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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27화 (27/162)

27화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제발 가지 마.”

하윤은 무경의 옷자락을 붙잡고 어린애같이 떼썼다.

“이거 놔.”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시퍼렇게 날 벼른 말투였으나 하윤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려줘. 제발 돌려줘.”

“……!”

무경이 하윤의 양어깨를 틀어쥐었다. 달아나지 못하게 벽으로 밀치고는 빌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빌게.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 내가 어떻게 하면 돌려줄래?”

“아니야, 하지 마. 무경아 그러지 마! 나, 제발.”

무경은 말 그대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하윤이 말렸으나 그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대체 사람들한테 뭘 했길래 네가 걔라고 그래. 넌 아닌데, 내가 걔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데 그런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대체 왜 다들 너라고 하는데. 아니야, 너 아니야. 걔는 너 아니야. 제발 돌려줘, 돌려줘.”

“…….”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돌려줘. 걔가 아니면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단 하나도, 아무것도 없어.”

목구멍에서 불덩어리가 오르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가 났다가, 또 슬펐다가.

저야말로 울부짖고 싶었다. 내 무경이를 돌려 달라고. 걔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니 자신이 있어 줘야 한다고. 그러나 그럴 수가 없어서 숨만 꾹꾹 삼켰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무경의 손을 떼어 냈다.

떨어지지 않으려 움켜쥔 손끝 때문에 손끝을 마주 잡는 모양새가 됐다.

그때 문득 모친과 고모의 말이 떠올랐다.

[포기할 건 해야지.]

‘포기? 내가 어떻게 백무경을 포기해.’

그간 많은 것을 내려놓은 것이 무색하게 욕심이 솟았다. 그사이 자신의 사정이 소용없자 무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양 차분해졌다.

실제 하윤은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무경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는 포기할 건 포기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하윤은 무경이 아닌 자신을 포기할 것이다.

“너, 얼마나 기억해? 어디까지 기억해?”

그러기 위해선 확인이 필요했다.

거짓말쟁이 피노키오는 벌을 받았다.

뒤늦게 남을 먼저 생각하며 위험을 무릅썼지만, 이미 늦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거짓말쟁이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다고 한들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그칠 리는 없으므로.

어떤 정신으로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갓 태어난 기린 새끼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윤은 긴장한 기색을 털어 내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했다. 물론 앞장서고 있는 무경은 제게 관심한 톨 주지 않았지만.

“아, 여기구나.”

하윤은 무경이 현재 머무는 집 앞에 들어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서이주와 백진하는 지위가 지위니 만큼 원한을 살 일도 많았고, 위협을 당할 일도 많았다. 예전에는 서이주와 백진하가 위협당한다 해도 순순히 당할 사람들인가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그러한 관계로 부부는 각지에 안전가옥을 준비했다. 물론 재테크도 겸했기 때문에 서울 알짜배기 위치에 건물이나 땅, 집 등도 매입했다. 다른 지방에 있는 집은 잘 모르지만, 서울에 있는 집은 하윤도 잘 알고 있었다.

수련의 일종으로 서이주와 함께 보고 다녔으니까.

‘선생님이 나중에 나한테도 떼 준다고 했는데.’

서이주가 집을 보는 기준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교통편과 초등학교가 인접해야 하며, 문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론 서이주가 다닐 수 있는 문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문과 문이 이어지는 통로 사이를 뚫어 샛길을 만들기도 했다.

‘이 집의 경우엔, 여기쯤이었는데.’

하윤은 신발장 겸 수납장을 열었다. 신발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하윤은 층이 나눠 지지 않은 통짜 장을 힐끔거렸다. 예전엔 보였을 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것이라곤 소화기와 옆 벽면에 작은 낙서뿐.

일견 장을 짜다가 남긴 낙서 같지만, 서이주 특유의 숫자 쓰는 방법이 들어가 있었다. 문득 팔찌의 곡옥이 깨어지며 흩어지던 그녀의 이름이 생각났다. 눈앞이 잠시 깜깜하게 느껴졌다. 하윤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던지 무경이 하윤의 목을 잡아 벽에 처박았다.

“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밀려왔다. 안경이 눌리며 눈가를 스쳤다.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리니까.”

“쫄기는. 능력도 못 쓰는 나 하나 처리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너 하나쯤은 처리할 수 있어서 미리 경고하는 거야.”

“미리 경고도 해 주고, 다 컸네. 다 컸어.”

너스레를 떨었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전날 무경이 저를 날려 버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무경은 하윤의 머리를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더 대꾸하는 게 귀찮다는 뜻이었다.

하윤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안경을 벗었다. 신발장 옆 거울에 눈가를 비춰 보았다. 살짝 긁혀서 살갗이 일어나 있었다. 물론 눈가의 상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 무경에게 맞은 곳들에 멍이 올라와 있었다. 조금 전에 잡혔던 목에도 자국이 올라오려는 중이었다. 하윤은 옷깃으로 최대한 상처를 가리다가, 언뜻 보이는 검은색에 고갤 돌렸다.

그러나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윤은 신발장에 남은 낙서를 손끝으로 한번 쓸어내린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허튼짓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오랜만에 와서 그런 거야.”

“오랜만에 왔다고?”

“선생님이 이곳 사실 때 같이 보러 다녔었거든.”

하윤은 서이주와 집 보러 갔을 때를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어떤 지역에 집을 사야 하면 지도를 펼쳐놓고 초등학교를 먼저 표시했어. 초등학교 옆은 치안이 좋고 대피소와 가깝거든. 애들은 대피 능력이 떨어지니까 교내에서 대피할 수 있는 곳과 외부에서 대피할 수 있는 장소가 고루 분포되어 있으니까. 나중에 일반인에게 팔 때를 감안한 거지. 안전하면 좋잖아?”

