 꽃다발을 하나 더 샀다. 여태 남아 있던 거라 싸기는 해도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다. 꽃도 좀 시든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지갑 사정이 사정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깥에 오래 있어 언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교문 너머를 열심히 살폈다. 잠시라도 눈을 뗀 사이 무경이 나올까 봐, 혹은 자신을 알아보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애처로운 노력에도 무경은 금방 나오지 않았고, 급기야 하윤을 알아본 몇몇이 다가와 인사했다. 워낙 좁은 동네라 이 년 조금 넘는 시간으론 하윤을 지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가온 그들은 왜 그렇게 아무 인사도 없이 학교를 떠났냐고, 걱정했었노라고.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봐서 좋다는 등의 말을 건넸다. 어떻게 지냈으며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무경과는 왜 사이가 틀어진 건지 묻기도 했다.

하윤은 그들이 단체로 레퍼토리를 맞추고 온 건가 싶어 잠시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예상했던 범주에 있던 물음이라 그럭저럭 대답해 냈다.

비록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거나 다가올 때마다 가슴이 덜컥이고 배 속에서 불안이 요동쳤지만, 그래도 어찌어찌해 냈다. 한 삼 년치의 사회성을 미리 끌어다 쓴 기분이었다.

‘빨리 나와라. 제발 좀 빨리 나와.’

사람 무리를 훑으며 초조하게 속으로 중얼거리길 얼마나 했을까. 익숙한 머리끝이 보였다. 하윤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무경을 불렀다.

“무경아!”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까. 무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백무경! 여기야, 여기!”

무경은 잠시 멈춰 섰다가 하윤을 발견하고는 아예 몸을 돌렸다. 후문으로 향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며 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어!”

하윤은 잠시 씩씩거리다가 이내 인파를 헤치고 후문으로 달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기만 하면 되는 무경과 달리 제법 거리가 있었다.

“백무경!”

이를 악물고 오랜만에 목에 피 맛이 나도록 달렸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에게 붙잡혔던지 무경은 막 후문을 나서고 있었다. 마침내 무경을 따라잡은 하윤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거 놔.”

“무경아, 잠시, 잠시만. 나 숨만 고르고.”

“밖에서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놔.”

“아, 진짜. 이거. 이거 받아.”

“…….”

“최, 후우. 최성한한테 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걔가 안 줬지?”

“…….”

하윤은 무경을 향해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내내 불안하고 초조한 탓이었을까. 표정을 짓는 게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무경아, 졸업 축하해.”

축하 인사에도 무경의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하윤이 아랑곳하지 않고 꽃다발을 안기자 아예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윤이 떨어지는 꽃다발을 잡아채는 사이, 무경은 하윤을 지나쳤다.

“무경아!”

하윤은 다급히 무경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자동차 행렬이 아니었다면 진작 무경을 놓쳤을 것이다.

“야아, 가지 말고 사진 하나만 남겨 놓자. 어?”

“됐어.”

“그래도. 어? 졸업식이잖아.”

하윤의 애원에 무경은 무시로 일관했다. 걸음이라도 멈춰 보려고 잡을라치면 어찌나 그렇게 몸을 빼는지. 자꾸만 울컥거리는 마음에 표정이 자꾸만 굳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찰나, 다른 학부모로 보이는 행인이 끼어들었다.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말에 하윤은 무경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금세 놓았다. 손을 아예 뒤로 숨기고서야 따가운 시선이 걷혔다.

“한 장만. 진짜 딱 한 장만. 그럼 진짜 안 붙잡을게. 아무리 그래도 졸업사진 없는 건 좀 그렇잖아. 어?”

하윤은 절박하게 매달렸다. 이거 하나라도 안 되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사진 하나 남기는 게 뭐라고. 학교 나오게 저쪽에 서요. 내가 잘 찍거든.”

하윤은 무경을 힐끔거렸다. 학부모에게는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모질 수 없었던지 무경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자세를 바르게 세우는 것을 보며 하윤은 잽싸게 준비해 놓은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좀 곁에 붙어 서요. 너무 안 친해 보인다.”

학부모의 말에 힘입어 하윤은 슬쩍 옆으로 다가갔다. 겸사겸사 넌지시 꽃다발을 내밀었으나 무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윤을 노려보았다.

결국 꽃다발은 하윤이 들었다. 대신 무경을 향하도록 꽃다발을 기울였다.

“찍습니다! 자, 하나, 둘!”

“감사합니다.”

무경은 꾸벅 인사한 다음 직접 카메라를 챙겼다. 예의를 차렸다기보단 빨리 카메라를 받아 더 찍지 못하게 하려는 게 뻔했다. 하윤은 그사이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켰다.

“무경아, 무경아!”

무경이 자신을 돌아보는 때에 맞춰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무경이 곧장 몸을 빼는 바람에 더 찍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하윤은 자신을 향해 두둥실 날아오는 카메라를 잡으며 재잘거렸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 깜짝하니까 이 년이 지난 것 좀 봐. 다음에 눈 깜빡이면 또 이 년 훅 지날걸? 너도 그렇지?”

“…….”

졸업식은 어땠는지, 훈장도 받았는지. 또 누구랑 사진을 찍었는지, 자신이 없었는데 외롭지 않았는지. 무경이 대답을 하든 말든 하윤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게 거슬렸을까. 돌연 걸음을 멈춘 무경이 하윤을 멈춰 세웠다.

“좀 닥쳐. 턱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닥치랬지.”

“…….”

서슬퍼런 기색에 하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적었다.

[짜장면 먹으러 안 갈래?]

문자를 확인한 무경은 진절머리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뭐라 말하는 대신 돌아서서 택시를 잡았다. 하윤은 택시에 따라 타려 했으나 무경이 그의 가슴팍을 밀쳤다.

“…….”

하윤이 밀려난 사이 무경은 택시 문을 닫았고 차는 곧장 출발했다.

신호는 또 왜 그렇게 잘 받던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져 육안으로는 쫓을 수도 없었다.

홀로 남은 하윤은 무경이 밀친 가슴팍을 문지르다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신경을 내내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인지 뒷목이 잔뜩 뭉쳤다.

“……돈도 없었는데 잘됐지 뭐.”

몇 달을 마음 끓였던 졸업식이 드디어 끝이 났다. 조금이나마 홀가분했다.

“진짜 잘됐지.”

하윤은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다가 학교로 돌아갔다. 근처 지하철 역사에서 카메라와 가방을 숨기고 벤치에 앉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켰다.

겨우 졸업식에 참석해 사진 하나 찍어놓은 게 뭐라고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힘들단 말인가.

대체 뭘 했다고.

“…….”

하윤은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 다리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런다고 다리의 떨림이 멎은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호흡하며 숨과 마음을 골라 보려고 했으나 이쪽도 떨림이 옮고 말았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숨을 인지했을 땐 바지에 동그란 물 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맞은 것도 아니고 못 들을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생각한 대로, 딱 예상했던 대로의 말만 주고받았다.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스스로 이유를 댈 수조차 없었다. 갑갑하고 화가 나서 어딘가에 화풀이라도 하고 싶다가, 또 그러기엔 이유로 댈 것들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그저 티끌만 한 것들이 너무 많았을 뿐이다. 쌓고 쌓이다가 눈꺼풀이 견뎌 낼 무게에 다다랐을 뿐. 그래서 보잘것없는 이유가 툭 건드리자마자 쏟아진 것이다.

하지만 별일이 아니었다.

이따금 있는 일이었으니까.

늘 그랬듯 조금 쏟아 낸 뒤엔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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