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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라스트-26화 (26/162)

26화

아파트 단지로 향하던 길에 하윤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기척을 내지 않고 다가가는데, 아는 얼굴이 하나 더 보였다.

‘고모.’

하윤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아예 마주치지 않게 다른 곳에서 시간을 죽이려다가 문득 변덕이 솟았다. 하윤은 되돌아가, 담벼락 뒤에 몸을 숨겼다. 고모는 지하 주차장이 입주민 전용이라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댄 모양이었다.

‘엄마는 배웅해 주러 온 것 같고. 아니면 가다가 마주쳤거나.’

막 마주쳤을 때만 해도 조곤조곤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새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물론 열이 올라 소리를 높이는 건 고모 쪽이었다.

“아니, 올케도 참 답답하다. 걔 능력 어디가 재활시킬 비전이 있어. 더 늦기 전에 일반 학교 알아보고 준비해야지. 아무 소용없는 거에 매달려 있다가 그렇게 허송세월하면 어떻게 해.”

“형님, 그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닌데. 이전에 누리고 살았던 게 그리워서 못 놓는 건 알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부모가 잡아 줘야지. 올케 애 셋이야. 서울 바닥에서 애 하나 제대로 키워 내는 것도 집 기둥뿌리 뽑아 가면서 해야 하는데 셋이라구. 현실을 봐야지. 어렵게 말 꺼냈는데 내가 돈도 안 주고 야멸차게 쏘아붙인다고 생각하겠지만, 잘 생각해 봐.”

“…….”

“첫째 허송세월하는 데 끌려가면 쌍둥이들 어떻게 해. 둘 입학시키는 것만 생각해도 허리 나갈 판국에, 별 능력도 아닌 거 재활시킨다고 기둥뿌리 뽑지 말구. 하윤이 설득해서 그만 고집부리고 일반고 준비하게 해. 지금 걔 다른 데 시간 보낼 때 아니야. 지금 준비해야 내년에 새로 입학하는 애들 사이에 보내서 적응이라도 시켜 보지. 안 그래? 그리고 재활하는 데 본인 부담금만 해도 삼백 돈이잖아.”

고모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말로 차도가 있긴 했어?”

“원래 정신계 괴수한테 노출되고 난 뒤엔 능력 회복이 어렵다고 해요.”

“나아진 게 없네? 그러면 얼마나 더 다녀야 하는데? 그것도 아는 것도 없고?”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현실을 봐야지 올케. 하윤이만 자식이고 기준이 지하는 자식 아니야? 그런 거 아니잖아. 셋 키우려면 포기할 건 해야지.”

직설적이긴 했지만 틀린 소린 아니었다. 하윤은 벽에 기댄 채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모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포기할 건 해야지.’

그래. 포기할 건, 해야지.

“이제 저 재활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하윤의 말에 재활 센터 상담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 모르는 거야. 재활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약해지니.”

“그냥, 지금 이 시기가 너무 아까워서요.”

“아깝다니.”

“이 길이 아니라도 다른 길로 평범하게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나이잖아요.”

고모와 모친의 말을 엿들은 지 며칠 뒤에 하윤은 재활 훈련을 그만하겠노라고 말했다. 모친도 부친도 말렸으나 하윤이 강경하게 말하자 이내 한걸음 물러섰다.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말해 주길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활 센터의 상담사는 하윤이 부모님의 서명을 받은 재활포기각서를 내밀자 한숨과 함께 남은 말을 갈무리했다.

이제 연구소에 가는 것만 남았다. 연구소 쪽은 중단 의사를 밝히는 게 조금 껄끄러웠는데, 그들이 자신으로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이제 그만두겠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또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무거운 마음과 발걸음으로 연구소를 찾았으나 연구실에 일이 있어 일단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만 들었다.

하윤은 휴게실로 나와 자판기 앞에 섰다. 지폐를 욱여넣고 음료수를 고를 때, 짜증스러운 숨소리가 들렸다. 하윤은 자판기에 비친 얼굴을 보며 숨을 헉 들이켰다.

“…….”

꿈에서도 쉽사리 그리지 못했다. 그리는 순간에 여태 제가 켜켜이 쌓아 온 모습을 허물어트릴까 봐.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가 음료수를 먼저 뽑았다. 하윤은 음료수를 주워 든 채 뒤돌아섰다. 자판기에 비친 대로 반대편 벽 쪽에 무경이 기대 서 있었다. 하윤은 그의 얼굴을 힐끔 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혹 그때처럼 그를 자극할까 봐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잠깐 본 것만으로 머릿속이 얼얼하고, 눈앞이 컴컴하게 느껴졌다. 하윤은 음료수 캔만 만지작거리다가 변명같이 말했다.

“나, 너 쫓아온 거 아니야.”

“……알아.”

“안다고?”

“내가 찾아온 거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억이라도 찾은 것일까. 희미한 기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공기가 따끔거렸다. 이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이제 하윤은 따끔거리는 공기의 정체를 알았다.

무경의 힘이 사방에 퍼진 것이다.

하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냉방이 확실한 건물 안임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본능적으로 무경을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이 허튼 짓을 한다면 단번에 숨이 끊길 것이다.