무경은 하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네가 하는 말은 뭐든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게 빤해 하윤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문이 복잡하게 있어선 안 됐어. 대신 선생님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은 있어야 했지.”

“……문.”

“그래, 문. 선생님과 난 문지기니까.”

“…….”

“그래서 연구소에선 말할 수 없었어. 우리나라 정서상 문지기는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텔레포터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영어로 부르면 인식이 좀 부드럽더라. 워낙 수가 적어서 분류하기 애매한 것도 한몫하지만.”

하윤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목이 말랐다. 그러나 막상 냉장고 안에 생수만 한가득 들어 있자 말문이 막혔다.

“너 여기서 밥 안 먹어?”

“그게 뭐가 중요해? 적당히…….”

“중요하지!”

하윤은 무경의 말을 끊으며 벽을 가장하고 있는 펜트리 문을 열었다. 안에는 보존식과 생필품이 그득 들어 있었다. 하윤은 레토르트 죽 두 개와 시리얼 바를 하나 꺼냈다. 껍질을 대강 까서 무경에게 들이밀자 무경이 고개를 까딱였다.

먹기 싫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꺼내는 거 너도 봤잖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까서 그래? 새거 줄게. 있어 봐.”

하윤은 시리얼 바를 박스 째 꺼냈다. 뜯지 않은 흔적을 보여 준 뒤, 상자를 뜯어 하나를 던졌다. 무심결에 받은 무경은 한숨과 함께 시리얼 바를 까서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윤도 시리얼 바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말도 많이 하고 울기도 해서 그런지 허기가 졌다.

어쩌면 겁이 나서 그런지도 몰랐다.

‘이제부터 백무경을 속여야 하니까.’

손바닥에 땀이 찼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장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야만 했다.

연구소에서 하윤은 무경에게 얼마나 기억하는지 물었다. 무경은 하윤에게서 얻을 게 없다 생각하고 냉정하게 하윤을 떼어 내려고 했으나, 그 또한 간절했기에 하윤을 찾아온 것이다. 하윤이 여지를 남기듯 말하자 떨쳐 내지 못했다.

무경이 머뭇거리는 찰나의 순간에 하윤은 말했다.

[확인할 게 있어. 그런데 여기서는 말 못 해. 너희 집으로 가자.]

무경은 왜 자신의 집으로 가야 하느냐 되물었고 하윤은 첫째로 보안이 중요하며, 둘째로는 무경이 믿을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네가 버티겠냐는 게 그 이유였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하윤이 거슬리기는 해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순순히 들어주었다.

어느 정도로 순순히 들어주었느냐 하면 하윤이 담당 연구원에게 재활 훈련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 부모님께 친구 집에 들렀다가 올 테니 귀가가 늦겠다는 전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나니까 다행이지.’

저가 아닌 다른 사기꾼이었다면 한탕 크게 해 먹고 해외로 튀었으리라.

어쨌든 적당히 시간을 벌면서 하윤은 무경을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했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네 기억엔 문제가 있어. 그런데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전에 변호사가 왔을 때, 그는 네가 걔에 관한 것을 잊었다고 했어. 그런데 넌 지금 나도 기억 못 하잖아.”

“……?”

“넌 걔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문제로 생각했지 그 외에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중요도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렇다 쳐도, 어찌 됐든 기억하지 못하는 건 기억하지 못하는 거잖아? 또 네 기억이 뭐가 잘못됐는지 확인해 줄 사람도 대동하지 않았고.”

“그게 지금 너라는 소리야?”

“그래.”

무경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말이 되는 소릴 해.”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네가……, 하. 됐다.”

“…….”

하윤은 잠시 기다렸다. 무경은 말을 말자고 했으나,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필요했으면 진작에 나섰어야지.”

“어떻게 나서냐. 너 만나러 갔던 날에 네가 날 날려 버렸는데.”

“…….”

“그 뒤에는 변호사 불러서 접근금지 때려 버렸지.”

하윤은 능력을 잃었지만, 아직 에스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제 재활포기각서를 썼으니 조만간 비에스퍼로 변경되겠지만, 어찌됐든 아직 에스퍼라는 것이 중요했다.

일반인들과 달리 에스퍼들에게 다소 강하게 발휘되는 법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접근금지 명령이었다. 에스퍼의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 상대가 위협을 더 크게 느낀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특히나 에스퍼 간의 스토킹은 상대를 위협하고 불안정하게 하여 살인 혹은 폭주의 위험 등으로 내몬다는 이유에서 더 엄벌에 처해지고 있었다. 물론 인생 막 나가자는 놈들은 그런 걸 따지지 않고 저지르지만, 하윤의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

해서 무경이 지낼 만한 곳이 어디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무경아 확실한 건, 난 너와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야.”

“웃기지 마. 어머니가 아직……!”

“선생님. 그날에 돌아가셨어.”

“……네가 어떻게 알아.”

“그날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나니까.”

말을 마친 순간 몸이 붕 떴다. 반쯤 예상했던 바라 이전과 달리 낙법을 써서 떨어졌다. 하지만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라 머리가 얼얼했다.

“너 뭐야.”

“나? 김하윤.”

“…….”

“서이주의 제자, 문지기 김하윤.”

하윤은 안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절 죽일 듯이 바라보는 무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가 걔 말고 또 잊어버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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