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4. 거짓말쟁이의 스쳐 지나가는 시간들
치이익!
밥솥에서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하윤은 눈을 떴다. 아침 여섯 시 십오 분. 예약 취사 기능 덕분에 밥솥은 매일 아침 지정된 시간에 김을 뺐다. 김이 빠지지 않는 날은 오히려 곤란했다. 쌀을 올리지 않고 잠들었다는 것이니까.
하윤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자락을 뭉쳐다 끌어안았다. 이불을 한껏 끌어모았음에도 바라는 부피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생각한 자세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윤은 뒤척이다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하품하며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주방 불이 켜는 소리와 함께 하윤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와 음식 냄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나온 부친이 거실 불을 켜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이제 거실은 하윤의 공간이 아니었다.
일어나라고 직접 깨우진 않았지만, 부친은 거실에 나오면 TV부터 틀었다. 뉴스를 보기 위해 채널을 돌리고 볼륨을 높였다. 이쯤 되면 잘려야 잘 수가 없었다.
“잘 주무셨어요, 아버지.”
“오냐.”
하윤은 비척비척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앉았다. 까치집이 된 머리와 얼굴을 스스로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롱한 눈으로 뉴스를 보다가, 모친을 도와 아침을 차렸다. 그래봤자 밥을 푸고 수저 놓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런 다음에는 기준을 깨우러 갔다. 이제 다 컸다고 모친이나 동생이 깨우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하윤이라고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기준은 공부 외의 일로 새벽 늦게 잠들기 때문에 달콤한 아침잠을 깨우러 오는 사람 모두를 싫어했으니까.
“김기준, 일어나. 밥 먹어.”
“응…….”
대답은 곧장 하는데 일어날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하윤이 재차 흔들자 그는 짜증과 함께 몸을 흔들었다.
“아! 알아서 일어날게. 재촉 좀 하지 마!”
“이 새끼가.”
불뚝 성질이 훅 올라왔으나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오늘은 바쁜 날이었다. 오늘의 하루를 싸움으로 시작할 수 없었다.
“알아서 일어나라. 난 분명히 깨웠으니까.”
기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하윤은 주먹 드는 시늉 한번 한 뒤 기준의 방을 나왔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지하도 깨지 않고 있었다. 밥을 먹을 바에야 잠을 조금 더 자겠다고 했다.
“어휴, 아침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한번 제대로 굶어 봐야지. 차려 주는 밥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아야 해. 저래 놓고 군것질하는 데 돈 다 써서 나중에 엄마아 하고 손 벌리지.”
모친의 말에 부친은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도 자꾸 애들이 달란다고 용돈 더 주지 마요. 버릇 나빠져.”
“아니, 나도 안 주고 싶지. 근데 준비물 사야 한다고 급하다는데 어째.”
“그게 다 수법이라니까.”
“아휴, 나도 이제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다. 없어. 나도 용돈 다 떨어졌어.”
용돈 가불 좀 해 달라는 부친의 말에 모친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모친은 이렇게 방만하게 가계 운영을 했다간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부친을 몰아세웠다.
“…….”
하윤은 국물을 뜨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 모친이 지적한 방식으로 용돈을 좀 더 받아 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텄네.’
오늘을 위해 용돈을 모아 두긴 했지만, 용돈이란 언제나 다다익선 아니던가. 하지만 오늘 대화가 흘러가는 것을 보아하니 용돈을 얻기 힘들 것 같았다. 하윤은 깔끔하게 단념하곤 식사에 열중했다.
모친도 잡곡밥을 했지만, 백진하와 같이 잡곡 숭배자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잡곡만 덜어 줄 순 없었다. 잘게 빻아진 잡곡이라 골라낼 수가 없었고, 또 대신 먹어 줄 사람도 없었다.
하윤은 괜히 수저질을 머뭇거리다가, 일부러 크게 한술 떠 입안에 욱여넣었다. 몇 번 그러고 나자 그릇이 금세 비었다. 겨우 먹은 줄 모르고 모친은 더 먹겠냐고 물었다. 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다 먹은 그릇을 물에 담갔다.
도망치듯 욕실로 향해 잠시 숨을 골랐다. 너무 바쁘게 먹은 탓일까. 숨이 찼다. 하윤은 벽에 기대 잠시 숨을 고르다가 욕실 구석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여유 부릴 새가 없었다. 하지만 막 몸을 일으켜 준비를 서두르려 할 때 여동생인 지하가 일어났다.
“밥 먹을 거야? 밥 줄까?”
“아니. 안 먹어. 지금 먹으면 지각이야.”
“그러니까 깨울 때 같이 먹었으면 됐잖아. 국에 말아서 한술이라도 뜨고 가.”
“아, 됐어.”
“그리고 욕실에 하윤이 들어갔어. 그냥 그 시간에 한술 떠.”
“아씨, 오빤 또 왜 지금 들어갔어! 나 씻어야 하는데!”
긴 머리를 감고 대충이나마 말리려면 지금 씻어야 한다며 지하는 욕실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채근을 이기지 못한 하윤은 칫솔을 문 채로 욕실을 나왔다.
“아휴, 성질은. 진짜 누굴 닮았는지 몰라. 하윤아, 넌 그냥 안방 화장실 써.”
“아버지 들어가신 것 같은데요.”
모친은 같이 들어가서 씻으라며 미안함을 담아 미소 지었다. 하윤은 입을 삐죽 내밀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쫓겨났느냐는 부친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를 다독였다. 그사이 거실 욕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기준의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준 또한 씩씩거리며 안방 화장실 문을 열었다. 하윤은 복작복작한 욕실 안에서 가까스로 세면을 마쳤다.