오랜만에 본 무경은 많이 말라 있었다. 원래도 살이 없는 편이긴 했으나 근육으로 가려진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뼈대가 도드라질 만큼 살이 빠져 있었다. 눈 밑은 검고, 흰자엔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보였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는 눈빛 하나만은 형형했다. 비록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지라도.

“날 왜 찾았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왜 그랬어?”

“……?”

왜 그랬냐니. 하윤은 무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눈을 깜빡이자 무경은 짜증스레 눈을 감았다. 미간에 주름이 지고, 피부에 닿는 공기는 조금 전보다 더 따끔거렸다.

“네가 그랬잖아.”

“대체 뭐가.”

“네가 걔가 있어야 할 자리를 가로챘잖아.”

“걔?”

“너 지금 그날 능력을 과다사용해서 부작용으로 아무 힘도 못 쓰는 거잖아.”

어처구니가 너무 없다 보면 웃음이 나왔다. 지금이 딱 그랬다. 하윤은 피식 웃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경이 하는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걔가 사라진 틈에 사람들의 정신을 만지든 뭐든 해서, 자신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때 힘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지금 힘을 잃은 것이라고.

“새로운 관점이네. 날 아는 애들은 내가 혼자서 살아남으려고 도망쳤다가, 양심에 찔려서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잘못됐다고 생각하던데.”

그래서 네가 충격을 먹어서 김하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짐작들 하던데.

하윤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꼴깍 삼켰다.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대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포터인 하윤이 왜 능력을 잃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을 구조한 것도 아니고, 물건을 옮긴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뭘 했길래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해 아예 능력을 잃었는가.

[도망.]

김하윤은 ‘그날’ 겁에 질린 나머지 현장에서 달아나려 거듭 능력을 사용했으나 미궁의 영향으로 멀리 달아나지 못했고, 결국 삶의 마지막을 목전에 두고 가족인 백무경을 찾아간 것이다.

그게 하윤을 아는 사람들, 혹은 재활 센터에 마주친 사람들이 예상하는 사건의 전모였다.

어쩌면 맞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마 거의 확실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이야기.

“난 텔레포터야. 정신을 조작하는 건 원래도 못했어.”

“거짓말하지 마.”

“우기지 마. 그런다고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니까.”

정신없이 흥분할까 봐 걱정했는데, 말이 제법 덤덤하게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무경의 바지를 움켜쥐고 울었을 것이다.

저녁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창밖에는 노을이 지려 하고 있었다. 바깥 조경수가 훤히 보이는 전면 창으로부터 노란빛이 쏟아졌다. 하윤은 자판기 옆에 놓인 일자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으로부터 스며드는 빛을 피해, 그늘진 곳에 앉았다.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캔을 따서 목을 축였다. 그러면서 무경이 왜 저를 찾아왔을지 생각했다. 단순히 제게 따져 물으러 온 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연구소 안이 아니라, 좀 더 캐묻기 좋은 으슥한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것이다. 무경은 기감이 예민해 타인의 기척을 잘 알아차리니까.

‘그것도 변했을까?’

무경은 예전부터 타인의 기척을 잘 알아차렸지만, 기척만으로 누구인지 구별하지는 못했다. 그게 가능한 상대는 저 하나였다. 조각 특유의 뭔가가 있으리라고 예상할 뿐이지만, 지금도 상태에서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제 우리는 서로의 조각이 아니게 된 걸까.’

무경이 일시적인 기억장애로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해 힘을 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날 망가져 버려서 더는 김하윤의 조각이 아니게 된 것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자신도 무경에게 능력을 써 확인해 봤을 것이다.

‘능력만 있었어도.’

하윤은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문을 열었는데 무경이 그 문을 통과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나는 백무경을 순순히 포기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백무경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날 찾아가지도 않았겠지.’

아니다. 그랬을 리가 없다. 그땐 무경이 자신을 버리리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백진하의 죽은 몸을 동강 내고, 서이주를 빨리 찾아내지 못해 죽음으로 내몰았으면서도 무경이 자신을 버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평생 갚아야 할 속죄라고 생각했을 뿐.

설령 이전에 기억을 잃었더라고 하더라고 자신은 무경은 구하러 갔을 것이다. 아무리 그에게 얽매이기 싫다고 마음을 밀어내곤 했더라도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유일한 존재.’

하윤에게도 무경이 그러했듯 무경에게도 하윤이 그러했으리라.

그러니 기억이 엉킨 지금에도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실제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존재로서 인식하며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이고 있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

하윤은 문득 무경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지 알 것 같았다.

무경이 속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자신을 찾아와 별다른 짓도 하지 않은 채 멍청하게 묻는 이유가.

“전부 다 내가 ‘걔’라고 하니까 찾아온 거지. 혹시나 해서.”

그러나 뒷모습만 봐도 아니라는 느낌이 왔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봐도 아닌 거지?”

무경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윤은 고개를 젖힌 채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변호사가 찾아와 무경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때보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보다, 가족들의 동정 어린 시선보다 지금이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때리거나 욕을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진짜 뭔가 한 건 없어.”

“…….”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무경아. 진짜 나 아무것도 안 했어.”

이건 진짜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 거짓말이 아니야. 네게 숱하게 거짓말을 했지만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야.

하윤은 자판기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양손을 그러쥔 채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무경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가 노을빛 사이로 걸어가는 것을 본 하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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