“아이고, 아침마다 전쟁이다. 전쟁이야.”
일찍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면 어련히 좋을까. 그러나 매번 생각만 할 뿐 잘 지켜지지 않았다.
“후우.”
하윤은 몰래 긴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자신을 재촉했다. 시간을 확인한 다음 교복을 챙겨 입고 거실 구석에서 충전 중이던 디지털 카메라를 챙겼다. 참고서로 묵직한 가방을 그대로 둘러멨다가 슬쩍 주변을 살피곤 반절 덜어 냈다.
‘지갑 챙겼고, 휴대전화 챙겼고, 보조배터리……. 또 뭐 챙겨야 하더라. 그래, 가방.’
미리 생각해 뒀던 준비물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손가락을 다 꼽고 난 뒤에는 빈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확인했다. 괜히 얼굴 한번 쓸어내린 다음 머리를 털었다.
세 명이 모두 등굣길이 달랐기 때문에 준비를 마친 하윤은 먼저 현관을 나섰다. 용돈의 아쉬움에 괜히 부친을 돌아보기도 했으나 오늘은 부친도 바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어어, 차 조심하고!”
“네!”
밖으로 나오자 아직 남은 새벽 냄새가 하윤을 맞았다. 하윤은 혹여 쌍둥이들이 자신을 따라 잡을까 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찬바람에 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쁘게 달린 그는 쌍둥이들이 지나가지 않을 지하철 역사로 들어갔다. 지하철 사물함엔 따로 준비한 가방과 디지털카메라를 넣어 둔 다음 아무렇지 않게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따라 학교로 향했다. 가다가 마주친 낯익은 얼굴과 인사를 나누다가, 교실에 들어갔다. 자기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하윤은 계속해서 시계를 힐끔거렸다.
첫 교시를 마친 뒤, 하윤은 슬그머니 학교를 빠져나왔다. 아까 들렀던 지하철에 가서 여분의 가방과 카메라를 찾았다. 하윤은 가방을 둘러메곤 근처 은행 ATM에서 예금을 확인했다.
“에걔걔.”
‘예전엔 용돈이 떨어져도 무경이 꺼 써서 괜찮았는데.’
백무경 것은 내 것, 내 것은 내 것이었던 찬란한 과거여.
이제는 용돈도 줄고 다른 주머니도 없었다. 뻔히 저한테 돈 들어가는 구석이 많은 줄 아는데 용돈을 타서 쓰는 건 부담스러웠다. 해서 주머니 사정이 곤란할 때마다 통장에 있던 돈을 빼 썼더니 이제는 부스러기만 남았다.
하윤은 남은 부스러기를 박박 긁어 출금했다. 지갑에 남겨 둔 지폐와 합해 헤아린 다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가자.’
오늘은 무경의 졸업식 날이었다. 초능력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기관이라 출입 자격을 따졌지만, 가족임을 증명하면 평소와 달리 교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그곳의 졸업식은 다른 일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 근처의 꽃집, 길가 곳곳에 졸업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팔고 있었다. 하윤은 슬쩍 한 바퀴를 돈 다음 미리 배분한 예산 내에서 가장 그럴싸한 꽃다발을 샀다. 중간에 혹여 아는 얼굴과 마주칠까 봐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렸는지. 이 꽃다발 하나를 사는 데 얼마나 큰 심력을 쏟았는지 예전의 백무경이 안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하기야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면 하윤이 살 일도 없었겠지만.
‘그랬으면 나도 오늘 졸업했을 텐데.’
그랬으면 아마도 무경이 꽃을 준비했을 것이다. 같이 졸업하든 말든 뭐건 간에. 백진하나 서이주 둘 다 바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왔을 것이다. 이런 행사를 놓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정말 바쁘더라도 잠깐 와서 사진이라도 찍었을 것이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그러했으리라는 생각이 오늘 하윤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사실 이제 이곳만큼 하윤에게 껄끄러운 곳이 없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뒤에서 무어라 수군거렸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젠 어쩌면 그들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간혹 했다.
‘내가 무경이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괴수를 막으려 문을 닫고 있었든 간에 곁에 있진 않았잖은가.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자. 무경이 축하해 주러 온 거잖아.’
우울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른 것보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졸업식이라고 해도 신원이 확실한 직계 가족만이 방문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에선 사전에 제출된 명단을 통해 출입 자격을 확인했기에 하윤은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하윤은 몇 달 전부터 무경에게 자신을 졸업식 참석 명단에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한 번도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혹시 했는데.’
하윤은 예전에 드나들던 [문]이 있던 부근을 얼쩡거렸다. 그곳은 늘 사람이 드문 곳이었다. [문]이 여러 개가 포진해 있었고, 이런 곳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꺼렸다. 그래서 하윤은 예전에 학교를 몰래 출입할 일이 있으면 이곳을 이용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을 열 수 없었고 담장이 하윤을 가로막았다. 몸을 가볍게 하면 못 타고 오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걸렸을 때가 문제였다.
‘나와 주면 좋겠는데.’
하윤은 무경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자신이 왔고 꽃다발을 전해 주고 싶으니 이곳으로 와 달라고. 답장이 없어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혼자만 꽃다발 없이 앉아 있으면 안 되는데.’
백무경의 덩치를 생각하자면 혼자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우스움 뒤로 곧장 안쓰러움이 따라붙었다. 하윤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꽃다발의 포장을 매만졌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담배 냄새가 났다.
하윤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담장을 짚고 몸을 위로 올렸다. 슬쩍 아래를 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마침 상대도 하윤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어? 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